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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왕하 6: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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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왕하 6:14-17)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저히 인간의 이성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라고 해서 ‘불가사의’라는 말을 씁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비롯해서 로마의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 영국의 솔즈버리 평원에 있는 엄청나게 큰 돌 거석기념물인 스톤헨즈, 무려 55.9m나 되는 거대한 석탑이 5m정도 기울어져 있는데도 무너지지 않은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 터키 이스탄블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 중국의 만리장성,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를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현대의 과학이나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가사의한 것들이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일지라도, 그것을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결코 불가사의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역사상 정말 불가사의한 것이 있다면 그건 우리의 신앙이고, 우리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지명하여 불러 당신의 백성 삼아주신 것, 세상에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나를 택하사 구원해 주신 것이 최고의 불가사의입니다. 또 성경에 나와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다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에서부터 노아 홍수, 바벨탑 사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주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역사의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 이 모든 것은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앙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이야기도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의 때는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대략 주전 850년 경 북 이스라엘에 여호람 왕이 통치하던 때라고 여겨집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는 가장 큰 세력은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던 ‘아람’이라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에 대해서 불가사의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범하기 위해 작전을 짜서 공격을 감행하면,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아람의 작전을 다 알고서 오히려 역공을 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은 전쟁을 하기만 하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아람 왕이 군대의 최고 지휘관들을 불러 모아놓고 대책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우리가 작전을 세우기만 하면 어떻게 이스라엘이 미리 알고서 역공을 해오는가? 혹 우리 가운데 이스라엘과 내통하는 비밀첩자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결론은 의외였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 엘리사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 우리가 귓속말로 하는 것까지도 다 알아낸다는 것입니다. 그 엘리사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작전을 짜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공격을 하더라도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람 왕은 엘리사를 제거하기 위해서 많은 군사를 급파했습니다. 엘리사를 제거해야만 이스라엘을 공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도단이라는 성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아람 군대는 밤중에 몰래 도단 성을 포위했습니다. 도단 성에서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군사들로 겹겹이 포위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눈을 비비고 일어나 보니, 아람 군대와 병거들이 도단 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게하시가 엘리사에게 뛰어 들어가서 소리를 칩니다. “우리는 이제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상황을 보고 받은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기도를 들으시고 게하시의 눈을 열어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두 가지를 보았습니다. 먼저는 도단 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아람 군대와 병거들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볼 때에 게하시는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꼼짝 없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육신의 눈입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기도를 통해서 게하시는 영의 눈이 열리면서 또 하나를 보게 됩니다. 도단 성을 둘러쌓고 있는 아람 군대와 병거들보다 훨씬 더 많은 하나님의 군대가 엘리사를 지켜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른쪽 눈과 왼쪽 눈, 그렇게 두 개의 눈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게하시처럼 육의 눈과 영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서 영의 눈이 어두워서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육의 눈이 밝은 것도 큰 축복입니다. 우리 교우님들 가운데도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작은 글씨까지 읽으실 수 있는 좋은 눈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눈이 잘 보이지 않아서 큰 불편을 겪는 분들도 있고, 그렇게 연세가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눈이 좋지 않아서 성경을 읽고 싶은데도 읽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새 예배당을 지은 후에 저 뒤쪽에 앉아 계신 분들을 위해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예배상황을 영상으로 보여드립니다. 우리 육의 눈으로는 보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에서와 같이 선명하게 볼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까이에 있는 사물조차도 분명하게 볼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이 안 좋아서 안경을 쓰기도 합니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생활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라식수술을 통해서 시력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좀 더 밝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편리하게 생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육의 눈으로 보는 것에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영의 눈에도 우리가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영의 눈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영의 눈을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의 눈’입니다. 영의 눈은 믿음을 통해서만 열려질 수 있고, 믿음을 통해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능력을 ‘시력(視力)’이라고 합니다. 육의 눈으로 사물을 잘 볼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육의 눈으로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을 시력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아예 사물을 전혀 볼 수 없는 사람을 ‘맹인 / 시각장애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영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그걸 우리는 ‘영력(靈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떤 사람이 영력이 있는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영력이 뛰어난 사람입니까? 예언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까? 기도를 유창하게 잘 하는 사람이 영력이 뛰어난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력은 무언가가 행동으로 보여지는 것이기 전에, 세상이나 환경을 믿음을 통해서 바라보는 능력을 말합니다.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우리 앞에 당한 현상만을 보지 않습니다. 현상 배후에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당한 현상만을 볼 때에는 절망하고 낙담하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당한 현실은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압력으로 우리를 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현실만을 보는 육의 눈만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현실 너머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갖고 살아갑니다. 만일 우리가 영의 눈을 갖지 못하고 산다면 우리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게하시를 보십시다. 육의 눈으로만 볼 때에는 아람 군대가 자기들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것만 보였습니다. 그것을 본 순간 게하시는 ‘이젠 꼼짝없이 죽게 되었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육의 눈으로만 볼 때에 그건 사실입니다. 아무런 군사력도 갖추진 못한 엘리사가 어떻게 그 막강한 아람군대와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아람 군대가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전체의 군사력을 가지고도 아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그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엘리사 한 사람의 힘으로 그 막강한 아람 군대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육의 눈만으로 보고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하시를 위해서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기도를 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육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영의 눈이 열려서 영의 눈으로 오늘의 현상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대로 게하시의 영의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 모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의 눈이 열리게 하옵소서. 영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육의 눈으로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 자신의 실존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내가 누구인지를 보다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충고해 주려도 해도 “나는 내가 잘 알아” 그러면서 충고를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육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은 마치 망원경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더럽고 추한 모습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육의 눈은 우리의 겉모습만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인격이나 사람됨보다는 얼굴이나 겉치레를 보고서 사람을 판단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영의 눈은 우리를 현미경으로 보는 것처럼 보게 합니다. 작아서 육의 눈으로는 보지 못한 것까지도 보게 합니다. 우리의 내면 깊숙이에 감추어진 죄악들까지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육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영의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영의 눈이 열리자 이사야 선지자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모습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습이 비쳐지는데,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러운지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이사야 6:5)
  
여러분, 이게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나만 홀로 고고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영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에는 우리가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의 눈은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현미경처럼 너무 작아 감추어지고 숨겨진 허물들까지도 낱낱이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는 부정한 사람이로다”하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여러분, 영의 눈을 가지고 나 자신을 깊이 있게 성찰하며 나를 바로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의 눈으로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죄악 덩어리요 허물 덩어리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죽은 우리, 이사야의 고백처럼 ‘망하게 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가장 낮고 천한 우리를 들어 높고 높은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높여 주셨습니다. 이것만큼 귀하고 크신 은혜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죽었던 우리의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있게 느끼지 못합니다. 머리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슴 뜨겁게 그 사랑에 감격할 수는 없습니다. 영의 눈을 통해서 본 우리의 실존은 죄악 덩어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거듭나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로 격상된 모습입니다. 이것을 가슴으로 느끼며 사는 사람은 늘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게하시가 그랬습니다. 영의 눈이 열린 게하시는 엘리사를 둘러선 하나님의 군사들을 보게 됩니다. 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해서 역사하신 주님의 임재를 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만큼 큰 힘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비록 삶은 가난하고 여유가 없을지라도 그의 마음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부요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면 주위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전혀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나를 품에 안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께서 내와 함께 하시는데 좀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이 부끄럽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손을 잡아 주시는데 내 약함이 어찌 문제가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사가 그랬습니다. 그의 종 게하시는 성을 둘러쌓고 있는 아람 군대를 보고서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바라본 엘리사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불안해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의 눈으로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고 아람 군대와 맞서 싸울 군사도 없지만, 하나님의 군대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영의 눈이 열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며 산다면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해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의 눈이 열려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은 잔뜩 화난 무리들이 돌맹이를 들어 자신을 향해 던질 때에도, 영의 눈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자신을 향하여 두 팔 벌리고 서 계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 앞에서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첫 번째 순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영의 눈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보호하심을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영의 눈이 열려 힘든 세상살이 속에서 지치고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의 손을 꼭 붙잡고 앞서 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운 문제 앞에서 애타하며 갈등할 때에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밀어주시는 주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바라보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명기 31:8) 내 앞서 가시는 하나님, 나를 떠나지도 아니하시고 나를 홀로 버려두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눈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의 눈을 갖는 것입니다. 영의 눈으로 내 삶을 바로 보며 사는 사람은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게하시를 청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년이라는 말은 육의 눈이 아주 좋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건강한 눈을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을 둘러싸고 있는 아람 군대를 보는 데에는 아주 정확했습니다. 그러나 그 건강한 육의 눈은 그에게 두려움만 안겨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가지고 살던 엘리사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불말과 불병거로 자신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신앙의 힘입니다. 이게 신앙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의 힘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떤 눈이 더 밝습니까? 육의 눈이 밝습니까? 영의 눈이 더 밝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눈으로 세상을 더 많이 보며 살고 있습니까? 육의 눈입니까? 영의 눈입니까? 영의 눈을 떠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한 사람은 한 나라의 군대보다 강합니다. 엘리사가 그랬습니다. 

‘영혼의 찬양 전도자’라고 불리는 패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 1820-1915)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시를 참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등등 우리 찬송가에 그녀가 지은 찬송시들이 무려 21곡이나 됩니다.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입니다. 그가 태어난 지 6주만에 의사의 잘못 처방으로 인해 완전히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9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앞을 보지 못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83세 때 쓴 자서전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내가 그 의사를 지금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나를 맹인이 되게 하여 준 것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러나 이 말은 나의 진심이다. 실수는 의사가 하였지만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셨다. 진정으로 내가 믿기는 육체적으로 어둠 속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것은 나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기 위한 그의 뜻이었다. 만약 나의 육신의 눈이 떠서 세상의 것으로 장애를 받았다면 내 어찌 그토록 많은 찬송시를 쓸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비록 95년 동안 시력을 잃고 어둠에 갇혀 사는 살았지만 오히려 영의 눈을 떠 자기의 생애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고, 9천여 편이나 되는 찬송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영의 눈을 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십시다. 오늘 내 삶에 함께 하시고, 내 손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십시다. 그러면 어떤 고난이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 앞에서도 담대하게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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