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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신경(12) : 부활의 영광 (고전 15: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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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12) : 부활의 영광 (고전 15:50-58)

  

오늘은 사도신경강해 열두번째 시간으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I believe in ...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이 대목을 살펴봅니다. 육체의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생은 생로병사(生老病死),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결국은 죽게 됩니다. 예외가 없죠.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인생이 정말 허무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무상을 극복하고자 무던히 애를 씁니다. 몸에 좋은 음식 먹고, 운동하고, 염색하고, 비싼 화장품 바르고, 성형수술 하고 ... 나이가 들수록 좀 더 젊게 보이고 싶고, 오래 오래 살고 싶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인지상정입니다. 그러기에 육체가 부활한다는 메시지는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냉동인간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시체를 냉동 보관해 놓고 과학이 발전해서 시체를 소생시키고, 심지어 젊은이로 돌려놓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때가지 기다린다는 겁니다. 그 창시자가 로버트 에틴거인데, 오래 전에 죽은 그의 어머니와 두 아내를 냉각기에 보관해 놓고 있습니다. 글쎄, 가능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설사 가능하다 해도 근본적으로 죽음까지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정해 놓은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약속한 부활은 정말 놀랍습니다.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이상입니다. 본래 모습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약속은 문자 그대로 복음(Good News)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너무 나빠도 믿지 않으려 하지만, 너무 좋아도 믿지 못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사후에 내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몸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무지의 소치입니다. 흔히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면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예 없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있는 게 없어지나요? 

잠자리 한 마리가 연못 위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곤충 한 마리가 지나가다 물었습니다. “얘, 너는 왜 그러고 있니? 뭐 잃어버렸어? 찾아줄까?” 잠자리가 대답합니다. “아니, 연못 속의 내 친구들에게 훨훨 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 “그럼 네가 연못에서 나왔단 말이야?” “응, 어제. 순식간에 변하면서 날게 됐지. 이렇게 넓고 좋은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네.” 그 잠자리가 연못 속의 유충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려면 유충이 되는 수밖에 없겠죠.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이 되셨고 몸소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부활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활의 소망 가운데 승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흔히 ‘부활 장’이라 불립니다. 여기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부터 성도들의 부활까지 부활에 관한 모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성도의 부활에 관한 내용을 하나씩 살펴봅니다. 

[1] 부활의 확실성 : 예수 그리스도의 보증 

인간이 죽으면 그 육체가 썩습니다. 흙으로 돌아가 분해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어디로 가 있는지조차 모르게 됩니다. 그런데도 부활한다는 게 좀처럼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히 부활을 약속합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연의 현상을 통해 부활을 증거합니다. 씨앗을 뿌리면 다 죽은 것 같은데 거기서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고 그럽니다. 이것은 법칙이며 놀라운 생명의 역사입니다. 겨우내 죽은 것처럼 시커멓고 단단하던 나무 가지에서 파릇파릇한 이파리가 나옵니다. 정말 신기하죠.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약속은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봄철에 돋아나는 나뭇잎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또 나비를 생각해 보세요. 애벌레에서 번데기가 되고 나중에는 아름다운 빛깔로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이렇게 미물들에게도 부활의 신비가 있을진대 어찌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부활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부활의 확실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고전15:12~

13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부활은 하나의 법칙인데, 그 법칙대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그 법칙대로 부활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특별히 고전15:20 보면, 아주 단순명료하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은 부활의 샘플이라는 겁니다. 나무에서 첫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면 이후에 계속해서 똑같은 열매들이 열릴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으면 자동으로 우리 성도들이 부활할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참고로 말씀드리는 것은, 성도들 외에 불신자들도 부활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다른 종류의 부활이지만 말입니다. 요5:28~29 “28 ...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계20:12~15 참조) 부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입니다. 생명의 부활은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해서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심판의 부활은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해서 심판받고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한 성도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장차 생명의 부활로 영원한 천국에서 살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부활체의 영광 : 신령한 몸 

부활체는 한 마디로 말해서 신령한 몸입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육체와 질적으로 다른 몸입니다. 몸은 몸인데 새롭게 변화된 몸입니다. 바울은 빌3:21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장차 부활하면 예수님의 부활체와 같아진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체를 보면 성도들이 입게 될 부활체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몸은 몸인데 변화된 몸으로 먹을 수도 있고,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하고, 다시는 병들지도 늙지도 죽지도 않는 전혀 새로운 몸입니다.

몸이 다시 산다고 하니까 죽기 직전의 상태로 다시 살아나 그 모습 그대로 사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언제 죽는 게 제일 좋을까요? 가장 싱싱하고 아름다운 순간에 죽어야 되겠죠. 한 노인이 힘겹게 길을 가고 있습니다. 너무 안쓰러워서 지나가던 청년이 부축해 드렸습니다. 노인이 고마워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마워요, 젊은이! 나처럼 늙지 말아요.” 무슨 이야기인가요? 늙지 않으면 젊어서 죽으라고 ... ? 이런 식으로 생각하노라면 심란하죠. 늙어서 죽어도 문제이고 젊어서 죽어도 문제입니다. 그런데 부활체는 죽기 직전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좋은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혹자는 또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33세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으니까 아마 그 나이 때의 모습으로 부활할 거라고. 그런데 33세 때 모습이 별로 마음이 안 드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 때는 깡마르고 지금보다 오히려 볼품없었는데, 저는 싫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모습으로 ... ?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얼굴에 주름도 생겼는데, 이것도 흡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몇 살 때 모습으로 부활해야 좋을까요?

또 이런 걱정을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화장을 하면 부활할 때 괜찮나? 장기 기증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전쟁터에서 팔을 잃어버리고 의수로 평생 살았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심지어 이런 질문을 하는 청년도 봤어요. 민망한 이야기지만, 무덤이 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분봉이 사라졌는데, 그 자리에 농부가 밭을 가꾸어 배추를 심었습니다. 그 배추를 뽑아 김치를 담가 먹으면 그 성분이 다른 사람의 몸속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부활의 때에 과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요? 걱정도 팔자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가장 아름답게 부활하게 해 주시지 못할까봐 걱정됩니까? 그 어떤 경우에도 전능하신 능력으로 최선의 부활체로 변화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부활체는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고전15:42~44에 보면,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썩지 않는 몸 : 

현재의 우리 몸은 아무리 건강하고 아름다워도 늙고 병들고, 죽고, 결국은 썩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체는 병들거나 노쇠하지 않고, 죽지도 썩지도 않습니다.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그러므로 부활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또 이래야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의 육체를 갖고는 도저히 천국에 들어가 살 수 없습니다. 50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우리의 몸은 썩을 몸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살기에 부적합합니다. 하지만 부활체는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므로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우주인이 우주 공간에 갈 때 우주복을 입습니다. 그냥 가면 무중력 상태에서 파열된다고 합니다. 우리 몸은 대기권 안에서 살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주복이 엄청 비쌉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씨가 입었던 우주복이 5억 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옷을 입고도 산소통이 없이는 겨우 2시간밖에 버티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주에 가서 살려면 우주복을 입어야 되는 것처럼, 천국에 가서 살려면 그에 적합한 몸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② 영광스러운 몸 : 

한 평생 살다 보면 우리의 몸은 상처도 입고, 일그러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누구 앞에서도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고전15:43(상).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 부활체는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지금 우리 육체는 아무리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도 험한 세상 살다보면 상처 나고, 일그러지고, 늙어지고 ...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추해 집니다. 그래서 부끄럽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하면 자랑스럽고 빛나는 몸이 될 것입니다. 해같이 빛나는 몸입니다. 

어느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를 추억하며 반성하는 글을 쓴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한 번도 목욕탕에 데려가지 않은 것에 대해 늘 불만이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아버지와 함께 가는데 자기만 그러지 못해서 나중에는 상처가 됐습니다. 훗날 어머니와 대화를 하다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큰 화상을 입어서 옴 몸이 흉터투성이라 대중목욕탕에 갈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아들은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원망했던 게 너무 죄송해서 통곡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몸에도 부끄러운 장애나 상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때에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그때는 우리 모두 얼짱과 몸짱이 될 것입니다. 

③ 강한 몸 : 

우리 육체는 쉽게 지치고, 피곤하고, 병들고 ...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어떨까요? 43절(하). “ ...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부활의 몸은 영원히 지치지 않는 강한 몸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질병으로 시달린 사람도 더 이상 병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부활은 ‘완전한 치유’입니다. 

④ 신령한 몸 : 

현재 우리의 몸은 육의 몸입니다. 반면 부활체는 영의 몸 즉 신령한 몸입니다.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육의 몸은 육체의 정욕에 얽매이기 쉽습니다. 늘 죄의 유혹에 넘어집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성령의 인도대로 자유롭게 온전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눅20:36을 보면 천사와 동등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의 모습을 성경에서 확인하면 신령한 몸이 얼마나 신기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벽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요20:19,26) 금세 나타났다 사라졌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눅24:31,36) 생각만으로도 쉽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리 해변에서 만나자고 해 놓고 훨씬 먼저 가셔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 희한한 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마치 훨훨 날아다니듯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런 신기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겁니다. 

⑤ 각자의 영광이 다른 몸 : 

장차 부활할 때 아주 좋게 변화된다고 하니까 기대가 되면서 한편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될 수 있습니다. 너무 달라져서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거 아냐? 그러나 여러분, 그런 염려는 붙들어 매십시오. 변화되어도 인격적인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또 그때는 지금보다 지각력이 훨씬 좋아지기 때문에 거뜬히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수십 년 만에 만난 동창생이 너무 변해서 처음에는 못 알아보다가 대화하면서 추억을 더듬어보면 알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체도 맨 처음에 제자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다 나중에는 잘 알아보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변화산 위에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만난 적도 없는 모세나 엘리야까지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부활체끼리 그 광채가 서로 다릅니다. 고전15: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부활체의 영광이 각각 다르다는 겁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예수님의 부활체 중에 상처 부분이 더욱 빛났던 것을 참조하면 알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고 희생한 한 사람일수록 더욱 더 빛나는 부활의 광채를 지니게 될 겁니다. 

[3] 부활의 시기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

그러면 언제 부활할까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때입니다. 51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살전4:14~17 참조) 잠잔다는 것은 육체가 무덤 속에 흙속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천국으로 직행하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 재림할 때 살아 있는 사람은 산 채로 부활하고,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 있다가 부활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 수상의 일화입니다. 그는 임종이 가까워오자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장례식을 할 때 두 번 나팔을 불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처음 나팔소리는 취침나팔이고, 두 번째 나팔소리는 기상나팔입니다. 엄숙한 장례식에 기상나팔을 부는 게 이상하지만, 그의 신앙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죽으면 우리 영혼이 천국에 가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 쉬게 되니까 취침나팔을 불고, 예수님이 재림하는 그날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니까 기상나팔을 불어 달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처칠처럼 죽었다가 부활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살아생전에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해서 산 채로 부활하시겠습니까? 물론 우리 소원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쪽입니까? 혹시 육의 몸으로 수명이 다하도록 살고 싶어서 죽었다가 부활할 것을 기대하십니까? 천국과 부활은 훨씬 더 좋은데 무슨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살아생전 재림을 맞이하여 산 채로 부활하는 게 훨씬 더 좋은 겁니다. 이게 우리 성도들의 최대의 소망입니다. 

[4] 부활 신앙인의 자세 : 확신, 성결, 헌신

여러분, 우리가 나 자신의 부활을 믿는다면 이제 이 세상에서 남은 생애 어떻게 살아야 마땅하겠습니까? 

① 확신 :

무엇보다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58절(상).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 ” 이 세상에는 별의 별 사설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식 정보를 빙자한 숱한 사설이 있고 이단들의 사설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듣고 흔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도들도 이런 데 영향을 받아 신앙이 흔들리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진리는 불변입니다. 시대가 변한다 해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거부한다고 해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여론이나 다수결로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부디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부활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② 성결 :

우리가 부활을 확신한다면 당연히 성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고전15:32~34 “32 ...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 ” 바울 당시에 쾌락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에피큐로스 학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슬로건이 바로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케 세라 세라’(Qué será será 될 대로 되라)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세상이 타락했는지 ... ‘탕자 문화’요 ‘노세 문화’입니다. 성도들도 정신 차리지 아니하면 세상의 방탕함에 물들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내세를 믿기에, 부활을 믿기에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을 함부로 내굴릴 수 없습니다. 성결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임자 있는 몸’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신부들입니다. 계19:7~8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재림의 예수님을 만날 때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의요, 성화된 행실을 가리킵니다. 사실 우리는 춘향이보다 훨씬 쉽습니다. 춘향이는 이도령이 장원급제를 해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지만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절개를 지켰습니다. 우리의 부활은 확실히 보장된 겁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게 결코 어려운 게 아닙니다. 

③ 헌신 :

우리는 부활을 믿기에 남은 생애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58절(하). “ ...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는 장차 부활 후에 상급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기준은 주님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며 살았느냐 하는 겁니다. 특별히 복음 전도를 위해 얼마나 충성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결코 헛된 수고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는 투자를 했다가도 다 떼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위한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을 위한 헌신이 헛수고라면 바울이나 스데반, 주기철 목사나 토마스 선교사 같은 분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겠죠.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가장 빛나는 부활체로 우리와 만나게 될 겁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고백대로 부활의 소망을 갖고 험한 세상이지만 굳세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유혹과 핍박에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 성결하게, 그리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부활의 영광에 당당히 참여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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