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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중왕의 복음(2): 전령의 소리 (막 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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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중왕의 복음(2): 전령의 소리 (막 1:2-8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중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복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복음을 통역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감전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베드로의 복음이 되고, 베드로의 복음이 마가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을 배우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으면 마가의 복음이 우리 각자의 복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덕적 스승이나 정치적 해방가나 종말적 묵시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왕중왕,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중왕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된 것이 아닙니다. 본문 2-3절은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예언입니다. 이사야 40장은 양들을 먹이시고 어린 양을 품에 안으시고 온순히 인도하시는 목자 같은 왕(Shepherd-King)이 오신다는 예언입니다(사 40:11).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목자 같은 왕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목자-왕이 행차하실 때에 전령이 나타나서 목자-왕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700년 전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전령은 세례 요한이고, 목자-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1974년쯤에 청평 군병원에 십이지장 궤양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병원교회에 다니던 환우들이 1977년 몇 월 며칠인가에 청평병원에서 다 만나자고 약속했습니다. 3년 후에 만나자는 약속을 했지만, 저는 잊어버리고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약속대로 청평 병원에 간 환우가 아마 한 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약속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지키지 못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시면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만큼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능히 약속을 지키실 만큼 전능하십니다.

7백 년 전의 약속을 지킨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위인이 7백 년 전의 약속을 지켰습니까? 어느 종교 교주가 7백 년 전의 약속을 지켰습니까? 하나님은 어느 위인이나 어느 교주와 감히 비교할 수 없도록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세례 요한은 왕중왕 예수 그리스도의 전령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행차하실 길을 준비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왕이 행차하시면 왕이 행차하시는 왕도(王道)를 준비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왕중왕이 행차하신다. 왕도를 준비하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외치지 않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마 3:2).

이사야 40장이 말한 왕도는 보이는 도로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길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길을 준비하는 방법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왕중왕이 마음에 행차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왕중왕이 임하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 왕이 가까이 오셨다.”고 외칠 때에 어느 정도의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본문 5절은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고 했습니다. “다”라고 말할 정도로 무수한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몰려가서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외치는데 어째서 무수한 사람들이 몰려나가 세례를 받았을까요? 세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외친 것이 아닙니다. 도시 한 복판에서 외친 것도 아닙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초대형교회 강단에서 외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살지도 않고 잘 가지도 않는 황야에서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이 황야에서 외쳐도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받게 된 비결이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충만함”을 받았습니다(1:15).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위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했습니다(1:17). 세례 요한은 불과 비를 내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그들로 자복하고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즈음 식으로 하면 최고급 백화점의 최고급 옷을 입고 최고급 혁대를 띠고 최고급 음식을 먹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황야의 거친 옷과 황야의 거친 음식을 먹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왕중왕의 전령으로 ‘왕중왕의 행차를 준비하는’ 사명 하나 감당하기 위해서 거친 황야에서 거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왕중왕에 대해서 이렇게 전파했습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막 1:7-8). 세례 요한 뒤에 오시는 분은 왕중왕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릇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이 얼마나 큰지 세례 요한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세례’는 본래 ‘침례’입니다. 요단강 물에 집어넣었다가 빼내는 것입니다. 옛 생활에 대해서 죽고 새 생활에 대해서 산다는 의미로 물에 집어넣었다가 빼내는 것이 침례입니다 (롬 6:3-4). 장로교에서는 ‘침례’의 상징성에 초점을 두고 물을 뿌리는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침례’든 ‘세례’든 그 초점은 옛 생활에 대해서 죽고, 새 생활에 대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왕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살던 옛 생활에 대해서는 죽고, 왕중왕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새 생활에 대해서는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왕이 되어 마음대로 살던 옛 생활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왕중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새 생활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돌 같이 굳은 옛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 같이 부드러운 새 마음을 주십니다(겔 36:26-27). 성령은 새 마음을 주셔서 육신이 약해서 지키지 못하는 왕의 말씀을 지키게 하십니다(롬 8:3-4).

성령은 먼저 마음을 살려주십니다. 성령은 마른 뼈 같이 죽은 마음도 살리시고, 마른 뼈 같이 죽은 인생도 살리십니다. 성령은 죽은 가정도 살리십니다. 성령은 마른 뼈들로 강한 군대를 만드십니다(겔 37장). 성령은 예수님의 생수를 공급하셔서 죽은 심령을 살려내십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수가 들어가면 마음이 살고, 개인이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와 도시와 민족과 세계가 삽니다(겔 47장).

예수님은 새 마음을 주셔서 살리시는 성령님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물로 ‘침례’를 줄 때 물에 푹 잠기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푹 잠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에 푹 잠겨 성령의 능력으로 왕중왕의 다스리심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왕중왕의 이런 복음을 전하는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우리가 왕중왕의 다스림을 받는 길은 회개라는 것을 그는 강조했습니다. 제대로 회개하면, 왕중왕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체험합니다.

회개는 죄를 지적으로 인정하고, 감정적으로 죄에 대해 아파하고, 의지적으로 죄를 끊고 바른 삶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후회와 다릅니다. 후회는 과거를 아파하면서 미래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는 과거를 아파하면서 미래에 변화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과거의 잘못을 미래에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국 캔자스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알 존슨(Al Johnson)입니다. 그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왕중왕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19살 때 저지른 은행 강도짓을 고백했습니다. 이미 공소효과가 지난 사건이라 법적으로는 처벌이 불가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훔친 돈을 자발적으로 다 갚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가족이나 친구가 미워서 보기도 싫습니까? 미움의 죄를 인정하고 아파하고 버리십시오. 미움을 회개하지 않으면 미움이 원한이 되고 원한이 죽이고 싶은 살기(殺氣)로 점점 더 악화됩니다. 미움을 회개하면 목자-왕, 왕중왕 예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평안과 사랑으로 다스려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악한’ 죄를 회개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은 죄도 회개야 합니다.

물질과 돈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돈 앞에 꼼짝 하지 못하는 것은 죄입니다. 자식은 그 자체로서는 너무도 좋고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는 예배도 빼 먹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마음에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구멍(God-shaped hole)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마음의 구멍에 온갖 잡다한 것으로 다 채우려고 합니다. 마음의 구멍을 돈으로, 성공으로, 쾌락으로, 자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채우려고 하지만 만족이 없습니다. 마음의 빈 구멍은 오직 하나님으로 채워야 만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식 잘 되게 하는 좋은 부모로 자기 정체성을 세우면 자기는 없고 부모만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 되면 인생이 다 무너지고 맙니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가 자식이 잘못 되면 “내가 자식을 망쳤구나. 내 인생도 망했구나!”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자책감 때문에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면, 어떤 일이든지 견뎌낼 수 있고, 어떤 일이든지 모험할 수 있습니다.

두 여인이 있었습니다. 둘 다 결혼했습니다. 둘 다 남편이 아빠 구실을 제대로 못 했습니다. 둘 다 십대 아들이 말썽을 피웠습니다. 둘 다 남편에게 몹시 화가 났습니다. 두 여인에게 “앙심을 버리세요. 남편을 용서해 주세요.”라고 권면했는데, 둘 다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은 남편을 용서했지만, 다른 여인은 남편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이 잘못 되면 내 인생이 다 망하는 거야!” 그녀는 아들을 자신의 행복과 성공의 센터로 삼고 있어서, 아들을 잘못 되게 한 남편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식 때문에 왕중왕의 다스림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다 다오. 너의 시간 조금, 너의 돈 조금, 너의 일 조금을 내게 주고, 나머지는 네 멋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야. 나는 너의 일부를 원하는 게 아니야. 나는 너를 원해. 내게 네 인생을 다 다오.”

우리가 예수님에게 우리 인생을 다 맡기지 않고 사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 인생에 좋은 것, 자식, 성공, 지위, 돈 등 이런 모든 것도 하나님 자리에 앉혀 놓으면 그것이 죄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활 전체를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풀밭이라면, 풀을 벤다고 해서 풀밭이 밀을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버릇을 고치고 행동 이것저것을 고친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풀밭에서 밀을 생산하려고 하면, 먼저 밭을 갈아엎고 밀 씨를 뿌려야 합니다.

내 인생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기는 것이 지나친 것이라 싶습니까? 숨이 막히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예수님 외에 뭔가 다른 것을 위해서 삽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성공을 위해서 산다면, 성공하지 못할 경우 평생 실패자로 괴로워합니다. 성공해도 더 성공한 사람 앞에서 열등의식에 빠져 늘 괴로워합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위해 살면, 반드시 그 다른 것 때문에 평생 고문을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왕중왕으로 모시면, 설령 실패해도 예수님은 여러분을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마음에 안정을 찾습니다.

저는 청년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 인생을 다 넘기는 것이 너무 싫고 무서웠습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면 내 인생이 망할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늘 영적인 것만 강조하시고, 세상에서 좋은 돈, 지위, 성공, 명예, 이런 것은 다 빼앗아 가실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교회생활을 철저하게 할 테니, 평소에는 제 생활에 간섭하지 마십시오. 평소 생활은 제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세요. 예수님에게 제 인생을 넘기면 어쩐지 쇠고랑 차고 살 것 같아요. 저는 성공하고 싶어요. 돈도 벌고 싶어요.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 떵떵 거리며 살고 싶어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제가 그 때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못 살까봐 걱정했던 것이 정말 어리석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면 잘 살 줄로 생각한 것이 정말 착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왕중왕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 잘 살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의 첫 단추를 잘못 뀌면 인생 전체가 비뚤어집니다.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왕중왕으로 모시는 것은 인생의 첫 단추를 바로 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왕으로 모시는 것은 자동 우산 손잡이의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 우산이 쫙 펴집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기도의 통로도 확 뚫리고 축복의 통로도 확 뚫립니다.

예수님을 왕중왕으로 모시면, 우선 마음이 편합니다. 25년 동안 교회 중직의 부인으로 살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계속 실패, 좌절, 죄책감의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왕중왕으로 참으로 모신 후에는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자동차 안에서 CD로 “내 영혼 평안해”라는 찬송을 듣는데 너무 기뻐서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요즈음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물으면, “정말 신납니다. 지붕 위에 올라가서 ‘난 행복하다’고 소리치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좌절과 실망을 안겨주는 동일한 환경인데도, 예수님을 진짜 마음의 왕으로 모시고 나니 인생이 확실하게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중왕으로 모시면 못 사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잘 삽니다. 예수님을 왕중왕으로 모시면, 진정한 성공을 합니다. 예수님을 왕중왕으로 모시면, 마른 뼈다귀 같이 절망적인 내 인생이 강한 군대와 같이 의욕과 희망이 넘칩니다. 예수님의 생수가 흘러들어와 내 영혼도 살고, 내 가정도 살아납니다. 예수님 안에 참된 평안과 생명과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행복한 상태인지 아십니까? 왕의 전령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비우고 예수님으로 채울 때입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마음의 욕심과 죄를 비우고, 왕중왕 예수님으로 마음을 채울 때에 가장 행복합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가득 차면 예수님의 생명 에너지, 능력 에너지, 희망 에너지, 기쁨 에너지가 마음에 넘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에서 욕심과 죄를 비우시고, 왕중왕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심으로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 행복한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권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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