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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혜사 성령 (요 14:16-21,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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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성령 (요 14:16-21, 26-27)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근심하지 말라

요한복음 14장 1절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에 이르는 말씀, 곧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길게 강론하신 주된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떠나신다고 하니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합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메시야의 사역을 성취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니 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뛰어난 역량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행하셨고 그들은 단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것만 행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그들은 오합지졸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유대 지도층도 이 사실을 잘 아는 까닭에 예수님만 제거하려 하였지 제자들에게는 더 이상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현재 심정을 잘 드러내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18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제자들은 지금 고아와 같은 심정입니다. 가끔 언론을 통해 부모님들이 사고로 모두 돌아가시고 자녀들이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는 소식이 보도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남겨진 아이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그들은 더 이상 의지할 때가 없습니다. 자기 손으로 음식도 하고 빨래도 하고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지금 제자들의 실상이 그렇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위로하는 차원의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근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보혜사란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이 뜻은 곁에서 ’돕는 자’, ‘대언자’ 란 뜻입니다. 여기 ‘또 다른’ 보혜사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보혜사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돕는 자가 되어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들의 대언자가 되어 제자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그 역할을 성령님께서 대신 하십니다.

오히려 이 도우심은 더 완벽합니다. 예수님은 시공간에 얽혀 계실 수밖에 없지만 성령님은 언제 어디에든 계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실 수 있고, 또 우리 곁 정도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 우리 마음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6장 7절에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밖에 계신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내 안에 들어오시게 된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을 쓰고 있는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 ‘예수님의 사랑받은 제자’ 곧 ‘애제자’란 말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요한 자신도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할 때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이 근심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근심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성령이 임하시고 나니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는 사실로 인하여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자기 안에 성령님의 형태로 예수님이 들어와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때는 AD 90년대로 추정합니다. 요한도 이제 흰 수염을 날리는 노인이 되었고 곧 죽음이 가까워 옵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이번에는 사도 요한의 제자들이 근심이 가득합니다. 대 스승이신 사도 요한이 곧 떠나실 것 같은데 자기 공동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한은 자기가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냈던 그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보혜사에 대한 약속은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이며, 이제 사도 요한이 자신 제자들을 향하여 주는 위로의 말입니다. ‘나 떠나간다고 하여 근심하지 말라 너희에게는 보혜사 성령님이 계신다. 성령님께서 너희를 이끌어 가실 것이다.’

이 말씀은 2011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신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고아처럼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외롭습니까? 고아처럼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것 같습니까? 사람은 우리를 돕지 못할지라도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위험에서 우리를 막아주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셔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아이와 함께 동반 자살하는 어른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은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하여 아이들까지 죽음으로 몰아서야 되겠습니까? 어른들 생각에는 자기가 죽으면 남은 아이들이 아주 비참하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절망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인생이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을 어떻게 영화롭게 만드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월권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키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야 마음의 부담감을 내려놓고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12절부터 14절을 읽어보십시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주님은 반복해서 기도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다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근심할 시간에 다만 기도하십시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보혜사 성령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17절입니다.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바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님은 교회 공동체 가운데 계시고 동시에 개개인의 인격체 안에 계십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개인에게 임하는 성령님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우리 몸 밖에 계셨다면 이제 성령의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몸 안에 계십니다. 

밖에 있는 예수님과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밖에 있는 예수님은 불안합니다. 언제 사라질지 모릅니다. 밖에 있는 예수님을 좇는 사람은 비주체적입니다. 항상 지시사항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에 계신 예수님은 떠나지 않고 언제든 우리 곁에 있습니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주체적인 사람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행동합니다. 스스로라고 하였지만 실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살아계실 동안에는 제자들은 오합지졸이고 자리를 놓고 싸우는 철부지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떠나시자 모두가 위대한 기둥 같은 존재요, 순교자요, 성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큰 나무는 베어져야 작은 나무가 삽니다. 어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너무 크면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비주체적으로 만듭니다. 모두 지도자의 손가락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도자로 서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모든 것을 결정해주면 아이는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 결정하는 법을 배울 때 그 아이는 빠르게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갑니다.

우리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20절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벤다이어그램이라는 집합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님 아버지라는 큰 원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예수님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날입니다. 곧 성령님께서 보혜사로 내 안에 들어오시는 날입니다. 삼위일체의 놀라운 신비가 바로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우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고 합니다.

교회사에서 크리소스톰이란 분은 걷는 것도 조심조심했다고 합니다. 자기 몸이 성전인데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자아는 그 내부에 깃들어 있는 신성을 가리는 덮개이다. 우리가 자아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우리 안의 신성은 더욱 더 뚜렷이 나타난다.” 우리의 완고한 자아에 갇혀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지만 자아의 껍질을 깨면 깰수록 우리는 신성에 가까워집니다. 우리의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 주목할수록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더 뚜렷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을 품고 있고 또 하나님을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학의 교주 최시형의 일화입니다. 최시형은 36년 동안 장기수배를 받으며 동학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자신의 신도의 집에서 피신해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집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신도에게 묻습니다. 
“누가 베를 짜고 있는가?”
“예 제 며느리입니다.”
“아닐세, 바로 하나님이네”

동학의 유명한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곧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곧 사람이 하늘이라는 사상입니다. 베를 짜는 아낙네의 모습에서 베 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진리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몸은 그냥 몸이 아닙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한 인간이 위대한 것도 다른 사람을 위대하게 보아야 하는 이유도 다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감격을 알고나 있습니까?

진리의 영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이제는 그분께 우리는 물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예수님께 물었듯이 말입니다.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님은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화나 말씀 등을 바쁘게 돌아다녔던 제자들이 어떻게 일일이 다 기록했겠습니까? 나중에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생각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가끔 TV에서 최면술 장면을 보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의식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상처나 어렸을 때 장면을 최면술을 통하여 생생하게 다시 재현시킵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역사가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았던 것들은 마치 컴퓨터의 저장 장치에 담기듯 우리 뇌의 깊은 곳에 담겨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때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우리 의식 위로 끌어올립니다.

모든 것은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요한 사도는 자신이 기록한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성령님께 물으면 성령님께서 친히 가르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불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 묻기만 하면 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마치 하나님이 주신 생각인 것 마냥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말씀’과 ‘시간’과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을 주실 때 성경 말씀에 비추어 검증해 보십시오. 말씀에 위배된 것은 성령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이란 것은 성령님 당신이 기록한 책이기에 서로 위배됨이 없습니다. 또 시간을 두고 지켜보십시오. 시간은 좋은 스승입니다. 시간이 우리 어리석음과 성령님의 지혜를 구분해 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에 물어보십시오. 성령님은 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서로 묻고 기도하다보면 성령님의 생각에 접근해 갈 수 있습니다.

한국에는 이단이 많고 잘못된 성령 오용 사례가 많은 까닭은 이처럼 성령의 생각을 잘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을 성령님의 생각으로 착각을 합니다. 교회사에서 성령의 생각과 그 인도하심에 잘 따른 모범으로 성 프란치스코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하나님으로부터 “내 집을 세우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물질과 권력의 노예가 된 중세교회를 프란치스코는 이 감동을 따라 ‘가난과 고행’으로 새롭게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런 프란치스코의 운동에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동참하게 되었고 이를 시기한 사람들이 그에게 이단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와 그와 함께 하는 11명의 탁발 수도사는 1210년 교황 이노센트 3세를 알현하러 갑니다. 성 프란치스꼬 일행을 만나기 전 성령님께서는 꿈에 교황에게 다 쓰러져 가는 교회를 부축하여 다시 세우는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결국 교황의 인정을 받고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정식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생각이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성령님의 생각은 성령님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인내와 겸손이 필요합니다. 말씀과 시간과 공동체에 맡겨 드릴 때 성령의 생각은 분명해집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각을 주시는데 위기의 순간에 주십니다. 기발한 지혜를 주십니다. 주님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는 무리들의 곤혹스런 요구 앞에 서신 적이 있습니다. 돌로 치자니 주님의 사랑에 어긋나고 그렇지 않자니 모세의 율법에 어긋난다고 무리들의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는 지혜로운 말씀으로 위기를 극복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또 한 번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한 지에 대한 곤혹스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열심당들이 책을 잡을 것이요, 바치지 말라고 하면 반역죄로 로마당국에 고발당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12:17)는 말씀으로 위기를 넘기셨습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입니다.

성령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좋은 변호사가 되십니다. 보혜사란 뜻은 대언자, 곧 변호사란 의미도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대신해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변호해주십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10:18-20)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위기의 순간에 도우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실제 경험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좋은 변호사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대형로펌이나 전관예우에 해당하는 변호사를 찾기에 급급합니다. 승소율이 높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 우리의 좋은 변호사가 되셔서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평안의 영

주님의 주시는 평안은 심상한 위로가 아닙니다.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세상의 평화는 곧 사라지는 평화이고 불안한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서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그냥 자기 마음을 비운다고 하여 평화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 옆에서 내 손을 꼭 잡아주는 능력의 손을 경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안심합니다. 마치 어머니 품속에 고이 잠든 아기와 같은 평화입니다.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도 아기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어느 사생 대회의 주제가 ‘평화’였습니다. 모두가 평화에 대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초록색으로 덮인 초원을 거니는 사슴 무리들, 푸른 하늘에 구름이 둥실둥실 떠 있는 모습, 아이들이 잠자리를 잡는 가을 모습, 코스모스 만발한 시골길 등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안식을 느끼는 그런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대상을 탄 그림은 이런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파도가 거세게 일고 폭풍우가 치는 바닷가 절벽 틈에 새끼 새가 작은 둥지에서 엄마 새 품에 안겨서 잠에 든 그림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입니다. 세상은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령님의 품속에서 평화를 누립니다. 

찬송가에서는 이 평화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 평화는 우리가 만들어낸 평화가 아닙니다. 우리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평화입니다. 바로 성령의 샘에서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잠잠히 내 안에서 들려오는 이 평화의 노래를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평화는 밖에 있지 않습니다.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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