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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시려고 (전 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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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시려고 (전 3:11-14)  


소위 '흘러간 옛 노래' 중에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것이 도대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데 마냥 흘러가고만 있으니 참 한심하고 또 초조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로 길지도 않은 자신의 평생을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고 끝내버린다는 것은 너무나도 아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정말 인생이란 것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를 지금 당장이라도 깨닫고 한시라도 빨리 '미련 없는' 생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그런 노래를 부르고들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성령께서 이스라엘의 명군이요 현자였던 솔로몬을 통하여 명쾌한 대답을 들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솔로몬 왕은 그야말로 '안 해 본 것이 없는' 한 생애를 보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다 누려 보았으며, 또한 영적으로도 최고의 전성기와 동시에 잠시 동안 곁길로 빠지는 실족의 시절까지 다 체험해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솔로몬이 이제 인생의 말년에 들어서서 자신의 지나간 전 생애를 돌이켜 보며 크게 깨닫고 회개하는 가운데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전도서이니, 정말 인생에 대하여 제대로 배워 보고자 할 때 이처럼 완벽한 교본이 다시없을 것입니다.
온갖 희로애락과 흥망성쇠를 다 겪어 보았던 솔로몬이 이제 영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가운데 고백한 인생의 지혜가 바로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그 솔로몬이 받은 영감을 통하여 인생을 살아가는 세 가지의 단계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는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에 "13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라고 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이것은 또한 사람이 가지는 그 외의 모든 육신적 욕구를 대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욕구들이 다 충족되는 것이 바로 "낙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사람이 그런 충족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수고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일을 함으로써 그 결과 소득을 얻게 되고 그렇게 얻은 물질을 가지고 의식주를 해결하며 더 나아가서는 여가생활의 낙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그 어떤 사람도 '놀고먹을 수는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 그 대가로 곡식을 거두고 상품을 생산하고 돈을 버는 것, 그리고 그렇게 얻은 소득을 가지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먹고 예쁜 옷도 차려 입고 집도 사고 자녀도 키우고 하면서 자기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오늘날 모든 인간에게 주신 육신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독교인들이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칼빈 선생은 바로 이런 성경의 원리에 입각하여 '열심히 일한만큼 개인의 사유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원리' 즉 자본주의의 기초 사상을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번다는 자체가 절대로 저질적이거나 부정한 일이 아닙니다.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 자체도 결코 불신앙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의 대가로 낙을 누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이 원칙을 부정하고 거꾸로 가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허용하지 않으며 모든 경제활동의 생산부터 분배까지 완전히 국가가 통제합니다.
그래서 '모두 다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나누어 먹자.'는 것인데,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이론인지는 이미 전 세계의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북한의 비참한 현실을 통해서도 명백히 입증된 사실입니다.

제가 옛날에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공산주의를 풍자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첫째,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 둘째, 아무도 일하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이 월급을 받는다. 셋째, 모든 사람들이 월급을 받지만 그 돈으로 아무 것도 살 수는 없다. 넷째, 아무 것도 살 수 없지만 인민이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섯째, 인민이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무도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여섯째, 아무도 만족하지 않지만 투표만 하면 100퍼센트의 찬성표가 나온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공산주의의 허구성과 실상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그처럼 이미 한물가도 한참 간 공산주의 식의 선전구호가 활개를 치며 난무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경제대국 15위권을 이룩하게 된 것은 순전히 자본주의에 입각한 자유시장경제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정치가들은 여야 할 것 없이 다 '공짜로 나누어 주는 정책'만을 가지고 표를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며 국민들은 '무상 혜택'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국민의 기본권리'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최근에 국내의 어느 경제학 교수가 우려한 대로 그야말로 '사회주의 덫에 걸린 대한민국'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유럽의 선진국들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일컫는 완벽한 복지정책을 추구하다가 사회주의의 늪에 빠진 후에 거기서 다시 시장경제로 회복하기까지 3, 4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영국 역시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한때 '유럽의 환자'라고 불리기까지 했던 나라인데, '철의 여인'(The Iron Lady)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마가렛 대처' 수상이 단호한 구조개혁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고질적인 노조의 파업과 압력단체들의 데모에 찌든 '영국병'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가장 기본적인 인생 원칙은 어디까지나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수고'는 빼 놓고 '낙'만 찾으니 필연적으로 다 같이 거지가 되는 '가난의 평등'밖에 남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원로목사님께서 '일을 하지 않고 놀고 있는 청년'들을 엄히 꾸짖으시는 말씀은 정말 여러분이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꼭 남들 앞에 번듯한 직장만 찾으려 하지 말고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육체노동'의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 청년이나 대학생이 식당이나 주유소에서 일하는 것을 보면 속으로 칭찬과 격려를 보내면서 비록 얼마 되지는 않지만 꼭 팁을 줍니다.
바로 그처럼 젊을 때에 소위 '3D'(Dangerous, Difficult, Dirty) 직종이라고 불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땀을 흘릴 줄 아는 사람만이 나중에 진짜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성경의 교훈의 의미를 깨닫고, 오직 '열심히 수고함'으로써 '인생의 낙'을 '하나님의 선물'로 누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인생의 좀 더 나은 단계는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12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라고 했습니다.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은 분명히 인생의 기본 원칙이기는 하지만 만약 거기서 끝나 버린다면 그야말로 동물과 아무 차이가 없는 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짐승들도 부지런히 풀밭을 찾아 돌아다니거나 열심히 사냥을 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수고한' 결과 풀이나 먹이를 배불리 먹은 후에는 땅바닥에 드러누워 낮잠도 자고 저희들끼리 뒹굴며 놀기도 합니다.
즉 다른 모든 동물들도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람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동물의 수준에서 벗어나 정말 '만물의 영장'답게 좀 더 높아질 수 있는 그 다음 단계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두고 본문에서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비약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나 '낙을 누리는 것'은 그저 자기 육신의 욕구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욕구와는 상응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어떤 '좋은 일',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기 욕구를 스스로 제한할 줄 아는 억제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쓸 돈을 아껴야 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자원봉사하기 위해서는 그저 편안히 쉴 수 있는 시간을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처럼 사람의 욕구를 스스로 억누르고 선을 행하도록 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자기 육신에게는 아무런 득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며 선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사람 속에 양심이란 것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에게는 전혀 없는 본성입니다.
동물은 '선'이란 것을 알지 못하며 물론 그것을 '악'과 구별하지도 못합니다.
동물은 자기 육체의 욕구를 스스로 거스르기까지 하면서 다른 동물을 이롭게 해 주는 행동이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자기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희생적인 행동을 보여 주는 동물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이지 '양심에 따른 행동'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 선을 행할 줄 아는 것은 적어도 동물보다는 분명히 한 단계 더 나은 인생인 것입니다.

'쉰들러의 리스트'라는 영화에 보면 유태인 수용소의 소장인 어떤 독일군 장교 한 명이 나옵니다.
그는 수용소 바로 곁에 있는 자신의 관사 2층 발코니에서 소총을 들고 밑에 지나다니는 유태인들을 순전히 '심심풀이'로 아무나 쏘아 죽이는, 정말 악질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주인공 쉰들러는 그를 잘 달래야만 그의 손에서 유태인들을 구해낼 수 있기 때문에 온갖 뇌물을 갖다 바치면서 친하게 지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쉰들러가 그 수용소장에게 "당신도 유태인에게 관용이라는 것을 베풀어 보시오. '너를 용서한다.'(I forgive you.)라는 말을 단 한번이라도 해 보시오."라고 넌지시 충고를 합니다.
그래서 수용소장은 자신의 욕조를 깨끗이 닦지 못한 어느 유태인 소년에게 그 "너를 용서해 준다."라는 '마법의 말'(magic words), 자기로서는 내뱉기가 정말 어색하고 거북한 말을 억지로 한번 해 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소총을 들고 2층 발코니에 올라가서는 자기 막사로 돌아가고 있던 그 유태인 소년의 뒤통수에 총을 쏘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수용소장은 '선행'이라는 것을 한번 흉내는 내 보았지만 그 '선행에 따른 기쁨'이 어떤 것인지는 전혀 느낄 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남을 위해 섬기고 도와주는 희생적인 선행'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행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한 봉사와 구제'가 우리에게는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하고 '하고 나면 본인도 무척 행복해지는 일'이 된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처럼 기쁜 마음으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선행을 베푸는 '숨은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장로님들 중에서만 해도 가난한 성도의 중병 치료나 자녀의 대학교 등록금을 교역자를 통해서 무명으로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장립집사님들에게는 '최소한 일 년에 한번 이상은 자기 주변에 있는 어려운 성도에게 구제를 베풀어야 한다.'라고 누누이 가르쳤으니 제가 모르는 가운데서도 반드시 실천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꼭 돈으로 도와주는 것만 선행이겠습니까?
심방장, 구역장님들 중에 약한 성도들을 부지런히 찾아가서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것을 '기쁨으로' 행하고 있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든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과 물질과 힘을 '남'을 위해서 기꺼이 바치는 이 '선한 일'에 더욱 부요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인생의 최고 단계는 '영원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시면 "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보통 생각으로는 앞에 나온 두 번째 단계에만 도달하면 충분하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들이 입을 모아 가르치는 '최고 수준의 인생'이란 바로 여기에서 끝나고 맙니다.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먹고살고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회봉사 활동에도 기꺼이 참여하고 무슨 재난이라도 발생하면 기부금도 후히 낼 줄 알고, 혹은 아예 빈자와 병자를 위해 평생을 다 바치면서 살기까지 한다면, 정말 사람으로서 이 이상 더 고귀하게 살기는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실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본문 11절에서 사람은 그보다 더 멀리, 훨씬 더 높게 보기 시작합니다.
자기만을 보다가 남도 보게 되었는데, 이제는 온 우주 즉 존재 세계 전체를 보게 되면서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그 어떤 위대한 손길을 감지하게 됩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도, 내가 아무리 양심을 따라 최선을 다해도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이 "모든 것", 이 '방대한 우주와 만물'을 이처럼 오묘하게 운행하고 계시는 어떤 절대자를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게 됩니다.
우주라는 이 넓디넓은 공간을 경외심으로 바라보게 될 뿐 아니라, 태초부터 종말, 아니 영원 전에서 영원 후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세계를 상상해 보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셨다"라고 했습니다.
이 광대한 공간계와 이 영원한 시간계를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며 생각해 볼 줄 아는 마음을 바로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심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일단 사람의 마음이 이처럼 '영원'이라는 개념을 느끼게 될 때 그 다음에 따라오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는 사실입니다.
그 영원 전의 첫 출발이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그 영원의 세계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영원한 시공세계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사람이 '재어볼 수 없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이란 것이 지극히 유한한 존재임'을 절실히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 멋대로 '칠팔십의 인생'을 살아가도 그것을 영원이라는 시간 세계에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밤의 한 경점'에 불과함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자기 딴에는 '빅뱅'(Big Bang)이라는 '우주 발생의 가설'을 세워도 그 빅뱅 이전에 대해서는 사람이 죽었다 깨어나도 스스로는 도저히 '측량할 길이 없는 한계'에 도달하게 하셨습니다.
즉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진보해도, 아니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한다 해도 '영원의 세계 앞에서의 사람'이란 그야말로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이 도달하게 되는 궁극적인 결론이 무엇입니까?
솔로몬은 14절에서 바로 그것을 가리켜 "14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면서도 그 시종을 알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인 사람은 바로 그런 자신의 딜레마 때문에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 '사람은 이렇게 유한하여 영원의 세계를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그 영원의 세계에 자존하시며 당신의 뜻을 행하고 계시는 것이구나.'라고 겸손히 인정하게 됩니다.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 '사람은 이 방대한 우주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가감할 수 없지만,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그 유일한 주인이 되시는 것이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즉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살고 남에게 착한 일도 하는 인생에게 이처럼 영원의 세계를 사모하게 하시고 그러면서도 그 시종은 도무지 측량할 수 없도록 만드신 이유는 바로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라고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한다.' - 이것이 바로 솔로몬의 전 인생의 최종 결론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스스로 종교인이라 하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참 이상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소위 '종교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선하게 살게 하는 데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인데, 오늘날 불교, 이슬람교, 천주교는 물론이요 자유주의 신학의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바로 여기에서 이구동성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종교를 가짐으로써 선하게 산다는 사람'이나 '아예 무교(無敎)이면서도 선하게 산다는 사람'이나 결국에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사람의 선(善)을 앞세우는 종교는 실상 무신론(無神論)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라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인간이 신(神)과 관계를 가지는 것'인데도 이처럼 사실상 신을 배제하고 오직 인간의 선에서 끝나고 마는 '인본주의 종교'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참된 기독교, 특히 우리 개혁주의 신앙의 기독교는 철두철미하게 오로지 '하나님 중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성호 앞에서는 자동적으로 풀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벌벌 떨 뿐인 것입니다.
그 절대주권자 하나님만이 모든 존재의 원인자이시요 내 인생의 소유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주신 까닭에 내가 '수고하여 낙을 누리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으며, 그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시는 까닭에 나는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단계에 도달할 때 사람은 비로소 인생의 참된 본연을 깨닫게 됩니다.
자존자, 절대주권자, 창조주, 심판주가 되심으로써 '영원히 있을 것을 행하고 계시는' 이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것 - 이것만이 인생에 대한 명쾌한 정답인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적 행복을 위해 도와주는 신이나 사람의 양심이 만들어 낸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스스로 영원 전부터 살아 계셔서 모든 존재 세계를 영원히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두려워하며 섬김'으로써 진정 최고 수준의 인생을 향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사람답지 못한 사람'으로 평생을 헛되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상 대다수의 사람들이 첫째 수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먹고살기에만 바쁜' 그야말로 동물과 별 다를 것이 없는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다가 속절없이 인생이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처럼 '육신의 욕구 충족'만을 위해 바쁘게 사는 사람은 그 인생의 반경이 평생이 가도 '나'라는 한계의 밖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두 번째 수준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그보다는 조금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오십보백보'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선행'을 두고 사람들이 고마워하고 칭찬해 줄 때에 바로 거기에서 자기는 '양심'을 통하여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자만에 빠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양심을 따라 선'을 행하는 사람의 인생 반경은 이웃과 인류까지 생각하는 것이니 상당히 넓어진 셈이지만, 그 역시 이 인간사회와 지구 표면에 제한된 지극히 수평적인 안목인 것입니다.

진정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을 활짝 열고서 이 우주 전체를 더 깊게 바라보고 저 영원의 세계까지 더 멀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사람이 운행하기는커녕 측량조차 할 수 없는 저 영원의 세계를 당신의 뜻대로 주장하시는 절대주권자를 알게 되는, 실로 '사람이 이를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경지'에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하고 운영하고 계시는 전능의 하나님, 전 인류의 시종을 계획하고 섭리하고 계시는 전지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는 진실한 신앙인이 됨으로써, 우리에게 수고의 열매로 주시는 인생의 낙도 누리며 우리의 양심을 통해 명하시는 대로 선을 행하는 가운데 이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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