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마 6:1-4)

첨부 1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마 6:1-4)

19세기 미국의 전설적인 갑부였던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의 일화입니다. 카네기는 본래 스코틀랜드 사람이었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스코틀랜드에서 너무나 가난하여 고향 ‘던펌라인’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카네기는 주당 1달러 20센트를 벌던 피츠버그 직공 생활부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가난에 지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보고 카네기가 그 어머니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엄마, 울지마.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멋진 사두 마차 사줄게”, 그러자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면서 말합니다. “여기서 부자가 된 들 뭐하겠니? 고향 사람들이 알지도 못할텐데”..., 카네기는 그때부터 언젠가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사람들 앞에 멋지게 보여주려고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카네기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1881년 7월 27일, 드디어 카네기는 어머니와 함께 고향 땅으로 금의환향을 했습니다. 영국 남부 해안도시 ‘브라이튼’에서부터 특별 제작된 최고급 마차를 타고 스코틀랜드로 북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코틀랜드, 영국, 미국 국기를 흔들며 카네기의 마차를 환영하는 가운데 카네기와 그의 어머니는 고향의 초라한 옛날 오두막집을 지나 읍내에 도착했습니다. 

카네기는 고향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는데,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우느라 쉽게 내리지 못했습니다. 카네기는 고향 도시에 멋진 도서관을 지어서 헌증을 했습니다. 카네기 어머니와 카네기의 평생 소원, 고향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집안이 성공했음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고향 사람들, 자기 친척들, 자기의 지인들에게 자신의 성공을 알리고 싶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자신의 삶의 성공을 보여 주고 싶은 분은 단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마5~7장) 중, 6장의 첫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마태복음 5장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의 내면적이고 도덕적인 삶의 기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몇 가지로 구분하여,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강조하시며 말씀해 주셨습니다. 

구약의 율법들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헛된 맹세를 하지 말라’, ‘보복하지 말라’,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지만 우리 주님은 그것들을 뛰어 넘어, 마음으로도 범죄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6장에서는 이러한 도덕적인 삶이 이루어진 사람에게 요구하는 신앙적인 의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인 태도와 표준은 어떤 것인가?’, ‘과연 예수 잘 믿는 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반부에서는 ‘구제(2~4절)’와 ‘기도(5~15절)’와 ‘금식(16~18절)’에 대해 말씀하시며, ‘참된 경건생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구제’는 ‘이웃을 향하여 창을 여는 생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창을 여는 생활’입니다. - ‘금식’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창을 여는 생활’입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은 첫 단락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3개의 단어로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1. ‘사람에게 보이려고’ - 외식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여기에서 ‘보이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떼아떼나이(θεαθηναι)’ 인데, 이 말 뜻은 그 행동의 목적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임을 뜻하는 말로, 이 말에서 영어의 ‘theater'(극장,연극)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결국 이 말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연극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외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집밖의 식당에서 식사하는 ’外食‘이 아니라, 겉으로만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外飾‘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보느냐, 보지 않느냐에 따라서 행동이 변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직장에서도 상사가 옆에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차이가 납니다. 학생들이 시험을 볼 때도 시험감독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차이가 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많이 알고 있는 지역과 모르는 지역에서의 행동이 차이가 납니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대도시에서는 시골보다 더 많은 범죄가 일어납니다. 

(2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참된 신앙은 인간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 앞에 나타내 보이거나, 칭찬을 받으려고 행한 모든 행위는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의식해서 헌금을 한다든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교회에 나온다든지,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찬양을 한다든지,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설교를 한다든지 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 말씀은 참으로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아마 성경에서 산상설교만큼 우리의 속 사람을 자극하는 본문들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끊임없이 우리의 잘못을 보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 첫 말씀은 우리의 공로의식, 우리의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인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그 재미가 없다면 우리는 무슨 재미로 성취감을 느끼며 높은 자리, 좋은 자리에 오르려고 애쓰겠습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다 무엇입니까? 나를 인정해 달라고 무언의 자기 광고입니다. 봉사도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부분이 충족되지 않으면 금방 힘이 빠져 버립니다. 그래서 나팔을 분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저 역시도 스스로 대견하고 장한 일을 한다고 생각될 때는 일부러 보이려고 하는 적이 있습니다. 아니면 일부러 슬쩍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나팔을 분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본래 나팔이라고 하는 것은 알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트럼펫이나 트럼본 같은 나팔은 원래 기상 나팔, 식사 나팔, 비상 나팔, 등의 용도로 사용된 것들입니다. 물론 금관 앙상블의 그 넘치는 힘과 화려함은 황홀함을 안겨 줍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선행을 알리려고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미 영광을 다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면서 다 보상받았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칭찬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얄팍한 것입니까?  우리는 왜 그렇게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일까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데... 참된 신앙은 인간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2. ‘구제할 때에’ - 구제의 참된 태도

(3절)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선행을 기대하십니다. 선행은 구원의 원인은 아니지만 구원의 결과로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구제’란 불우한 이웃, 불행에 처한 이웃을 돕는 행위를 말합니다. 구제는 다른 말로 자선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구제 혹은 자선의 특징은 거저 준다는 것입니다. 무료로 준다는 것입니다. 공짜로 준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유료 행위를 통해 살아갑니다. 자신이 지은 농사와 자신이 만든 물건을 돈을 받고 팔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합니다. 자신이 회사에서 일한 노동력의 대가를 월급으로 지불받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구제 혹은 자선은 그냥 주는 것입니다. 또한 돈을 받지 않고 자신의 노동력을 그냥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무료 봉사입니다. 여러분, 성도들에게 있어 이러한 구제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구제는 마땅히 해야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성도들의 구제 생활은 이웃을 향하여 창문을 여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구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잘못된 구제가 있고 바른 구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잘못된 구제는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기 위한 동기에서 하는 자선을 말합니다. 그럼 바른 구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에는 기독교라고 하면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제는 교회도 사회적으로 좋은 일, 의로운 일을 하면 좀 알리고 생색을 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개인의 이름 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면’ 하는 면에서 말입니다. 

이번 주에 비가 많이 와서 난리가 났습니다. 8~9년 전부터 나온 말로, ‘게릴라성 집중 호우’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물폭탄’이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서울 강남의 우면산 자락에 산사태로 자동차와 사람이 쓸려가는 장면을 보면서 몸서리가 처지더라고요. 

금주 중에 다른 곳에도 비 피해가 심해질 것 같다는 예상이 듭니다. 

이렇게 큰 난리가 나면 여러 곳에서 재해를 당한 사람들을 위한 기부금을 모금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때마다 가장 많이 걷히는 곳은 TV와 4대 일간지입니다. 그것은 방송에 얼굴이 나오고, 신문에 자기 이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방송에 얼굴이 비쳐지지 않고, 신문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렇게 많은 액수가 걷히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이렇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칭찬을 받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인정하면 진실하고 의롭고 선을 베풀지만 사람들의 박수가 그치면 선을 행하는 일도 그칩니다.

이러한 순수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한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 더 이상 의로움이 아닌 것입니다. 


3.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하나님의 보상 

(4절)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가 외식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의 칭찬과 인기를 의식하지 않고 은밀하게 보시고 갚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리라는 믿음은 참 믿음입니다. 사람의 칭찬을 받고, 사람의 인기를 얻기 위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은 2절의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식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요, 경건인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우리의 삶을 주관하심을 믿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심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스펄전 목사님과 사모님이 집에서 닭을 기르셨다고 합니다. 그 닭들에게서 계란이 꽤 많이 나왔는데, 목사님과 사모님은 이 계란을 그냥 나누어주는 일은 없고 꼭 돈을 받고 팔았대요. 심지어는 가까운 친척들에게도 “계란을 원한다면 돈주고 사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부부는 욕심쟁이라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부부는 아무런 변명도 없이 그런 비판을 그대로 들었다고 합니다. 훗날, 목사님과 사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목사님 내외는 계란 판 돈 전액으로 어려움 가운데 있었던 연로한 두 과부를 도왔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욕심쟁이라는 비난을 해도 묵묵히 침묵하면서 의로운 일을 해나갔던 것입니다. 

모든 선행이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본의 아니게 선행이 알려져 칭찬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상만을 바란다는 것은 곧 하나님만을 의식하면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선행을 베풀 때,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에게 무슨 칭찬받을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나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런 신앙의 자세를 가진 사람을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종교개혁자 중의 존 칼빈은 자신의 삶의 모토로 ‘코람데오’를 외쳤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인데, ‘코람(앞에서) + 데오(하나님)’, 즉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임. ‘하나님 앞에서 살라’는 것은 모든 행동을 숨어서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앞에 보이지 말라고 하는 말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는 말은 결코 모순 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은 우리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나의 명예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를 구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려도 내가 드리는 예배의 유일한 관객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하나님 한 분을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가정 생활, 직장 생활, 사회 생활 모두에 있어서 내가 잘 보여야 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하나님만을 우리의 유일한 관객으로 알고 살아가셔서 그 하나님이 보상해 주시는 축복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