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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중심의 변화 (말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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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중심의 변화 (말 3:1-6)


작가 공지영이 쓴 ‘도가니’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광주의 한 장애인학교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작가가 현장을 취재하고 자료를 수집한 뒤 집필한 사회 고발적인 책입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잘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글입니다. 

작품의 배경은 ‘무진시’라는 도시입니다. 이야기는 무진시의 외곽에 농아들만을 위해 세워진 자애학원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강인호라는 사람이 기간제 교사로 부임하면서 자애학원 안에서 오랫동안 은밀하게 진행되었던 범죄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강인호는 한 청각장애아가 기차에 치여 죽는 사고가 나도 그것을 쉬쉬하는 교장과 교사들, 무진경찰서 형사들 사이에서 이상한 것을 느낍니다. 부임 첫날 우연히 듣게 된 여자 화장실의 비명 소리로 인해 점차 거대한 폭력과 추한 성폭행이 학원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애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쌍둥이 형제인 교장 이강석과 행정실장 이강복, 그리고 그들에게 빌붙어 사는 몇몇 교사들이 어린 장애학생들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장면들은 읽기에도 매우 얼굴이 화끈 거리고 추잡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화에 바탕을 하고 있다는 것이 충격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자애학원에서 일어나는 그 추한 범행에 가담한 사람들과 그들을 옹호하고 지원한 사람들이 교회 중직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련한 농아 소녀들을 악랄한 방법으로 성폭행을 한 이강석과 이강복은 무진시에 있는 영광중앙교회 장로입니다. 그들의 비행을 알고도 묵인하고 두둔한 무진시 장학관 최수희도 그 교회 장로 부인입니다. 두 장로의 비리가 드러난 가운데서 교묘한 말로 교인들을 선동하며 장로들의 눈치를 보며 처세술에 능한 목사는 아버지를 이어 영광중앙교회를 세습한 목사입니다. 

이강석 장로와 이강복 장로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삶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일 아침이 되면 옷을 말끔히 차려 입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거액의 헌금을 드립니다. 대표 기도도 거룩하게 합니다. 새벽기도회도 나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추하고 악한 행동을 부끄러움 없이 행합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예배란 무엇이고, 기도란 무엇인가?’ ‘헌금의 의미는 무엇이고, 교회 중직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강석과 이강복 장로 형제는 누구 앞에서 예배를 드린 것일까? 예배 시간에 무엇을 생각할까? 그들은 새벽 기도를 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구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음과 삶, 예배와 삶, 기도와 삶, 교회와 삶이 이처럼 구분 되어져도 된다면 공산주의를 만든 막스가 말한 것처럼 종교는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말라기서는 이강석과 이강복 형제와 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엄중하게 경고하시는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타락을 예배의 타락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을 예배의 회복에서부터 찾으셨습니다. 

제가 말라기 1장 6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들은 아비를 어렵게 알고 종은 주인을 어렵게 아는 법인데 
나를 아비로 어렵게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나를 주인으로 어렵게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나 만군의 야훼가 너희 사제들에게 말하였다. 
'너희 사제라는 것들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있다.' 
그랬더니, 너희는 뻔뻔스럽게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너희는 제단 위에 더러운 빵을 바치면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제단을 더럽히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야훼의 제사상쯤이야 아무러면 어떠냐고 하는구나. 
눈이 먼 짐승을 제단에 바치면서도 잘못이 없다는 말이냐?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바치면서도 잘못이 없다는 말이냐? 
그런 것을 너희 고관에게 바쳐보아라.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그러고도 융숭한 대접을 받을 것 같으냐? 

그 따위를 바치면서 긍휼을 빈다고 너희를 곱게 보아주겠느냐? 
너희는 내 제단에 공연히 불을 피운다. 
그러지 못하도록 아예 문을 닫아걸었으면 좋겠구나. 
너희가 하는 짓이 나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나의 이름은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쳐,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향기롭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깨끗한 곡식 예물을 바치고 있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내 이름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주께 차려 올리는 제사 상, 더러우면 어떠냐? 아무 음식이나 차려드렸으면 됐지.' 하면서,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 
'에이 귀찮아.'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바치고는 나를 우습게보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남의 짐승을 훔쳐다가 바치고,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바친다. 
그러는데 그 제물을 달갑게 받을 것 같으냐? 나의 말이 그르냐? 
천벌 받을 것들아, 서원 제물로 바칠 만한 것이 양떼 가운데 있는데도 
주께 바친다면서 쓸모없는 짐승을 골라 제물로 바치는 것들아. 
나는 위대한 왕이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뭇 민족이 나의 이름을 두려워하리라. 
   
예배는 영어로 ‘worship’입니다. 이 말은 ‘가치’라는 단어인 ‘worth’ 와 ‘배’ 또는 ‘나르다, 수송하다’라는 뜻의 ‘ship’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이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전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배라는 단어에는 예를 갖추어 절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분이신 하나님을 향해 예배드리는 모습은 정성스런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 즉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전혀 예배하는 자의 거룩함과 신실함이 없습니다. 도리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망령되게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예배를 정성껏 드리기 위해 예배 시간에 늦지 않도록 부지런하게 준비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은 순간적으로 마음에 내키는 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준비한 예물을 드립니다. 복장도 대충 입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단정한 모습으로 예배에 임합니다. 예배시간 시작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순서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정성을 다합니다.   

저의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예배드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저의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저의 어머니는 주일이 되면 없는 옷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깨끗한 옷을 입으셨습니다. 저의 속옷을 하나 사더라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갈 때 입으라고 꼭 주일에 입게 하셨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답답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온갖 어려운 일을 하시며 사셨는데 장사를 마치고 집에 오시면 그날에 벌은 돈 가운데 가장 깨끗한 돈을 챙기셔서 헌금을 준비하셨습니다. 깨끗한 돈이 없을 때는 다리미로 다려서 헌금을 준비하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글을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배 시간 거의 한 시간 전에 나가서 주보에 나오는 글씨를 보시고 그림을 맞추다 시피 하여 성경 본문과 찬송가를 미리 찾아 놓으십니다. 한글을 모르기에 찬송가 가사를 모르면서도 어떻게 해서라도 불러 보시려고 입술을 여셨습니다. 나중에는 찬송을 하도 많이 불러 기억하게 되면 한 곡조로 모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찬송을 부를 때마다 아멘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성경을 읽으실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이라도 더 들어야 말씀을 기억한다고 하시며 1부 예배에서부터 5부 예배까지 다 드리십니다. 올해가 94세지만 지금도 예배드리는 모습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를 뵈러 가서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앞자리에서 예배를 드리십니다. 그런데 한 번은 어머니 마음에 ‘늙은이가 앞에 앉아 있으면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 힘이 빠지시겠다. 젊은 사람들이 앞자리에 앉아 말씀을 들어야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이 힘이 나시겠다’ 는 생각이 들어 다음 예배 때에 뒷자리로 가셨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기 전에 뒤에 앉아 계신 저의 어머니를 보고 ‘엄부흥 권사님, 왜 뒤로 가셨습니까? 앞으로 오십시오’ 라고 하시더랍니다. 

저의 어머니는 목사님을 참으로 어려워하십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목사님이 앞으로 오시라고 다시 말씀하셔도 어머니가 수줍어하시며 앞으로 나가지 않으시니 목사님이 강대상에서 내려 오셔서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오시더니 어머니를 일으키시고 어머니의 성경 찬송가를 들고 어머니가 앉으시던 앞자리로 인도해 여기에 앉으시라고 하시며 앉히시더랍니다. 그리고 강대상에 올라가셔서 하시는 말이 ‘엄 권사님, 권사님이 앞자리에 앉으셔서 1부부터 5부 예배까지 한 번도 졸지 않고 바른 자세로 설교를 들으시는 모습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인 저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아십니까? 

성가대도 졸고, 장로님들도 졸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눈을 감고 조는 성도들이 많은데 권사님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말씀을 들으며 아멘으로 받는 모습이 목사에게 큰 힘이 됩니다. 권사님은 그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며 설교하는 저에게 힘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시더랍니다. 저는 지금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리석고 부족하지만 이만큼 목회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교회를 극진히 사랑하고,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사자를 먼저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 메시야의 앞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사역을 하실 수 있도록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2-3절입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즉 회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 광야에서 외친 설교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다’입니다. 회개입니다. 달리 말하면 흐트러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의 회복입니다. 

예배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가장 기초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모습이 흐트러진 사람치고 영성이 맑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배를 소홀하게 여기는 사람 중에 믿음이 신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의 회복은 교회당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당 밖의 모든 삶에도 이뤄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생활 속에서 드리는 거룩한 산제사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드리는 예배가 거룩한 모습으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 우리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정신으로 다스려지는 산제사의 장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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