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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려놓고 편안히 (욥 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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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고 편안히 (욥 27:1-6)

한 작가가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거기 엄마를 따라온 한 꼬마가 있었습니다. 꼬마는 두리번거리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아이를 흘겨보던 엄마가 갑자기 아이를 확 잡아채더니 쥐어박으면서 야단을 쳤습니다. <그만 웃어. 여긴 교회야!>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자 <차라리 그게 더 낫다.>라고 하고는 다시 예배에 집중했습니다. 

작가는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작가가 보기에 아이는 야단을 맞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발로 차거나, 찬송가를 찢거나 엄마 가방을 뒤지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그냥 웃었을 뿐입니다. 작가는 생각했습니다. <왜 혼나야 하는가? 왜 그 엄마는 기뻐하시는 하나님, 웃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가? 이 아이가 교회에서도 웃을 수 없다면 도대체 어디서 웃으란 말인가?>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인의 모습은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까요? 얼굴은 굳었고, 무언가 심각하고, 자신도 행복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행복할까봐 염려하면서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게 가로막는 이상한 사람들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서 도덕적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혹시 잘못한 게 없나>하고 생각하면서 늘 불안을 느끼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너 그렇게 하면 죄인이 된다>고 지적하고 트집 잡고 꾸중하길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다 보니 <교회는 너무 심각해.....너무 분위기가 어두워...> 이렇게 느껴질 때가 많은 것은 아닐까요? 한 영국 소녀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 나쁜 사람들은 착해지게 해 주시고, 착한 사람들은 친절하게 해 주세요.> 기독교인들은 착한 것 같기는 한데, 친절하지도 않고 환하게 웃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런 모습은 기독교답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기쁨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행복해야 하고, 웃어야 합니다.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쁨으로 살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지난 주간에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께서 별세하셨습니다. 한국 교회는 또 한 분의 훌륭한 영적 리더를 잃었습니다. 비통하고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하 목사님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울기보다는 웃었습니다. 설교를 맡으신 이동원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 목사님은 천국에서도 일을 시작하셨을 겁니다. 예수님 앞에서도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쏟아내시겠죠. 그럼 예수님께서 ‘여기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좀 쉬어.’ 그러시지 않았을까요?”> 이 대목에서 교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엄숙한 장례식장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말을 하는 것은 경박스러운 일일까요? 아닙니다. 슬픔 중에서도 웃고, 비통함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의 능력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이 그렇게 말하여 사람들을 웃게 할 수 있는 근본적 이유는 하 목사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가셨음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활란 박사는 자신의 장례식에서 울지 말고 헨델의 할렐루야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셨고, 제자들은 그렇게 해 드렸습니다. 성도는 죽음 앞에서도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웃음과 행복, 이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 하십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미소 짓게 하는 한 토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러 가던 하나님의 사자들이 아브라함에게 대접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때 사라는 89세요, 아브라함은 99세였습니다. 사라가 장막문 뒤에서 이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그 다음에 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 때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합니다.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여러분, 나중에 어떻게 되었나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크게 웃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 해 늙은 부부가 아들을 얻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이란 이름의 뜻은 <웃음>입니다. 하나님은 웃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실적으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본문의 욥도 그렇습니다. 욥은 지금 바싹 경직되어 있습니다. 마치 온 얼굴이 붉어진 채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온 몸이 경직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해 조금의 여유도 없습니다. 절대 남을 용납 못합니다. 그 때 욥의 곁에는 욥이 고난을 당해서 재산과 자녀를 잃고, 건강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하러 온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욥은 소리를 높입니다. 

5절을 보세요.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나쁜 녀석들이다.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난 너희들을 인정할 수 없어....> 

상대방을 나쁘다고 하면서 동시에 욥 자신은 의롭게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리라> 또 5절 후반부터 보면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죄를 짓지 않겠으며, 책망 받을 일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보다 자신이 더 의롭다는 것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욥은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방어하려고 했을까요? 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이토록 애를 쓰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마음이 닫혔고, 세상이 모두 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그처럼 심각한 고난을 당한 것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면 이렇게 처참한 고난을 당할 리가 없다, 욥이 사람들 앞에서는 의롭게 보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숨겨진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서 화가 났습니다. 처음엔 친구들이 와 준 것이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말을 들을수록 상처가 깊어졌습니다. <결국 내가 죄가 많아 망했다는 말이 아닌가. 함께 슬퍼해주지는 못할망정, 날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몰아붙이니, 이런 사람들을 친구라고 할 수 있나?> 그러다 보니 그의 마음에 방어 본능이 생겼습니다. <난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형편없게 살지 않았어. 결코 이렇게 망할 정도로 죄를 지은 적은 없어. 난 그래도 의롭게 살려고 노력해왔어. 난 너희보다 의로워. 난 결코 너희가 나보다 의롭다고 인정할 수 없어. 잘 봐둬. 난 앞으로도 결코 죄를 짓지 않을 테니까. 난 내 의를 포기할 수 없어. ....> 

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의롭게 살아서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말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전의를 불태우면서,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세상을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욥의 모습에서 무슨 기쁨이나 평안이 느껴지십니까? 조금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고, 마음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욥의 이런 모습은 신약 시대에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했던 율법주의자를 연상시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쓸수록 양심의 가책이 더 커졌습니다. 율법 중에서 한 가지만 어겨도 <아, 난 오늘도 죄를 지었구나...>라고 하면서 괴로워했습니다. 더구나 이런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도 날카롭게 대했습니다. <넌 왜 율법을 지키지 않느냐? 우리를 봐라.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니? 너희는 왜 우리처럼 하지 않느냐?>, 

그들은 자신도 괴롭고 남도 괴롭게 했습니다. 이런 태도에는 기쁨도, 행복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단히 경건해 보이고, 근엄하고, 늘 최선을 다하고, 늘 엄격하겠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과 함께 살면 숨이 막혀 죽을 겁니다. 총각 때는 그렇게 깨끗하고 멋지더니 양말짝은 아무데나 벗어던지고, 발도 안 씻고 자는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혼한 것을 후회하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오히려 감사하셔야 합니다. 매일 방 구석구석, 부엌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먼지 하나라도 나오면 <집구석이 왜 이래? 왜 마루구석에 먼지가 있는 거야? 청소는 안 하고 뭐해?>라고 소리 지르는 남편과 함께 살면 말라 죽습니다. 남편이 편하게 양말짝을 벗어던질 수 있는 가정, 그게 은혜와 행복의 가정입니다. 남편이 양말을 벗어던지거든 <오 사랑하는 당신, 당신이 양말짝을 벗어던지니, 나도 청소 안 해도 되고, 이게 은총입니다 ....우린 천생연분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안아 주십시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한 신사가 비행기를 탔습니다. 옆 자리에 앉은 여인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때 여인이 읽던 책은 <<아직도 가야 할 길, The Road Less Traveled>>이란 책이었습니다. 신사가 물었습니다. <무슨 책을 읽고 있습니까?> <친구가 준 건데, 이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대요.> <그래요? 어떤 책입니까?> <글쎄요, 무슨 인생 지침서 같은데, 저도 아직 다 읽지 못했어요.> 그러더니 여자는 책장을 두르르 넘기면서 말했습니다. <각장의 제목이 이렇네요. 훈련, 사랑, 은혜......> 이 때 남자가 말을 끊으며 물었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저도 몰라요. 아직 은혜까지 나가지 못했거든요.>  여인은 아직 은혜에 대한 부분은 읽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은혜까지 나가지 못했다!>, 많은 교인들이 아직 은혜까지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 본문의 욥 같은 사람이 생깁니다. <아니, 저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 교회에 다닐 수가 있나? 저 사람은 빨리 치워 버려야 할 쓰레기야...> 이렇게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으면 숨이 막혀 그 교회에 다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본질에서 벗어납니다. 이 때 교회는 죄인이 가서 용서를 받고 함께 어울려 기뻐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모두 정리하고 해결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자신의 거룩함을 뽐내는 곳이 되고 맙니다. 교회에서는 잘못한 사람들을 너그럽게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고, 사람들은 교회를 꺼리게 됩니다. 교회가 죄를 고백하는 곳이 아니라, 발각될까 두려워 죄를 숨기는 곳이 될 것입니다.누가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회개할 때 <저 사람이 저렇게 추한 사람이었어? 그 동안 어떻게 얼굴 들고 다녔나?>라고 비방한다면 어떻게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제 이런 억압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넌 왜 그 모양이냐? 난 절대 죄를 짓지 않겠어. 그래서 내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 온 세상이 다 알게 하겠어.....> 이런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욥의 생각처럼 완벽하게 의롭게 살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더 사랑해 주시고, 약하기 때문에 더 불쌍히 여기시는 것, 이게 은혜입니다. 

알고 보면 은혜는 기독교 신앙의 맨 끝에서 만나는 게 아닙니다. 은혜는 기독교 신앙의 입구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아직도 은혜를 모른다면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먼저 은혜를 경험하고, 먼저 사랑을 받습니다. 그게 순서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집에 돌아온 탕자를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그를 용서하고 환영하고 잔치를 베풀어 맞이했습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용서받고 환영받는 게 먼저입니다. 먼저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 결과 먼저 행복했습니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아버지를 기쁘게 할까, 어떻게 하면 다시는 아버지를 괴롭게 하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인가?> 이런 고민은 그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를 기쁘게 한 후에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이 놈아. 무슨 얼굴로 돌아왔느냐? 그래 우선 품꾼으로 일해라. 두고 보겠다. 네 녀석이 정말 새사람이 되었는지 확인하고 그 후에 용서하든지 말든지 결정하겠다...> 이러면서 받아 준 게 아닙니다. 아들은 그 날 당장 용서받고 사랑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임시 아들이 없습니다. 그 날 당장 완전한 아들이 됩니다. 

<밥값 좀 하라>는 말처럼 살벌한 말은 없습니다. 식당에 가면 값을 내고 밥을 먹습니다. 값을 못 내면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예전 농촌에서는 일이라도 거들어야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밥값을 하라>고 눈총을 주는 밥상은 은혜의 밥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의 밥상이 있습니다. 조무래기 아이는 엄마가 차려준 밥상에서 그냥 편하게 먹으면 됩니다. <나 치사해서 엄마 신세 안 져. 이제부터는 내 힘으로 밥을 지어 먹겠어.>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엄마의 밥상에서 밥을 먹으면서 미안해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엄마의 밥상에는 밥값이 없습니다. 그 밥상은 은혜의 밥상이고, 그래서 엄마가 좋은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은 일등이 되라고 몰아붙입니다. 그래서 일등 못하는 학생들 얼굴이 다 죽었습니다. 부모는 <너처럼 하려면 다 집어 치워!>라고 합니다. 그 순간 가정은 더 이상 은혜와 사랑이 머무는 곳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까지 죄의 용서를 선언하기보다 죄를 지적하고 비방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 때문에 떨고 있다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은혜로 사시기 바랍니다. 욥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말하지 마십시오. <난 절대 내 의를 포기 못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래, 난 하나님 앞에서나 너희들 앞에서 죄인이야.  너희 말이 맞아. 그래서 난 하나님께 나가려고 해. 하나님께서는 치시다가도 싸매시는 분이니까. 난 내 힘으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을 포기했어.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해. 나나 너희나 다 죄인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면서 숟가락을 들고 하나님께서 차리신 은혜의 밥상에 앉으시길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착한 사람보다 진실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지난 주간에 저를 잘 보셨지요. 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어요. 그러니 이제 복을 주세요...>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기 착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히려 <저 잘해 보려고 했는데, 그만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용서해 주실 거죠. 고마워요. 하나님, 사랑합니다.> 이러면서 하나님의 품에 뛰어드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은혜는 산수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들판에 두고 가는 목자의 이야기에서 계산은 무너집니다. <들판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를 잃으면 어떻게 하느냐, 한 마리는 포기해라> 이런 계산은 사랑 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은혜는 산수가 아닙니다. 은혜는 계산을 뛰어넘어 그냥 베풀고, 그냥 받는 것입니다. 

뒤늦게 오후 다섯 시에 포도원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아침 일찍 와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예수님의 비유도 계산을 초월한 것입니다. 다섯 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님, 겨우 한 시간 일했는데 너무 과분합니다. 절반만 주시지요..> 이런 말은 필요 없습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그만입니다. 사양하는 것은 은혜를 주시는 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성적이 떨어졌다고 해서 성적이 오를 때까지 밥을 반 그릇씩만 먹으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성적에 관계없이 배부르게 먹게 합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용서받고, 구원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면서 말씀합니다.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으라. 네 힘으로 의롭게 되겠다는 망상은 버려라. 왜 할 수도 없는 일을 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느냐? 그냥 와서 내 은혜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 은혜를 받을 때 우리에게 자유가 있습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웃으면서 삽니다. 자신에게도 너그럽고, 남에게도 너그럽습니다. 잘못하거나 잘못한 사람을 보면 <그래, 부족해서 그렇지 뭐. 하나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이 은혜를 얻으시길 축복합니다. 

이제 다 내려놓으십시오. 자신의 힘으로 서려는 고행을 포기하십시오. 내려놓으면 편안해집니다. 주님 품에 기대면 안식을 맛보게 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은혜와 사랑과 평안을 누리면서 활짝 웃는 성도로 사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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