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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을 주시며 (창 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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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주시며 (창 9:1-29) 
 
 
오늘은 하나님께서 권념하셨던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언약을 세우시는 것과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복을 거의 그대로 반복합니다(창 1:28-29). 홍수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던 최초의 복은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처음부터 하나님께 복 받은 존재임을 가르쳐줍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복을 얻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주어진 복을 차버리지 않는 순종입니다. 복 받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한 복을 누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언급된 복의 내용인 “생육”과 “번성”과 “충만”(“편만”)은 7절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그리고 두 구절 사이의 내용은 주신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은혜로운 조치들입니다. 첫 번째 조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었음이라”(2). 이제 세상은 채식하던 홍수 이전과는 달리 육식이 허용됩니다(1:30).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인간의 생육과 번성과 충만은 동물들에 의해 크게 지장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동물들로 사람을 두려워하도록 하심으로 이를 방지하셨습니다.

두 번째 조치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입니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3-4).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피를 먹는 사람은 택하신 백성 중에서 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레 17:10-11). 모든 음식을 공급하시면서도 한 가지 제한을 두신 것이 아담의 때와 같습니다(2:16-17). 세상은 바뀌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무제한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이 계속해서 고수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시고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동시에 순종을 요구하는 분이십니다.

세 번째 조치는 살인의 엄격한 금지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5-6). 하나님께서 동물을 “피 채 먹지 말 것”을 명하신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동물들에게 두려움을 주신 것과 음식 공급이 모두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시려는 목적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살인은 이 목적에 철저히 반대됩니다. 

한글 성경에는 2번만 나타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5절에서 ‘내가 찾는다’는 단어가 3번 반복됩니다. 면밀히 조사한다는 의미인데 모두 ‘사람의 생명’에 대해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타락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철저히 망가져버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다는 사실 자체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파괴된 그 형상을 다시 회복하시려 하십니다. 그러므로 살인은 다시금 하나님의 형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님의 뜻을 거스르는 동물과 사람을 결코 묵인하지 않으십니다.

창조 때와 같이 하나님의 뜻은 변함없이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의 번성을 원하신다는 사실이 암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대단히 귀히 여기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생명은 아끼지 않고 흘리시며 끊어버리시겠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로 세상이 충만해지기를 원하심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다른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언약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 완성임을 알 수 있지요.

8-17절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후손들과 땅의 모든 생물과 언약을 세우신 내용입니다.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11). 하나님께서는 이를 “내 언약”(9, 11(히브리어성경), 15), “영원한 언약”(16)이라 하셨고, 언약을 ‘세우시는’ 주체가 당신님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죄로 가득해 질 때마다 홍수로 다시 멸하시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이 죄로 가득할 때마다 죄인을 모두 멸하신다면 의인도 견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이 죄로 관영할지라도 이제 마지막 심판까지는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보증하는 표시로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두셨습니다. 이는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 주신 “언약의 증거”(12, 13, 17)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할례를 “언약의 표징”(17:11)으로 주셨습니다. 이러한 표징들은 약속하신 말씀을 믿도록 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주어졌습니다. 기록된 말씀이 없는 때라, 그들에게는 성경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무서운 홍수로 온 세상이 멸망되는 일을 겪었던 노아 가족에게 ‘비’는 남다른 두려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이 밀려올 때에 표징을 보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굳게 붙들기를 원하셨습니다.

고대로부터 우상숭배와 미신에 잘 빠지는 사람은 자연 재해에 대한 두려움이 많습니다. 재해를 만난 경험이 쌓일수록 두려움도 더할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자연 재해에 대한 두려움은 현대인들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있습니다. 범죄와 사고들이 많을수록 안전에 대한 염려도 깊기 때문이지요. 똑똑한 사람도, 권력을 가진 사람도, 재물이 많은 사람도 예기치 못한 재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점을 보거나 부적을 지닙니다. 이런 두려움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어야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붙들지 않는다면, 예배당에 다니면서도 미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15), “내가 보고 …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니”(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억”이라는 단어는 8장 1절의 “권념”과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 속의 노아를 잊지 않으셨듯이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9-10).

하나님께서 복 주신 대로 노아의 아들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지게 되었습니다(18-19). 동시에 죄도 다시 인간에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유일한 의인이었던 노아마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21) 수치를 드러냅니다. 온 세상이 죄로 물들었을 때 구별되었던 인물이 홀로 있을 때 취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는 경건했던 인물이, 박해할 사람이 없는 리더의 자리에 섰을 때 추하게 쓰러졌습니다. 어려울 때의 초심을 평안할 때 잃어버렸습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는 말씀을 노아에게서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이지만 삶의 차이는 있습니다. 함은 아비의 하체를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22). 여기서 “보고”라는 단어는 자세히 주목해 보았다는 뜻입니다. 셈과 야벳이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는 묘사와는 정반대의 태도입니다(23). 이 사건으로 인해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25) 될 것으로 예언됩니다. 셈에 대해서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26)하리라 할 만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게 될 것입니다. 야벳은 하나님께서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27) 하실 것입니다.

본문은 술이 깬 노아가 아들들의 태도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죄는 함이 범했는데 왜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지, 셈과 야벳은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왜 각각 다르게 축복을 받았는지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언약의 자녀라고 해서, 혹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해서 동일한 삶이 되지는 않을 것이며 동일한 복을 누리지는 않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저주 받는 자가 있는 반면 복을 받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을 받을 자와 저주를 받을 자는 생활 속의 지극히 작은 일 하나에서도 차이를 보일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 백성다운 태도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일들도 있지만 분명하게 구별되는 일들이 훨씬 많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하셨습니다. 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고 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지극히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 백성다워야 할 것입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그대는 누구인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그대는 누구인가?’ ‘지극히 작은 것에서 그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나는 그 때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복 주시는 분이십니다. 계속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언약을 세우시고 필요한 조치도 취하십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죄가 언제나 불순종을 통해 주어진 복을 차버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분께서 언약에 신실한 것처럼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하는 자이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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