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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과 요나단 (삼상 18:1-4, 23: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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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요나단 (삼상 18:1-4, 23:15-18)


집중 폭우로 인해 많은 분들이 어려움을 당했는데 지난 한 주는 또 폭염으로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이제 주님이 함께하시는 자리에서 모든 무거운 짐, 수고로움을 다 내려놓으시고 성령이 주시는 은혜로 회복과 기쁨이 넘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좀 재미있는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데 가장 빠른 방법은 무엇일까요? 비행기, 고속철 ...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지난번 고속철이 개통됐을 때 TV 뉴스를 보니까, 기자들이 두 팀으로 나눠서 비행기 이용하는 것과 고속철 이용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빠른지 시합을 하더군요. 공항을 오가는 시간을 따져도 역시 비행기가 조금 빨랐습니다. 그런데 정답은 그게 아닙니다. 정답은 ‘좋은 친구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난센스 퀴즈 같지만 이 가운데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은 결코 지루하지도, 피곤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흔히 우리 인생을 길로 혹은 여행으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 인생길이 어떻습니까? 외롭고 위험하기도 하며 때로는 고달픕니다. 그리고 막막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동행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좋은 친구와 동행하면 마음이 든든하고 인생 여정이 늘 즐겁고 복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죠 “친구와 동행하면 기쁨은 두 배로 늘어나고 슬픔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인생을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시고 아담을 위해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창2:18 이하) 그래서 인간이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과 사회 가운데 살아도 그 가운데 인생길에 동행할 참 친구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요즘 우리는 주일마다 다윗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의 여정은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수없는 적들과 끊임없는 싸움, 또 자신만이 안고 있는 상처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의 길을 이길 수 있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좋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좋은 친구를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 가운데는 사울의 핍박을 피해 망명 생활할 때 그를 따르던 4백 명의 추종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로 ‘환란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자’들이었습니다. 이들 400명의 사람들이 사울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다윗 왕조를 창출해낸 주동세력이 되었습니다. 다윗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지 정권 창출의 세력 만으로서가 아니라 메시야가 오실 다윗 왕조의 나라를 건강한 정치와 경제, 사회가 되도록 이끌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많은 엘리트들이 압살롬에게 합류할 때에도 끝까지 다윗 왕조를 지키고 다시 회복시키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한번은 다윗이 베들레헴을 점령한 블레셋 군대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고향 베들레헴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누구보고 떠오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고향이 그리워서 혼자 중얼거린 것뿐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세 병사가 이 말을 듣고는 블레셋 군사들과 충돌하면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의 물을 떠가지고 왔습니다. 생명을 걸고 떠 온 물이었습니다. 상처를 입는 것을 개의치 않고, 죽을 각오를 하고 떠온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도저히 그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병사들의 피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병사들의 생명이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동행의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친구들을 다 합쳐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정말 좋은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다윗의 위대한 생애는 없었을 겁니다. 누굽니까? 요나단입니다. 정말 부러운 친구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었을까? 하고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특히 이들의 우정은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해관계로 맺어진 게 아니라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맺어진 특별한 우정입니다.

삼상18:1 보면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연락되었다고 말합니다. 1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여기 ‘연락된다’는 말은 히브리어 ‘카솨르’의 수동형입니다. 그 단어는 본래 ‘묶다’ ‘매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마치 밧줄로 꽁꽁 묶인 것처럼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다 이기적인 존재인데 자기 자신처럼 사랑했다는 겁니다. 

이 말은 3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삼상18:3절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여기 ‘언약을 맺었다’고 했는데, 이 ‘언약’이란 단어가 중요합니다. 히브리어로 ‘베리트’인데 ‘자르다’의 뜻을 가진 동사 ‘바라’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 당시 배경을 알아야 이해가 됩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계약(언약)을 맺을 때 짐승을 두 조각으로 자릅니다. 그러면 피 흘리고 죽겠죠. 그 두 조각을 사이를 내어 떼어 놓습니다. 

그리고는 계약 당사자 둘이 그 사이로 지나갑니다. 그러면 계약이 체결되는 겁니다. 그런 행위는 계약을 파기할 경우 죽게 된다는 계약의 엄격성을 상징하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단과 다윗은 변치 않는 맹약을 한 것입니다. 정말 그들은 평생토록 그 언약을 파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황태자와 목동이 평생의 친구로 언약을 맺는, 정말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삼상18:4절을 보면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요나단이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입혀줍니다. 겉옷은 신분을 나타내는 옷입니다. 그러니까 황태자의 복장입니다. 그것을 선뜻 벗어서 입혀주었다는 것은 자기가 승계할 받을 왕위를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군복과 칼, 활과 띠도 넘겨줍니다. 이것은 생명을 다윗에게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요나단은 그 후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고 핍박하자 감싸주고 보호합니다. 그리고 갈수록 그 핍박이 심해지고 노골적으로 죽이려 들자 하는 수 없이 다윗에게 망명을 권합니다. 두 사람이 작별하는 장면이 삼상20:41-4절에 나오는데 아주 감동적입니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피차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 오니라” 슬프지만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이죠. 

이같은 우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 우러나온, 마음과 진실이 통하는 참 사랑이었습니다. 그 이후 다윗의 망명 생활이 10여년 지속되는데, 그 기간 중에는 단 한번 두 사람이 만난 기회가 있었습니다. 삼상23:15-18절에 그 기록이 나옵니다. 그 후에는 다윗은 계속 망명 생활을 하고, 요나단은 전쟁터에서 전사함으로 영영 만날 수 없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다가 십 황부지에 은거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 정보를 들은 요나단이 은밀히 찾아갑니다. 다윗도 위태롭지만 요나단 역시 목숨을 걸고 간 겁니다. 그 때 요나단이 다윗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결코 다윗은 죽지 않고 왕이 될 것임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어쩌면 이때 다윗이 오랜 도피 생활로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가능성이 많죠. 그도 인간인데 ... 그런데 때마침 요나단이 와서 격려해준 겁니다. 삼상 23:17절에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정말 대단한 일이죠? 다윗의 신앙도 훌륭하지만 요나단의 신앙과 우정이 정말 놀랍습니다. 이런 친구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다윗도 요나단의 아름다운 우정을 평생 마음 속게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 사랑에 보답했습니다. 

물론 요나단이 요절하는 바람에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말입니다.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들은 다윗은 그를 추모하며 눈물로 노래합니다. 삼하1:26절에 보시면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되고 좀 안정되자 요나단의 자손이 혹시 남아 있나 조사합니다. 므비보셋이란 아들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다리를 쩔뚝거리는 장애인으로 초야에서 쓸쓸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데려다 왕궁에서 자기 아들처럼 돌봅니다. 삼하9:11절에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다윗에게 요나단 같은 좋은 친구가 없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왕이고 뭐고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고 애매하게 고통을 당한 나머지 복수심에 불타 사울 왕에게 반기를 들고 무력 대항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요나단의 신앙적 격려와 지지가 있었기에 다윗은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끝까지 인내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 좋은 친구와 동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생에 큰 자산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필요한 게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일평생 동행할 좋은 친구가 꼭 있어야 합니다. 정말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이런 친구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임직자들을 세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분들을 세우기 전에 임직자 후보들의 친구들을 불러서 함께 식사를 나누고 싶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친구들은 다 알지 않습니까? 그리고 정말 진실한 친구가 없다면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다양한 사람들을 섬기는 데 어떻게 자신을 희생할 수가 있고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고 함 석헌 선생께서 이 친구와 관련하여 이런 시를 한 편 남겼습니다. 그 시를 소개합니다. 시의 제목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입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운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 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는/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죽음마저 함께 나눌 이런 친구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자기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구명대도 포기한 체 “제발 너 만은 살아다오”라고 말해주는 그런 친구를 가졌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저주하고, 공격하고, “너는 형편없는 놈이야” “너 같은 놈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라고 비난해도, “아니야”라고 감싸주는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내가 세상적인 유혹에 넘어갈 때, 내가 돈 몇 푼을 더 벌기 위해 내 신앙양심을 팔려고 할 때, 옆에서 “아니야, 그 길은 바른 길이 아니야”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요나단과의 우정도 중요시 여겼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환란과 풍파를 많이 만났지만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삼상 23:16절을 보세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이들의 이 아름다운 동행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선 복된 사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길에 늘 동행해 주시고 우리를 완전하게 보호하시고 축복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부기 위해 이 땅에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인 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죄 없으신 그 분이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자는...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태 11:19).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친구라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부끄럽게 생각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죄인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친구로 오신 예수님은 제가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비난하거나 야단치지 않고 항상 제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제가 그에게 항상 실망을 주어도 제게 한 번도 실망의 기색을 보인 적이 없는 그런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제가 실패하고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내려 갈 때에도 결코 저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럴 때 일수록 제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너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너는 반드시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는 그런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제가 행한 실수로 인하여 제가 사람들에게 무시와 손가락질을 당해야 할 것을 제 대신 받은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제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하여 제가 받아야 할 형벌을 저를 대신하여 받은 친구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저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저를 위하여 마침내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은 친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친구는 저를 살리려 자신의 목숨까지 버렸습니다. 제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거나 의로운 사람이 결코 아닌데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가운데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고민과 문제들로 인하여 잠 못 이루는 분들이 있습니까? 함께 살고 있는 내 남편도, 내 아내도, 우리의 아이들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내 이 아픔과 쓰라림을 알 수 없다고 탄식하고 있는 분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참 좋으신 친구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아니 그 분은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의 그 상처를 그의 피 묻은 오른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계십니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 어머니 기도회에 오셔서 큰 은혜를 끼친 위기상담 전문가이신 정태기 교수님께서 쓰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책에 보면, 정 교수님께서 한 때 심각한 신앙의 위기를 당할 때에 소록도에 갔던 경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정 목사님은 기도가 목구멍으로 넘어오지 않고,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소록도에 무작정 들어갔습니다. 

그가 소록도에 도착하던 날은 마침 수요일이었고, 예배당에 가보니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통성기도가 시작되었는데, 목사님은 아무리 애를 써도 기도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기도가 목사님의 귀를 파고 들었습니다. 그 기도소리는 머리를 치고 가슴속을 후벼 파는 소리였습니다. “하나님, 제게 주신 은혜가 어찌 이리 큽니까? 주님, 어찌하면 제가 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까?” 

기도소리는 계속되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이 큰 은혜에 제가 어찌하면 만 분의 일이라고 갚을 수 있겠습니까?” 정 목사님은 그 기도소리를 듣다가 도대체 무슨 은혜를 그렇게도 많이 받았기에 저런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싶어,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60이 넘은 듯한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늙은 노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한센병이 얼마나 심했던지 얼굴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머리, 떨어져 나가 움푹 패인 코, 짓무르다 못해 위아래가 붙어버린 눈... 눈으로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손목뿐인 손바닥으로 박수를 쳐가면서 목이 터져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정목사님은 자신의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곧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피처럼 붉은 통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두 시간이나 정목사님은 그렇게 통곡을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뒤에 그 노인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정 목사님은 그 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뭐가 그렇게 고마우세요? 무슨 은혜가 그렇게 크신 것입니까?” 그 때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문둥병에 걸리자 세상도, 피붙이들도 다 나를 버렸어. 물론 친구들도 다 떠나버렸지. 그런데 말이야, 이 소록도까지 나를 따라온 분이 계셨어. 그리고 내게 소망과 기쁨을 주셨지” “아, 할머니가 따라 오셨군요?” “아니야, 할머니는....예수님이 따라 오신거야!” (침묵)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온 세상이 날 버려도 참 좋은 친구되시는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비참한 곳으로 떨어진다해도, 주님께서는 거기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친구를 가지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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