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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것이 옳으냐? (막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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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 옳으냐? (막 3:1-12)


시작하는 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가버나움 선교 사역을 보고 비위가 상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대하여 비위가 상해 꼬투리를 잡은 것은 

➀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1:29)고 하시면서 죄 사함을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죄의 특권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심으로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 

➁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으셔서 식사를 하셨습니다(막2:15-16). 의인은 죄인을 멀리해야 하는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➂ 안식일에 밀밭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 안식일에 어떻게 밀 이삭을 자르는 일(수확)을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막2:23-24). 

➃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어떻게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 주님은 율법의 핵심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안식일 지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안식일을 적극적으로, 공격적으로 지켜야 할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즉 안식일을 지키는 목적이 돌에 안 맞아 죽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목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다음은 예수님과 한 율법사와의 대화내용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6-40)고 율법의 핵심을 짚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복음사역에 꼬투리를 잡으려고 지켜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3:4)라는 질문 하나를 던지셨습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 Which is lawful ?” … 이 질문은 “어느 것이 적법하냐?, 어느 것이 법적이냐?, 어느 것이 율법적이냐? 어느 것이 바람직하냐?”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것이 옳으냐?”라는 주님의 질문을 되새김질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 주일을 지키는 일, 선을 행하는 일,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라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상식적이냐?, 어는 것이 더 법적이냐?,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하냐? 어느 것이 성경적이냐?, 어느 것이 복음적이냐?”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어느 것이 더 상식적이냐?

상식(常識)이란 말은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거나 또 한 가지고 있어야할 표준지력(標準知力)”을 말합니다. 즉 “전문지식이 아닌 일반 지식과 더불어 이해력. 판단력. 사려. 분별 등을 포함하는 보통지식”을 말합니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은 이상적인 세상입니다. 어쩌면 지상의 유토피아(Utopia)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상식이 통하는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그러나 아직 지상의 교회는 천상의 승리교회가 아닙니다. 상식이 통하는 교인들이 대부분이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는 교인도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는 어딜 가보아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몸담은 교회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생활을 하며 봉사활동을 한다면 이상적인 교회가 머지않아 실현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 신앙생활은 난해한 철학이나 신학 이전에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상식적인 삶의 자세요, 마음”입니다. 농부는 농사짓는 일에, 선생은 가르치는 일에, 의사는 병 고치는 일에, 그리고 성직자는 신자들을 돌보는 일에, 교인들은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할 때 가장 “상식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어느 가정주부가 기도회 모임이나 교회봉사에 열심인 나머지 가정생활을 등한시 한다면 이는 결코 상식적인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세상에 너무 깊이 빠져 신앙생활을 취미삼아 하는둥 마는둥 한다면 이것도 신앙상식에 벗어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내가 속한 삶의 터전, 내가 사는 시대의 고민, 내가 처한 역사의 과제, 내가 발을 딛고 사는 현실,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문제를 내 몫에 태인 “십자가”로 알고 고민하고 짊어지려고 노력하는 자는 “상식”에 가까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에는 상식적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몰상식한 사람을 나쁜 사람 혹은 악인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상식적인 사람을 좋은 교인이라고 합니다. 몰상식한 교인을 골치 아픈 문제교인이라고 합니다. 


2. 어느 것이 더 적법하냐?

공동체는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법이 있습니다. 가족사회, 씨족사회, 부족사회, 민족사회, 국가사회에 필요한 법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자면 공동체의 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동시에 공동체는 법이 통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국회의원들은 법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법을 만들어 국민들이 함께 법의 보호를 받고,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모여 이전투구(泥田鬪狗, 진탕에서 싸우는 개)나 일삼는다면 어찌 국회라 할 수 있으며, 어찌 선량한 국회의원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투견 장에 모여 싸우는 개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지난 브라질 총선에선 “광대”가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티리리카”라는 무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프란시스코 올리베이라”(45)가 130만 표 이상을 획득, 차점자 후보 득표의 2배 이상 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문맹(be illiterate)입니다. 글도 읽지 못한다는 이유로 출마 자체가 무산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의 유세 슬로건은 “더 이상 나빠질 수는 없다(can't get any worse)”였습니다. “국회의원이 뭘 하느냐고요? 사실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를 찍어주시면 국회에 가서 도대체 뭘 하는지 보고 전해드리겠습니다.” …

백성들이 정부와 정치가들에게 등을 돌리는 이유야 뻔하지 않습니까? 법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어 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특권층의 자기들은 모두 법망을 뚫고 지나갑니다. 억울한 서민들만 등골 빠집니다. 그래서 서민들, 백성들이 정치가들에게 등을 돌리지 않습니까? 

선진국을 왜 선진국이라 합니까? 돈이 많다고 하여 선진국이라 하지 않습니다. 법이 통하는 나라와 사회이기 때문에 선진국이라 합니다. 법의 잣대는 어느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하나님의 법인 “율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는 “총회의 헌법, 노회의 규칙, 지교회의 규약”이 있습니다. 그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은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적법한 신앙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율법을 주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12:11-12)고 말씀하셨습니다. 


3.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이냐?

세상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법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격적인 감화와 감동이 무용지물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이냐?”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어느 것이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으로 되는 것인가를 기도하고 묵상하고 의견을 모아야 합니다.

스가랴선지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고 대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고 말한바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이냐? 어느 것이 더 복음적이냐? 어느 것이 더 성령의 역사냐? 어느 것이 더 하나님의 은혜냐?”를 확실히 알지 못하면 오해하기에 딱 좋은 게 교회생활이요, 신앙생활입니다. 어느 것이 인간의 소견이며, 어느 것이 성경적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어느 것이 사탄의 역사며, 어느 것이 성령의 역사인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어느 것이 인간의 감정이며, 어느 것이 하나님의 은해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끝맺는 말

“어느 것이 옳으냐?”라는 질문을 받은 바리새인들은 어느 것이 옳은가를 살펴보고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막3:6)를 의논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
상식이 통하는 사람, 법이 통하는 백성, 율법의 정신이 통하는 교인, 성경이 통하는 성도, 하나님의 은혜가 통하는 은혜 자, 성령의 역사가 통하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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