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가 족하다는 것 (고후 12:1-10)

첨부 1


은혜가 족하다는 것 (고후 12:1-10)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쓴 고요함의 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여,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담대함을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고요함을 주시고, 그 둘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이것이 그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의 고요함의 기도입니다. 

저는 처음 이 기도를 들었을 때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일단 니버라는 사람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니버는 뛰어난 신학자였을 수는 있지만 믿음마저도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기도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배부른 사람의 기도처럼 들렸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기도문을 인용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고요함의 기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이 기도문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담대함,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고요함, 그리고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신앙이란 것은 반드시 자기의 환경을 바꾸는 것만이 신앙이 아니고 때로는 환경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신앙입니다. 환경을 바꾸는 것만이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고집이요 억지요 횡포입니다. 

저는 2002년 월드컵 때부터 약간 우려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무엇이냐면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한 마음으로 응원하고 어떤 것을 간절히 염원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이 편만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건 거의 종교적인 신념화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응원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직접 물어봤습니다. ‘당신들이 이렇게 열심히 응원하면 그것이 경기 성과에 영향을 준다고 믿느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더라구요. 응원하는 사람들의 기가 선수들에게 전달돼서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쯤 되면 이건 스포츠 대회가 아닌 유사종교행위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신이 신앙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도는 원래 하나님이 들으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들으시고 안 들으시고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주께서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단서를 달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내가 원한다고 대답하시고 그를 깨끗케 해 주셨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기도의 능력을 강조하는 경향이 더 많아졌습니다. 소위 기도발, 어머니의 기도, 기도의 능력, 이걸 무엇에 비교할 수 있느냐면 떼 법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떼 법이라고 들어보셨지요. 우리나라에는 법으로 안 되는 것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떼를 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도 떼가 통하고 국가에도 떼가 통합니다. 그러니 왜 하나님에게도 떼가 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차원보다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오래 떼를 씀으로써 하나님도 들어주실 수밖에 없다는 그러한 발상입니다. 

이런 식의 신앙이 언제부턴가 보편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언뜻 보면 믿음처럼 보이는데 이건 인간의 집념, 인간의 노력, 인간의 정성을 강조하는, 지성이면 감천을 연상시키는, 결국 공로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닌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 이런 식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저희 성도 중에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만 일반인들 중에는 ‘목사님, 좀 쎄게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쎄게 기도하는 것인지…. 그럼 평소의 기도는 쎄지 않다는 얘기인지…. 

인터넷에 올라오는 댓글은 옛날의 신문고와 같은 역할을 해서 우리가 평소에 접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 어느 기독교계 뉴스에 대한 댓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댓글을 쓴 사람은 청년인 듯 합니다. 그의 아버님이 수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이 청년이 다니는 교회의 어떤 집사님이 똑같은 암을 앓았는데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청년의 아버님은 돌아가셨는데 다른 교인은 똑같은 암인데도 살아났어요. 

이 청년이 교회 목사님과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그 살아나신 집사님은 기도의 힘으로 살아났다.’ 그때 이 청년이 마음이 상했어요. ‘목사님, 그럼 우리 아버님을 위해서 나도 기도하고 가족도 기도했는데 우리의 기도에 힘이 없었다는 얘기입니까? 왜 살아나신 분은 기도의 힘으로 살아나고 우리 아버님은 돌아가셨다는 얘기입니까?’ 

그 목사님이 할 말을 몰라서 잠자코 있다가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집사가 필요해서 살려주셨다.’ 이 대답을 듣고 이 청년이 시험에 들어서 다시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내용의 댓글이에요. 

이건 아주 민감한 문제입니다. 만일 제가 그 청년의 입장에 있었더라도 시험에 들었을 것입니다. 똑같은 암을 앓았는데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었습니다. 이걸 어떤 식으로 설명하면 성도가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비 신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면 시험에라도 들지 않습니다. 

비 신앙적인 방법, 살다보면 그럴 수 있다, 치료를 얼마나 적절히 받았느냐에 좌우될 수 있다 라든가 똑같은 치료라도 그걸 잘 받아들이는 체질이 있고 잘 못 받아들이는 체질이 있다, 이렇게 설명한다면 시험이라도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섣부른 해석을 해서 아무개는 기도의 힘으로 나았다느니 아무개는 하나님이 살려주셨다느니 라고 100 확실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면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이것이 옳은 해석입니까? 이게 소위 over spiritualize 하는 겁니다. 과다하게 영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오늘의 주제입니다. 은혜. 은혜라는 말은 하도 귀에 익어서 이제는 별로 자극을 주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이름만 보면 부모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이름이 있지요. 성이 이 씨인데 이름이 사야에요. 이사야. 

은혜라는 이름은 수도 없이 많고 예은, 하은,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들을 때 우선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은혜를 더 받아야 된다, 나는 은혜가 부족하다, 내가 기도를 좀 더 하면 은혜를 주시겠지,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은혜를 더 주셔야 된다, 또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더 주셔야 된다, 하나님 내게 은혜를 더 주옵소서….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내가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더 은혜를 받아야 되고 더 기도하면 은혜를 받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생각하면 부족한 것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부족한 면을 지적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도의 의무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끔 제가 과거에 섬기던 교회가 초청한 말레이시아 목사님들을 생각합니다. 그 교회가 말레이시아 목사님 열 분을 초청했습니다. 이분들이 한국교회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셨는데 교회가 그분들을 위해서 정성껏 여러 프로그램을 준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 분들을 모시고 민속촌에도 가고 롯데월드에도 가고 그러면서 한국을 구경시켜 드리는데 한 목사님이 롯데월드에서 라이드를 타시면서 뭐라고 하시느냐면 내 고향 교회 성도들은 내가 한국에 와서 기도를 열심히 하겠거니 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라이드를 열심히 타고 있다고 하면서 서로 웃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렇다고 라이드를 거부하지는 않으시더라구요. 

사도바울도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게 육신의 가시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더 기도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 육신의 가시를 제해주실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응답하시기를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어요. 

‘내 은혜를 더 받아라’가 아니고 ‘내 은혜가 너에게 부족해서 그렇다’가 아니고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그 말은 ‘내 은혜가 부족해서 네 육신에 가시가 있는 게 아니다.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한 가운데에서도 육신에 가시를 가질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신앙과 삶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바울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면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성경에 기록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육신의 가시가 없어져야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게 아니고 육신의 가시가 여전히 남아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족할 수 있다는 사실, 니버의 기도문 그대로입니다. 

환경이 바뀌어야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더라도 환경이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환경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전에는 육신의 가시를 제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제는 그 육체의 가시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가시에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일 이 육체의 가시가 없었다면 사도바울은 너무 교만해져서 타락했을 것입니다. 루시퍼처럼 됐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축복이었어요. 오히려 은혜였어요. 그것을 사도바울이 깨달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 가시를 제해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그건 사도바울처럼 계시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건 사도바울처럼 능력을 많이 받은 사람, 뭔가 자랑할 게 있는 사람, 뭔가 가진 게 있는 사람, 뭔가 가시가 없이는 교만해질만한 사람, 그런 사람에게 해당되는 게 아닙니까.’ 사돈이 남 말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바울의 경우에는 받은 계시가 지극히 컸기 때문에 교만할 수 있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은 교만할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상황이 아니에요. 여기에 기록된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것처럼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다른 것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게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가 다른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 이 환경이 바뀌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실수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하고 하나님이 정성이 부족하고 하나님이 지혜가 부족하고 하나님이 실수해서 나를 지금의 이 환경에서 건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얼마든지 환경을 바꾸실 수도 있어요. 그건 우리가 분간해야 되는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지금 이 여건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리라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불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많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불신하는 것이요, 또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세 가지 면이 있지요. 첫째는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은혜이고 둘째는 환경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도 은혜에요. 그리고 셋째는 그것을 분간하게 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이건 거저 되는 건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낮잠 자다가 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 육신의 가시를 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로 열심히 매달린 결과로써 하나님이 그에게 응답하신 것입니다. 낮잠 자다가 이것을 깨달은 게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서 기도한 결과로써 하나님이 그에게 응답하셨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응답하셨느냐면 no라고 응답하셨어요. no도 응답은 응답이에요. yes만 응답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바울에게 no라고 응답하셨어요. ‘그 육신의 가시는 네가 갖고 살아라. 그러나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너의 연약함을 통하여 온전케 된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육신의 가시를 가지고 일평생 살았어요. 그리고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했다고 했습니다. 

‘나의 핍박과 나의 연약함을 자랑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케 된다. no도 응답은 응답이에요. 하나님이 항상 yes라고 대답하시는 게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기도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기도한 결과로 자신의 환경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정말로 기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냥 떼를 쓰는 사람이 기도의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떼를 쓰는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앵무새처럼 늘 똑같은 말을 하나님께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늘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언제주실 겁니까, 왜 안주십니까,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얼마나 피곤합니까. 하나님도 피곤하고 본인도 피곤하고 영혼의 성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데 방해가 됩니다. 

어느 젊은 한국 목사님이 미국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목회가 잘 안됐어요. 목회가 아주 힘들었어요. 고민이 많았습니다. 목회를 그만두어야 되나 기다려야 되나. 그런데 한국에 계신 그의 어머님이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인데 아들의 목회가 어렵다는 말을 들으시고 미국에 건너와서 그 아들 교회의 예배당에 무릎을 꿇고 금식을 하시면서 기도에 들어가셨어요. 

며칠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금식하면서 기도하시더니 기도를 끝내시고 일어나셔서 아들에게 한마디를 하시더랍니다. ‘네가 40이 넘으면 된단다.’ 그런데 정말로 이 목사님이 나이가 40이 넘어가니까 목회가 풀리기 시작하더랍니다. 교회가 잘되기 시작하더랍니다. 이것이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헛되이 들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좇아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때가 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누가 주인이고 누가 임금이고 누가 하나님이고 누가 종이고 누가 우선이고 누가 순종하고 누가 선하시고 누가 전능하시고 누가 신뢰할만한가를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그 결과가 어떠하든 간에 결코 하나님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놀라고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고 결국은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고 평강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