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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그래도 울며 씨를 뿌리십시다 (시 1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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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울며 씨를 뿌리십시다 (시 126:1-6)


한국 사람치고 8월 15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66년 전에 우리 조국이 일본의 끔찍한 손아귀에서 벗어나 해방된 날, 그날을 모른다면 문제가 있는 한국 사람일 것입니다. 광복절은 ‘빛을 다시 찾은 날’이란 뜻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까? 광복절은 이름 그대로 빛을 다시 찾은 날입니다. 일제에 빼앗겼던 국권을 회복한 날입니다. 당연히 기쁨과 감격이 넘쳐야 되는데, 솔직히 유쾌하지 않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남북으로 분단되어 지금까지 통일되지 못한 채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단된 것도 가슴 아픈데 이 좁은 땅에서 진보와 보수로 분열되었으며, 영호남과 동서로 나누어져 편 가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진정한 의미의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일본이 독도 문제로 속을 뒤집어 놓아서 더욱 심란합니다. 얼마나 독도에 대해 집요스러운지, 이 문제로 온통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정작 일제 찬탈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통당하는 종군 위안부 문제라든지,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서 아직도 보상을 받지 못한 우리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시 126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A Song of Ascents)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시 126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 온 직후에 쓰여진 시입니다. 주전 586년경에 느부갓네살 2세가 이끄는 바벨론 제국은 예루살렘 성을 초토화시키고 왕을 비롯한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향 땅을 떠나 약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이국 땅에서 온갖 치욕과 고난을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3차에 걸쳐서 약 5만 여명이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시 126편은 언제인지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직후에 쓰여진 시로 추정되는데 여기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담겨있습니다. 

1. 바렐론에서 70년 만에 해방을 맞게 되었을 때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1-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 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에 빠졌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상상도 할 수없는 현실이 그들의 눈에 펼쳐진 것입니다. 해방입니다. 그것도 7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엄청난 해방을 보면서 1절에 보니까 고향 땅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겨지지 않아서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착각을 했을 것입니다. 서로 꿈인가 생신가 해서 얼굴을 꼬집고 허벅지를 꼬집었을 것입니다! 

2절에 보니까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웃음'과 '찬양'이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남의 나라에서 종노릇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 당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니 이들이 크게 웃고 기쁨의 찬양을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해방도 이와 같았습니다. 일제 시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재일 동포들이 광복이 되어서 고향 땅으로 돌아왔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사할린에 강제 징용 갔던 동포들이 고국 땅을 밟았을 때의 감격을 그려보십시오. 그 기쁨과 감격은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너무 기뻐서 너나할 것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웃고 또 웃으며 기쁨의 찬송을 크게 불렀을 것입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 함석현 선생은 우리나라 해방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우리나라 해방은 도둑 같은 해방이었다, 예기치 않았다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이었다. 그리고 이 해방은 하늘에서 온 것이었다. 어느 누가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해방을 스스로 할 능력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고 그는 평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일제의 핍박 속에 3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보내면서 모든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언젠가도 이야기를 했지만, 연변 과기대에 있는 오 교수님과 함께 중국에 김좌진 장군이 변변치 못한 무기로 일본 정규군 2만5천명과 독립군 3000명이 대결하여 일본군을 전멸시킨 청산리 전투는 정말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주둔한 관동군은 대대적인 부대를 이끌고 와서 연변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와룡지방 일대를 초토화 시켰고, 독립군의 은둔지인 고동하에 사람들을 씨를 말렸습니다. 이 현장에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왔던 춘원 이광수는 그 참담한 현장을 보고 붓을 꺾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죠. 그 순간 그 고통 속에서도 변절의 유혹을 뿌리치고 살던 그가 그 좌절감으로 자신이 지켜오던 양심을 던져 버린 것입니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해방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방이 온 것입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진 것입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2. 그런데 보십시오. 그 해방의 기쁨을 안고 7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기쁨도 잠시입니다. 고향 땅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현실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은 잿더미가 되어서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의 제사를 드렸던 예루살렘 성전은 형편없이 허물어져버렸습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마음대로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 눈앞에 비쳐진 현실의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가족들이 살던 옛 집 옛 동네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은 기뻤겠지만 현실은 참담했을 것입니다. 

건물들은 다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고 먹을 것 입을 것 마져 여의치 않을 때 그 좌절감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예외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에 왔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모습은 눈을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다 무너지고 황폐화가 되었습니다. 이에 이와 같이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4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운명을 과거에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셨던 것처럼 다시 한번 구원해달라는 것입니다. 고향 땅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처참하오니 제발 옛날처럼 도와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도 그냥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라 '남방 시내들' 같이 넘치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남방 시내'는 이스라엘 헤브론 남쪽의 네겝(Negeb) 시내를 말하는데 중동 사막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기(雨期)를 제외하고는 늘 물 없이 말라있던 시내를 말합니다. 

흔히 '와디스'(Wadis)라고 부르는 이 시내들은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아서 말라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폭우가 내려서 강둑이 무너질 정도로 쏜살같이 흘러내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남방 시내들 같이' 우리를 돌리라는 말은 그 옛날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해주셨던 같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쏜살같이, 그리고 넘치도록 풍성하게 자기들을 구원해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3. 그리고 이제 시인은 마지막으로 미래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노래합니다. 

5-6절을 보세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현재 엄청난 시련에 봉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미래의 소망인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예루살렘 성이 폐허가 되어서 비참하게 되었지만 실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은 이렇게 형편없이 비참하지만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씨앗을 뿌리고 가꾸라는 격려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포기하고 주저앉아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현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도 갈망하던 해방은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5년 만에 6.25 동란의 비극으로 한국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온 나라가 폭삭 망해버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우리나라는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유엔에 등록된 120여 국가 중에 필리핀의 국민 소득이 170달러 태국 220달러일 때 한국은 76달러였습니다. 우리보다 국민 소득이 낮은 나라는 인도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후진 국가였던 것입니다. 국가 경제를 재건하는데 많은 비용이 필요했지만 한국에 돈을 빌려주려는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결국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고 일억 사천만 마르크를 빌리게 되었습니다. 서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데 46,000명이나 몰렸습니다. 자격요건은 고졸 출신이었으나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습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 까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일부러 거친 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억 만리타국 땅 서독에 도착한 광부들은 지하 1000m이상의 깊은 땅속에서 열 시간이 넘는 고된 작업을 했습니다. 나이 어린 간호사들 또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외딴 지역 병원들에 뿔뿔이 흩어 진채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들 목숨을 담보로 월남에서 싸운 용사들과 뜨거운 중동지역에서 수고한 산업 역군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민족이 세계로 발돋움 할 수 있었습니다. 보다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과거의 고통을 즐거이 참고 견디어온 앞선 세대들, 그들의 노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삶의 전 영역에서 풍요를 누리고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지금 놀랍게 도약하고 있습니다. 어느 미국에서 20여년 고생하고 온 교포가 서울에 와서 느낀 글을 보았습니다. 서울의 강남에 들어가면 마치 빠리의 개선문 앞이나 뉴욕의 롱아일랜드 부촌을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저도 세계 여러 공항을 다니다보면 각 도시의 공항마다 삼성과 LG가 눈에 안 띄는 공항이 없고, 아이티에도 도미니카와 중국과 미국의 길에는 현대 차와 기아 차가 수없이 달리고 있습니다. 또 한류 가수들과 한국 드라마 비디오들이 상영되는 날은 심지어 이란의 테헤란 과 터키의 이스탄불까지 그 시간대에 교통량을 줄어들게 하고 있습니다. 남한은 세계경제 10대 국가에 들어간 것이고 한국 사람들은 이제 사니 못사니 해도 외국인의 눈에 비친 것은 선진국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광복 66주년을 맞는 우리는 일본의 방자함 앞에 분노하고 있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분단의 아픔을 제공한 일제의 상처 중에 하나가 남북의 분단의 아픔입니다. 지금 북한은 올해만도 600만 명이 양식을 외부로부터 공급받지 못하면 아사할 수 있습니다. 66년째 북한을 스탈린처럼, 히틀러처럼 지배하는 평양의 김정일은 지금 이 시간에도 북한동족들 을 굶겨죽이고, 때려죽이고, 얼어죽이고, 수용소에 보내어 죽이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지하기독교인들 수십만 명이 있고, 부모와 함께 수용소에 던져진 어린 아이들이 수십만 명이 있습니다. 그 불쌍한 사람들이 참다못해, 죽다못해 이렇게 신음하며 통곡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왜 남한 땅에만 있고 북한 땅에는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 우리가 인간입니까, 짐승입니까?”... 이 이야기는 우리의 동포인 북한 지하 교인의 절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광복절 기념 주일을 지키면서 목사로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여기 모인 성도 여러분은 이 민족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을 불어 넣어야 합니다. 한 때 우리 민족이 당하던 고난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교회와 성도들이 서 있었습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뒤 이어진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이 민족의 아픔을 해결하는데 앞장섰습니다. 3·1운동을 앞장서서 주도했으며, 독립협회와 임시정부 등 각종 독립운동 기구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독립협회 지도부에는 윤치호 서재필 등 기독교인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축이 된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에도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 한국 교회는 더 이상 민족의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가 이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교회와 성도는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여 민족의 등불이요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2. 성도는 역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는 야드바셈이라는 유태인 대학살(홀로코스트) 전시관이 있습니다. 이 전시실 2층의 동판에는 “망각은 포로상태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억함은 구원의 비밀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6백만 명이 넘는 유태인을 학살했습니다. 유태인은 이 과거를 잊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합니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생존과 미래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난날 우리 선조들이 당했던 참극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문화재를 비롯한 많은 것을 약탈하고, 언어를 말살하고, 젊은이들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고, 젊은 여성들을 일본군의 성적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종군위안부로 끌고 갔으며, 생체실험을 하기도 했던 일본의 만행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역사의식을 소유하고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역사의식을 갖는 것만으로도 안 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가 가진 약함을 주님 앞에 겸손히 내려놓고 울며 씨를 뿌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기도의 자리에 다시 이 민족이 서는 것입니다. 유명한 미국의 부흥사 빌리 그래함 목사가 1980년 방한해서 여의도 광장 집회를 인도했을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캐나다에서 숲속의 새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나는 일본 토쿄에서 이른 아침 자동차 엔진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번영을 보았다. 나는 한국 서울에서 교회당 새벽 종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새벽에 깨어 기도하는 나라 한국은 세계의 희망입니다!” 사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나라가 이만큼 된 게 무엇 때문입니까? 물론 많은 국민들이 많이 수고한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고한다고 다 잘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눈물 흘리며 악착같이 새벽기도 하고 산기도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믿음의 사람들 때문에 잘 된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기도가 예전만 못합니다. 이제 다시 기도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사명을 가지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눈물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저는 이번 아이티에 가서 그 나라 사람에게 감사를 했습니다. 부통령에게, 그리고 여러 지도자들에게, 더 나아가 집회 때마다 그들에게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6.25때 그 나라가 우리에게 800만 불을 원조, 고맙지 않습니까? 이젠 갚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원조도 좋고 구제도 좋지만, 지금 전 세계는 영적으로 엄청난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복음으로 다져진 나라들이 엄청난 쇠퇴의 길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 감추어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사람이 지금 전 세계에 안 들어간 곳이 없습니다. 세계에 704만 명이 나가 있고 또 한국인이 모인 곳마다 교회가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지금 미국에 이어 우리나라가 선교 2위국(선교사 파송 2만 2천명)인데, 조금 후면 1위국이 됩니다, 조짐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게 중요합니다. 편협한 민족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입니다. 특별히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의 사명을 중차대합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복음이 왕성한 나라를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한때 영국 중심의 세계가 이뤄졌습니다.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ica)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 중심의 세계가 이뤄져졌습니다. 팍스 아메리카나입니다. 아직까지 계속되고 아마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될 겁니다. 그러나 언젠가 중국 중심의 세계가 이뤄질 겁니다. 팍스 시니카(Pax Sinica)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디까지나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세계가 평화와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한국의 크리스천들을 중심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이른바 크리스천 팍스 코리아나(Christian Pax Koreana)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심히 혼란스럽고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큰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정말 큰 문제입니다.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겁니다. 국론의 분열입니다. 지역 차이, 이념 차이, 계층 차이, 세대 차이, ... 이런 것들로 인해 서로 미워하고 욕하고 ... 심지어 기독교계조차 갈라져 있습니다. 

아무쪼록 위정자들도, 국민들도 서로 사랑하고 위해서 격려하고 기도해 주면 좋겠습니다. 정치인들이 분열로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지 말고 국민을 한데 묶는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성도들과 교회들이 눈물로 기도하면서 온 국민이 하나 되도록 힘쓰면 좋겠습니다. 오늘 광복절 기념 주일에 부디 이 말씀 마음에 새기고 통일을 위해, 세계 복음화를 위해 그래도 울며 씨, 뿌리십시다. 우리 시대에 놀라운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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