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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안히 가라 (눅 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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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히 가라 (눅 7:36-50) 
 
 
범죄한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그 어디에도 평안이 없습니다. 최근 서울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지역도 산사태로 수십 명의 인명을 앗아갔으며, 노벨 평화상의 본고장인 노르웨이서도 총기 난사로 인하여 삽시간에 70여명의 청소년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희망은 평화입니다. 인류의 평화를 목적으로 창설된 UN을 위시하여 모든 국가나 기구들이 이 일을 위하여 진력하지만 완전한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요 14:27).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기 때문입니다(사 9:6).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불안에 떠는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평안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1. 죄 사함을 받은 자의 평안입니다.

여기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을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37, 39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고 그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였습니다.

1) 눈물로 발을 적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되어 갔을 때 죄인이라고만 알려져 있는 한 여자가 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발을 적셨습니다(38절). 본문에 나타나는 이 상황으로 보아 거기 모인 사람들은 그 여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는 여인의 행동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고 불안한 인생을 사는 여인이 사죄의 특권을 가지신 예수님 발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눈물이 흘러서 눈 안에 있는 불순물을 씻어내는 것처럼 마음속의 죄를 애통히 여기며 흘리는 눈물은 심령을 깨끗하게 하고 평안을 줍니다(마 5:4). 

2)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시 14:1-3).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자기가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파스칼(Pascal)은 “사람에게는 자기를 의인시 하는 죄인이 있고, 자기를 죄인시 하는 의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한편 강도는 자기의 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눅 23:39). 죽어가는 순간까지 자기를 의인시 하려는 심리적 공황상태가 불안에 떠는 인간의 모습 입니다(창 4:9). 이번에 노르웨이에서 총기 난사로 무고한 생명을 빼앗은 테러범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거나 희생자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없이 정당한 일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죄인이라고 부르는데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죄인된 자기의 실체를 인정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평안이 찾아옵니다.

3) 생활의 전환입니다.

회개(悔改)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뉘우치고 고치는 행위를 뜻합니다. 자기의 과오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이것을 회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회개는 원통하게 여기고 거기서 돌이키는 행동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요 8:11). 세례 요한은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무리들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하고 물었을 때 두 벌 옷 가진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세리들도 부과된 세금 외에 부당하게 거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눅 3:10-14).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 거기서 완전히 돌이킨 행동을 하게 될 때 비로소 참된 평화가 찾아옵니다.

2. 헌신적인 삶으로 오는 평안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을 때 사람들은 그 여인의 행위를 비난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그의 헌신으로 보고 칭찬하였습니다(마 26:12). 신분의 귀천에 상관없이 제게 있는 것으로 헌신적 삶을 사는 사람에게 평안이 있습니다.

1) 물질로 헌신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4:3에는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순전한 나드’는 인도산 식물 이름인데 그 뿌리에서 채취한 재료를 가지고 만든 매우 고가품의 귀한 향유를 뜻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사람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마 14:5). 재물이 많다고 누구나 헌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사치와 연락하는데 쏟아부면서도 주님께 바치는 것은 인색해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그 돈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않고 허비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마 26:8-9). 이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드린 것은 사죄받은 은혜에 대하여 보답하고자 하는 믿음입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는 사람은 이런 일을 하지 못합니다. 

2) 몸으로 헌신하였습니다.

이 여자가 머리털로 발을 씻기고 그 발에 입 맞춘 것은 몸을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2:1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헌신적 삶을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시간과 재능과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쓰여져야 된다는 뜻입니다(롬 14:7-8). 프랑스의 탄넬이라는 조각가는 나폴레옹 황제로부터 비너스 상을 조각해 달라는 명령을 받고 “내 손은 그리스도를 조각한 손인데 황제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비너스 상을 조각할 수 없다.”고 하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습니다(롬 6:13). 

3) 마음을 바쳐 헌신하였습니다.

여인이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신 것은 마음으로 헌신한 것을 뜻합니다. 여인의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몬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발 씻을 물도 내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44-46).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음은 닫아놓은 채 입으로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형식적인 신앙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형식보다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을 더 원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2:14에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고 하였습니다.

3. 사랑의 실천으로 오는 평안입니다.

마음속에 미움과 질투와 분노와 같은 것이 차 있으면 절대로 평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이 충만해지는 법입니다. 죄 사함 받은 은혜로 사랑을 실천하는 여인에게 평강의 주님께서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1) 보답하는 사랑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여인의 하는 일을 그냥 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39절).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한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빚진 사람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다. 둘 다 주인으로부터 탕감을 받았는데 이 경우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시몬이 많이 탕감을 받은 자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이 여자는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기 때문에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47절). 이 여자의 사랑과 헌신은 주님께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여야 됩니다(요일 4:10).

2) 베푸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합니다. 성경은 이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2:40).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베푸신 다음 사랑의 계명을 선포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3:34-35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1서 4:11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하였습니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저도 자식에게 그 사랑을 전해 줍니다. 우리는 모두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엡 3:19). 많이 받았으니 많이 베풀어야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47절).

3) 누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참 평안과 행복이 찾아옵니다. 요한1서 4: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으로 인하여 누리는 평안함은 받기만 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끝없이 베풀면서 누리는 결과입니다. 사랑을 누린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기만 하고 자기는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거나 줄만한 대상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행 20:35).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이 사랑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평안과 행복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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