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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잡아야 할 작은 여우: 정욕 (삼하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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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잡아야 할 작은 여우: 정욕 (삼하 11:1-5)


오늘 이 아침에 부드러운 눈으로 옆 사람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으로 옆 사람들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아하셨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삶에 대한 사명화된 목적 의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해야 할 나의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거룩한 삶의 이유를 깨닫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것만 회복되면 내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만 회복되면 우리는 다시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한 사람들을 붙들고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역사는 언제나 불확실한 상태에서 불완전한 사람들을 붙들고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의 인생이 확실했습니까?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사랑하는 아내를 묻을 땅 한 평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의 인생이 확실했습니까?  아니면,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의 장래가 촉망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모세는 오늘날로 말하면 실직자요 도망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시골 바닷가의 가난한 어부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무슨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아스팔트처럼 그의 장래가 완전한 상태였던 그런 사람은 유망한 없었습니다.  다 미래가 불확실한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으니까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에서는 보잘 것 없는 그들이 세상의 중심에 서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 현실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상황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완벽한 조건을 갖추기를 기대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최고를 꿈꾸는 완벽주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최선을 다하는 신실한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법칙은 최고가 아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다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붙드십시오.  실개천 같은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믿음! 다시 하나님 앞에 붙잡히면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닙니다.  내 신념도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지도 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강하게 의지하십시오.  강한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확실하게 의지하십시오.  확실한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분명하게 의지하십시오.  분명한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이나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어느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세워갈 수는 없습니다.  함께 만들어가고 세워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가정과 교회의 공동체를 서로가 합력해서 하나님의 선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공동체 안에는 언제나 작은 여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은 여우들은 바로 교만과 분노와 이단과 게으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오늘 우리가 다섯 번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작은 여우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정욕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욕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정욕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컨트롤되지 못하는 정욕입니다.  절제되지 못하는 식욕, 절제되지 못하는 정욕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사람들에게는 식욕이 필요합니다.  식욕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식욕이 없으면 거식증에 걸리게 됩니다.  거식증은 심각할 정도로 음식을 거부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으로 심할 경우에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반면에 컨트롤되지 못하는 식욕은 폭식증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도 심하면 죽을 수 있습니다.  거식증과 폭식증은 모두가 컨트롤되지 못함으로써 오는 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성욕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으로서 성욕이 없으면 안됩니다.  건강한 부부 생활을 위해서는 성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컨트롤되지 못하는 성욕은 정욕이라는 이름의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식탐이라고 하는 것이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식사 습관이라든지, 잘못된 식욕 관리가 축적되면서 습관으로 나타난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욕도 자기의 성적 욕구를 컨트롤하지 못하는 습관이 누적되면서 가져온 죄악이 바로 정욕의 정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람이 정욕의 죄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일관성 있는 삶의 습관이 어느 날 결정적인 범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함께 생각할 다윗의 경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 듯이 다윗왕이 밧세바와 더불어 간음의 범죄를 저지른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이 죄 속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점을 먼저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사무엘하 5장 13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유다의 왕으로 있다가 7년 6개월만에 통일이 됩니다.  이제 다윗은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아주 기분 좋은 날이 도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왕이 너무나도 기분이 좋으니까 기분 좋게 나라가 통일된 기념으로 처첩들을 더 두었다고 했습니다.

왕이 후궁들을 많이 두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어떤 문화적인 습관 안에서 왕이 이런 후궁들을 더 많이 두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범죄였습니다.  다윗은 많은 여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욕이란 것을 살찌워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많은 여자들로 만족할 수 없었던 다윗은 어느 날 이번에는 그 당시의 법도 허용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범죄 속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후에 끊임없이 자신의 가정과 국가를 위기 속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욕이라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다윗의 이 사건을 통해서 정욕이라는 이름의 범죄, 그 죄의 정체성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욕은 어떤 죄입니까?

첫째로, 이 정욕은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심리에서 일어나는 죄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정욕이라는 범죄가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하나의 공통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어떤 스트레스 내지는 현실의 긴장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하는 일종의 현실 도피의 심리가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무료함을 깨뜨려 보기 위해서, 혹은 삶의 활력을 얻기 위해서 여러 가지 그럴 듯한 명분을 가지고 성적 모험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정욕이라는 이름의 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 숨어 있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결국 현실도피입니다.

다윗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십시오.  본문이 시작되는 11장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지금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부하들과 참모들, 그리고 모든 병사들을 전선에 내보냈습니다.  본문에 보면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출전해야만 하는 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직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다윗답지 않은 일입니다.  옛날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다윗은 언제나 앞장을 섰습니다.  전선에서 함께 밤을 지내면서 병사들과 싸우던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하들과 참모들을 다 전선에 내 보내고 혼자서 예루살렘에 남았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봐 줄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전시 중이니까 아침부터 나가서 그 상황을 체크하고, 이 전쟁을 독려하고 보고를 받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여기에 보면 2절의 시작이 재미있습니다.  "저녁 때에"  사람이 일어나는 시간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저녁 때에 다윗이 침상에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잠을 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자고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옥상에서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자를 보았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부하들과 병사들을 죽음의 전쟁터에 보내놓고 혼자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는 것이 미안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루 종일 잠을 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어떤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현실도피의 심리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소위 정욕, 간음과 같은 죄에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공통된 하나의 심리가 있는데 그것은 환상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것입니다.  환상 속의 여자를 찾고 있습니다.  환상 속의 남자를 찾고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 중독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가상의 부부로 결혼해서 아바타로 신혼집을 가꾸고 거기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지난 2009년도에 우리 나라에 인터넷 속에서의 가상 부부가 20만쌍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환상 속의 사람을 찾아서 환상 속의 환경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환상 속의 여인, 환상 속의 남자.  한 마디로 말해서 현실을 도피해서 공상 세계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현실 적응력이 떨어집니다.  공상에서 공상으로 계속 도피합니다.  이렇게 되면 현실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자기 아내는 아주 무력한 아내요, 재미없는 성적인 파트너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결국에는 자신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가정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압니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입니다.  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을 사실처럼 믿고 싶어하고 그런 여자, 그렇게 재미를 누릴 수 있는 여자가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바타를 통해서 표출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이런 환상을 찾으면 찾을수록 현실 적응력이 떨어집니다.  현실에서 무력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인격이 파괴되어 갑니다.  정확하게 이것이 현실도피의 심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니버'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기독교에 어떤 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현실주의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현실을 도피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현실과 대결하라고 말합니다.  현실을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현실을 수용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현실과 대결하라고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담대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자꾸 사실이 아닌 환상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공상입니다.  세상에 그런 여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내가 비디오에서 본 여자와 실컷 놀을 수 있는 그런 현실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많은 남자들이 거기에 속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환상 속으로 도피합니다.  현실을 떠나고 싶어합니다.  그러니까 점점 현실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환자, 건강함을 잃어버린 환자처럼 돌변해 갑니다.  여기에 정욕이라는 무서운 죄악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정욕, 그것은 우리를 현실로부터 도피시켜 가는 죄악입니다.

두 번째로, 정욕은 인간을 도구화시키는 죄악입니다.

정욕에 빠진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인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정욕에 빠진 사람은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는 것 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매춘 행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매춘 행위는 인격이 없습니다.  성을 사고 파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인격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인격이 있습니다.  사랑은 인격적인 교감이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친절과 호의가 있고 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따뜻함 속에서 인격은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공동의 선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욕은 철저하게 빼앗는 것입니다.  힘을 가지고 빼앗고 돈을 가지고 빼앗습니다.  그것이 정욕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정욕의 죄악에 떨어지게 되면 건강한 인격이 무너지게 됩니다.  불행한 사실은 오늘 현대의 개방문화가 우리도 모르게 잘못된 성문화에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이성을 인격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바른 인격에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를 자유하지 못한 욕구의 노예가 되도록 계속 만들어갑니다.  상대방의 인격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다만 내가 가진 힘과 돈을 가지고 소유하게 만듭니다.  다윗이 그 죄에 빠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면서 목욕하는 여자를 볼 수도 있습니다.  보이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한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알아보니까 남의 아내입니다.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인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4절에 보니까 다윗이 왕의 힘을 가지고 사람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합니다.  자신의 힘과 돈으로 상대방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도구화시키는 범죄인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범죄의 가장 일차적인 책임은 우리 남자들에게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자도 책임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새벽이나 밤에 목욕을 하지 아직 날도 저물지 않았는데 왜 목욕을 해서 남들에게 보이는 것입니까?

저는 믿음의 여성들에게 아름다워질 특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여성들도 스스로 아름다워지려고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노력과 남을 유혹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그 한계를 분명하게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화장과 유혹하는 화장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크리스찬들은 옷을 입는 것과 화장을 하는 것에도 좀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글에 보니까 화장이라는 것은 20대 결혼의 적령기에 있는 여자들이 자신의 얼굴을 조금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도와주는 것이 화장의 본 의미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꾸만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대는 화장을 하고, 30대는 치장을 한다고 합니다.  40대는 분장을 한다고 하고, 50대가 되면 변장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60대에 가면 환장을 한다고 합니다.

저는 화장도 문제일 수가 있지만 무엇보다 옷차림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하의 실종이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더구나 배꼽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보편적인 옷차림이 되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젊은 자매가 배꼽티를 입고 교회에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내를 하던 집사님이 너무 기가 막혀서 아무리 개방시대이지만 어떻게 배꼽을 내놓고 교회에 오느냐고 한 마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자매가 정색을 하면서 그러더랍니다.  "집사님, 성경도 모르십니까?"  "아니, 성경에 뭐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 자매가 이렇게 대답을 하면서 예배당으로 들어가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했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을 떠나서 옷차림에도 좀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옷을 입는다지만 그러나 그 아름다움도 품위가 있는 아름다움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속살은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가리워질 때 거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다 보여주면 추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간을 지나치게 성적인 대상으로만 파악하려는 사고방식, 이것이 이 시대의 많은 정욕의 죄들을 편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정욕은 인간을 도구화시키는 죄악입니다.

마지막으로, 정욕은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죄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욕이 죄인 줄을 알면서 사람들이 왜 이 죄에 빠집니까?  히브리서 11장 2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여기에 보면 죄악의 낙이라고 했습니다.  죄에도 쾌락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왜 죄에 빠집니까?  쾌락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단은 쾌락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쾌락의 저 건너편에 있는 그가 지불해야 할 값비싼 대가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단은 술의 쾌락을 보여 주지만 술이 깨인 그 이튿날 아침에 반드시 치루어야 할 두통이나 직장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은 절대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단은 마약의 쾌락과 흥분을 보여주지만 그 마약이 망가뜨리고 있는 그 사람의 무너지는 인생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사단은 도적질을 통한 소유의 쾌락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무너뜨리고 있는 그 사람의 인격과 그리고 그 사람이 보내야 하는 지겨운 감옥의 고통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단은 정욕을 로맨스처럼 보여주지만 그러나 그 정욕의 죄가 가져올 가정 공동체의 파괴, 인격의 파괴, 그리고 아내의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 그리고 자식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그 값비싼 대가들은 결단코 우리들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다윗이 그 결과를 보았더라면 그가 이 범죄를 저질렀겠습니까?  다윗이 어떤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먼저 자기 죄를 덮기 위해서 남편을 죽입니다.  밧세바의 남편이었던 우리야를 제일 위험한 전쟁터에 보내서 죽입니다.  그는 이 한 번의 정욕 때문에 살인죄를 범합니다.  또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해서 거짓말의 죄를 짓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레 만에 죽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였던 다말과 간음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암논을 죽입니다.  그런가 하면 솔로몬을 보십시오.  솔로몬이 타락하고 이스라엘이 분열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입니까?  열왕기상 1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다."

그런데 솔로몬이 이처럼 많은 후궁들을 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도서 2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정욕에 빠진 것입니다.  결국 자식들이 아버지의 행태를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신하들로부터 더 이상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왕궁은 휘청거립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렇게 이 한 순간의 정욕이라는 죄를 위해서 이후에 일어날 그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다윗처럼 똑 같은 죄를 저지르면서 똑 같은 모험 속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저는 이 간음이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죄는 용서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반드시 죄는 삯을 받아 냅니다.  대가를 치루게 만듭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것은 육체적 사망 뿐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격의 사망이고, 가정의 사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던 가치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정욕은 공동체의 하나됨을 무너뜨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정욕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하는 죄악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 정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저는 이 아침에 세 가지만 강조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회개하셔야 합니다.  회개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회개를 했습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지은 참회의 시편이 나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다윗이 너무 늦게 회개를 했습니다.  조금 더 일찍 회개를 했더라면 그 많은 상처를 줄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를 책망하자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고 판단한 다윗은 비로소 그의 왕의 보좌에서 내려와 참회의 기도를 올리기 시작합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어거스틴이 마니교라는 이단에서 빠져 나와서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가 회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어느 날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이 정욕에서 건져 주세요."  그런데 참회록에 보면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그가 그 기도를 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기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가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를 정욕에서 구해 주세요.  그러나 아직은 마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속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회개는 당장에 하셔야 됩니다.  지금 당장에 하셔야 됩니다.  오늘 이 죄 속에 빠져 있는 분이 있다면 당장 하셔야 합니다.  요셉처럼 거기서 유혹을 느낄 때 당장에 거기서 뛰쳐나와야 합니다.  당장에 끊어야 됩니다.  한 칼에 끊어야 합니다.  상황이 너무 곤란하다고 생각되시면 내가 상대방을 만날 수 있는 그 자리를 회피하십시오.  내가 유혹을 느낄 수 있는 상황과 환경과 장소를 거절하고 차라리 떠나십시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적극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을 하십시오.
소극적인 회개만 가지고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분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남편,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아내, 그 아내와 그 남편이 하나님이 주신 인격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주신 그녀를 사랑해 보십시오.  그리고 엔조이 해 보십시오.  거기에서 오도되고 미화된 허구의 사랑이 아니라 진정으로 따뜻한 인격적인 사랑을 당신은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 사랑을 해 보십시오.

과거에 타임지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미국의 여러 집단을 대상으로 부부간의 성적 만족도가 제일 높은 집단을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1위가 복음주의적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하고 또 함께 주님을 사랑하는 부부들이 인간적인 사랑에 있어서도 훨씬 더 풍성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 사랑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시 내 아내 앞에, 내 남편 앞에 새로운 사랑의 시선으로 서십시오.  그를 엔조이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파트너를 향해 참 사랑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거룩한 일에 바빠지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에게 틈을 주면 안됩니다.  결코 사탄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다윗은 사탄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다윗이 아침부터 전쟁터의 상황을 보고 받고 자기가 해야 할 의무 앞에 섰다면 다윗의 형편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본문 1절은 어떻게 시작되고 있습니까?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이 말은 다윗이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외면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는 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한 일에 바빠지십시오.  기독교 철학자 가운데 조렌 케에르케고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마음의 깨끗함은 오직 한 가지 목적에 몰두하는 데 있다."  그는 그것을 신인적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목적 앞에 몰두할 때 나는 내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거룩한 일에 빠져보십시오.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몰두해 보십시오.  분명히 거룩한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남편과 아내, 가정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정말 해야 할 일, 이제부터 거룩한 일에 바빠지십시오.  부부가 함께 십자가 앞에 서 보십시오.  그리고 함께 하나님 앞에 헌신해 보십시오.  함께 큐티도 하고, 함께 기도도 하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전도하고, 함께 주의 몸된 교회를 섬겨 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사단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회복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안에서 참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새로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하는 보혈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순수한 사랑이 우리 가정에 터져 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아가 믿음의 공동체인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 가는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이 복된 행복이 여러분과 저를 정욕의 죄에서 지켜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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