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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막절 축제 (느 8: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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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막절 축제 (느 8:13-18)
  

지난 6월 7일 상하이 비즈니스 포럼 개막 축하연주회에서 20대의 여자 바이올리니스트가 등장했습니다.
자매는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 ‘Amazing grace’, ‘살아계신 주’ 등의 곡을 연주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조유진 자매는 인디애나 음대 전액 장학생과 악장으로, 줄리어드 음대에서 악장으로, 지금은 피바디에서 악장과 전액 장학생으로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린 시절에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조유진 자매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셨고, 브라질에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준비 중이셨습니다.
그러다가 위암이 발병하여 2년 동안 투병하시다가 먼저 천국에 가셨습니다.
목회자 가정에 목사가 죽으니 울타리가 무너진 것입니다.
힘든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중에도 하나님은 그녀를 만나주시고 위로하셨으며, 16살 때 기적적으로 미국 유학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마음껏 실력을 쌓아갔습니다.

그리고 3년 전 믿음이 신실한 형제를 만나 미국에서 아름다운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초 하나님은 부부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셨고, 부부는 자신이 다니던 좋은 직장과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지금은 선교사의 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고, 더 귀한 자리를 꿈꾸기보다는 하나님 그분을 알아가는 일, 그분을 섬기는 일이 조유진 자매와 남편의 가장 큰 소망이자 기쁨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여러분의 열망이 되며, 기쁨이 되길 축원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재건을 마치자 하나님의 사자 에스라가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이게 해서 영적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 집회에는 남자, 여자, 그리고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집회는 새벽부터 정오까지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강단에 올라간 에스라가 말씀을 읽자 백성들은 “아멘,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읽은 말씀을 해석하고, 풀어 주자 백성들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무후무한 부흥집회였습니다. 
수문 앞 광장 집회는 이렇게 은혜 충만으로 마쳤습니다.
이것이 지난 주 말씀드린 느헤미야 8:1-12절의 내용입니다.

초막절을 지키라
수문 앞 광장 집회가 끝난 다음 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어제 집회는 에스라가 소집한 집회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집회는 자발적으로 모인 모임이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중요한 명령을 발견합니다. 

“초막절을 지키라.” 
그 명령을 받자마자 백성들은 곧 초막절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초막절은 다른 이름으로 장막절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는 ‘수콧’이라고 부르고 유월절, 칠칠절과 함께 이스라엘 3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본문의 15절을 보십시오.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 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한지라.” 

여기에 네 식물이 나옵니다. 
랍비들은 이를 ‘아르바 미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네 가지 종류’라는 뜻입니다. 
네 가지 종류의 식물은, 첫째 레몬 비슷한 ‘에트로그’라는 과일나무와 무성한 가지가 있는 ‘도금양 나무’, 그리고 ‘종려나무’ 와 ‘버드나무’입니다. 
하나님은 이 네 가지 식물로 초막을 짓고 그 집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요즘도 해마다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은 전체가 초막으로 덮입니다. 
보통은 집 앞에 짓지만 아파트의 경우에는 베란다에 짓거나 아니면 아파트 입구에 크게 짓습니다. 
학교 교실마다 짓고, 회당에도 짓고, 광장에도 짓습니다. 
그리고 가족별로 그 초막 속에 7일 동안 머물면서 선조들의 40년간 광야생활을 기념합니다.
초막절은 크게 세 가지를 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는 과거를 감사하고, 다음 현재를 기뻐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감사하라.
과거를 감사하려면 과거를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기억임을 아십니까? 
신명기 16장 3절입니다.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신명기 16장 12절입니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신앙은 기억입니다. 
그런데 모든 과거를 기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과거에 저지른 자신의 실패, 실수, 상처에 붙잡혀 회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신앙은 과거에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자신들을 강한 손과 편 팔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업이 곤두박질을 쳐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을 때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몹쓸 질병으로 앞이 깜깜해지고 하늘이 샛노랗게 되었을 때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아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도 못 쉴 것 같았던 때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기억할 때마다, “참, 고맙고 감사하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왜 불효자가 나옵니까?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배신자가 나옵니까? 
그동안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쉽게 절망에 빠지고 우울증에 빠지고 자살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과거의 상처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제 기도원에서 북한 선교에 헌신하고 있는 ‘이삭’ 목사의 간증을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분은 중국에 기지를 두고 북한에 성경책 보내고, ‘카타콤 소식’이란 선교월간지를 발행하는 분입니다. 
이분은 “자신이 억울하게 매 맞고 감옥에 갇힌 일로 12명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않는 분입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북한 선교를 하던 초창기 때의 일입니다. 
북한에서 손바닥 크기만한 성경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이 성경을 보내려면 5백만 원 정도 필요했습니다.
국내에서 모금을 했는데 약속된 날자가 지났는데도 모금되지 않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선배가 목회하는 곳에 초청받아서 설교했는데 강사 사례비로 3만원을 주더랍니다.
‘성전건축 때문에 어렵다고 하더니 정말 어려운 가보다’ 했답니다.
예배를 마치고 담임목사실에 잠간 앉아있는데 교인들이 북한선교를 위해 헌금한 돈을 건네 주더랍니다.

집에 와서 봉투를 뜯어보니 3만원 모자라는 5 백만 원이더랍니다.
성경을 마련해서 밀수꾼처럼 성경 보따리를 끌고 중국에 입국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고장이나 10시간이나 발이 묶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또 했다는 거지요. 
우여곡절을 끝에 어렵사리 약속된 장소에 갔지만 성경보따리를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늦게 도착하여 직원들이 퇴근한 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라고 투덜거리면서 무거운 성경 보따리를 끌고 호텔에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성경을 전달하기로 약속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더랍니다.
“늦게 오길 천만대행입니다. 중국보안 당국이 냄새를 맡고 오기로 약속된 9월 2일부터 17일까지 이곳에서 밤낮으로 무장 요원들이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엊저녁에 철수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라고 투덜댄 자신이 그렇게 부끄럽더랍니다.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않으십니다.
정말 그래요.
지난날들을 뒤돌아보면 정말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할 말은 다만 ‘아멘’ 뿐이고, ‘감사’뿐입니다.

현재를 기뻐하라

초막절의 두 번째 의미는 현재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 전에 모압 들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후손들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모세가 죽어가면서 그 백성들에게 한 말은 ‘오늘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몇 군데 읽어드리겠습니다.
신12:7절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신12;18절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 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신14:26절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신16:11절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주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간 광야생활은 누가 뭐라고 해도 고단한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종류의 삶이 광야에서 나타났습니다. 
고라 같은 불평분자가 있는가 하면, 모세 같은 기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고라든 모세든 똑같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고라든 모세든 똑같이 광야를 지났습니다.
고라든 모세든 똑같이 목마르고 배고팠습니다.
고라든 모세든 똑같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작은 같았지만 끝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는 망하고, 하나는 흥했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났습니까?
현재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 믿음의 눈으로 현재를 보느냐 안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왜 나는?” ‘why me?’라고 묻느냐 아니면 “왜 하나님이?” ‘why God?’이라고 묻느냐의 차이입니다. 
“왜 하나님이?” ‘why God?’이라고 물어야 해답이 나옵니다.

서로 마음이 안 맞아 티격태격하는 부부가 “왜 나는 저런 사람을 만났는가? 나는 왜 이렇게 박복한가?”라고 물어서는 해답이 안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저 사람을 주셨을까?” 이렇게 물어야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이 “왜 나는 지지리도 가난하게 태어났는가?” 이렇게 물으면 나오는 것은 한숨이요 절망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가난을 주셨는가?” 이렇게 물어야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업이 부진한 사람이 자기의 안 되는 사업을 보면서 “왜 나는 하는 일마다 안 되는가?”라고 탄식하면 해답이 안 나옵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는가?” 이렇게 물어야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훈련하셔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무슨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갑자기 큰 병이 생길 때 물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병을?” 
교통사고를 만나 병원으로 실려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물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교통사고를?” 
시험에서 떨어지고 집으로 돌아올 때 물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시련을 주시는가?” 
그때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해답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복음성가-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미래를 기대하라

초막절의 세 번째 의미는 미래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지나치게 미화시키는 경향이 있고, 현재를 지나치게 즐기지 않는 경향이 있고,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가 하나님의 것이듯이 미래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가을에 열매를 거둬 창고에 넣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막절 축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팔절과 속죄일과 장막절입니다. 
나팔절은 양각 나팔을 부는 절기입니다. 
양각 나팔을 분다는 것은 승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속죄일은 죄를 씻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은 장막절인데 장막을 짓고 그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속에서 다가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미래를 기대합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초막절은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와 함께 다스릴 최후 승리를 상징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찬란한 미래입니다. 
그러니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늘 얼굴에 평온함이 깃든 한 성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앞날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하나님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전화합니다. 하나님의 전화는 불통일 때가 없거든요.” 

“하나님께 전화한다구요? 하나님의 전화번호가 몇 번입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33국에 3번입니다. 예레미야서 33장 3절 말씀이죠.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의 전화는 불통일 때가 없습니다. 
통화 중일 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전화기 옆에서 우리의 전화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제 외국에서 공부하는 큰 아이와 문자 교신을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어제도 행복했단다. 오늘도 행복해, 내일도 행복할거야.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거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잘 될 줄 믿으십시오.
복 받을 줄 믿으십시오.
행복할 줄 믿으십시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찬 과거를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재를 믿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그러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하게 사는 것이 기적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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