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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와 격려 (벧전 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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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격려 (벧전 5:12-14)


미국에서 ‘토크 쇼 여왕’으로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는 ‘꿈은 이루어진다(Wildest Dreams)’라는 주제로 깜짝 쇼를 하였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고물차를 바꾸지 못하는 사람에게 새 차를 선물하기로 하고 미국 전역에서 ‘새 차가 꼭 필요한 사연’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연을 가진 276명의 사람이 방청객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방청객 중 11명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무대로 불러 올려 새 차를 선물했습니다. 윈프리는 이어 나머지 방청객 265명에게 작은 상자를 나눠주고 “그중 하나에는 마지막으로 드리는 12번째 자동차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방청객들이 오프라의 신호에 따라 뚜껑을 열자 모든 상자 안에 새 자동차 열쇠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윈프리는 펄쩍펄쩍 뛰며 “모두 차를 받았어요!”라고 외쳤고, 방청석에서는 “오, 맙소사!” “고맙습니다!” “믿을 수 없어요!” 등 감탄사가 연발됐습니다. 
방청객 276명 전원이 3,000만 원 대의 제너럴모터스(GM)의 스포츠 세단인 폰티악 G6을 한 대씩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 엄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파출부 일을 하였고 9살 때 삼촌에게 처음 성폭행을 당한 뒤로 몇 명의 친척들과 주변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며, 14살의 나이에 아이를 낳기까지 했습니다. 아이는 몇 개월 만에 죽었고 그녀는 마약을 하기도 했고 비만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중 1위로 선정되기도 했고 ‘하포 엔터테이먼트 그룹’의 대표, 6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7,000억의 재산을 지닌 갑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그녀의 힘의 원동력은 가난과 아픔을 자신에게 준 하나님의 사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성경을 읽으며 모세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쓴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자서전에서 네 가지 사명을 말합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니 내가 아파봤기에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팠기에 절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픔이라는 것, 고난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는 복이지만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는 저주의 수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난이 복이 되도록 살 수 있을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마지막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는 네로 황제가 아주 작정을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죽이던 때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 묘지에 숨어서 예배를 드릴 때 쓴 편지입니다. 당연히 베드로 사도는 이 카타콤에서 성도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자나 혹은 믿음을 저버린 자는 이 지하 묘지를 벗어나 떠나갔습니다. 

그러기에 언제 이 지하 묘지에 대한 단속이 있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 때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도 하고자 하여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대상은 이 카타콤에서 함께 예배하는 성도가 아닌 사방에 흩어져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이 편지를 쓰고 있고 그래서 이 편지의 첫머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네로 황제의 코앞에서 예배하고 있는 자기가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각지에 흩어져 믿음을 지키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여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하여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고 있지만 하지만 이건 오히려 크게 기뻐할 일이야. 왜냐하면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기 때문이야. 그러니 이 은혜에 감사해야 돼.” 이렇게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격려해 나갑니다. 
왜 고난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고난 없는 영광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정금과 같이 하나님 앞에 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마치 불로 금을 연단하듯이 우리를 단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실망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믿음으로 은혜 아래 살았던 많은 성도들이 우리보다 앞서 믿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욥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욥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이보다 더 의로운 자가 또 있겠느냐고 하실 정도로 바르고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비단 행실만 바를 뿐 아니라 믿음에 있어서도 본받을만한 사람입니다. 고난과 연단의 사람 욥이 하루아침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동방의 가장 큰 자요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하루아침에 가진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거기다가 10남매의 가족을 다 잃었고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차라리 하나님을 원망하고 나가 죽으라고 하며 독설을 퍼붓는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가족을 다 잃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건강도 잃었습니다. 몸에 악성 문둥병이 생겨서 기왓장 조각을 가져다가 벅벅 피가 나도록 긁어도 시원치 않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자 이렇게 되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은 이런 고난을 당하는 중에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정말 감당키 어려운 이 고난을 통해서 연단하여 나를 키우고 내 믿음을 정금같이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굳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런 의미에서 연단 자체, 고난 자체를 은혜로 여기고 그 은혜 가운데 자리를 굳게 잡고 버티어 승리한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을 견디기 어렵습니까? 심지어 죽고 싶은 심정을 가지고 나오신 분들은 없으십니까? 그것이 재물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필요한 만큼 돈이 없기도 하고 아니면 빚에 허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은 그 수렁에서 헤어 나올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하십니까? 아니면 가족 간이던 이웃이나 직장에서의 문제건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 벗어날 길이 없습니까? 욥의 아내가 욥을 비난하듯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도 나를 붙들어주는 것이 아닌 비난의 대열에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외롭고 힘이 듭니까? 아니면 건강 때문에 힘이 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 속에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고난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고난은 반드시 여러분들을 유익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울러 고난을 통한 연단의 결과는 꼭 은혜라고 하는 것을 명심하시고 그 가운데 굳게 서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로하시고 힘주시는 은혜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많은 비용과 수고를 들여 아래층을 다시 꾸몄습니다. 침수 방지장치도 달고 벽과 바닥 그리고 책장 등을 다 새로 꾸몄습니다. 그런데 그만 많은 빗속에 하수가 역류되어 아래층이 참담할 정도로 피해를 당했습니다. 금전적인 피해도 있지만 그보다는 마음의 아픔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생각지 않게 열흘 전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총회장과 부총회장 그리고 교단 총무가 함께 방문하셔서 위로하시고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이틀 전에는 수원교회 목사님과 장로님 그리고 성도들이 여러분 함께 오셔서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눈동자처럼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한시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시선이 단 한 번도 우리에게서 돌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요. 그 제사장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말씀은 너희는 백성들을 이렇게 축복하라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제사장의 축복의 말씀이 바로 이렇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우리가 든든히 서 있어야 한다고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의 마지막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거니와 베드로 사도는 사도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큰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감히 주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를 주님이 찾아오셔서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내 어린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거듭 거듭 말씀하시며 그 직임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랬기에 베드로는 지금 동일한 아픔을 가지고 성도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가 너무도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을 깨달아야 돼. 이 하나님의 은혜로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온전한 믿음에 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야. 내 능력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그 은혜 아래 든든히 서 있도록 하려므나.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려므나. 

그러면서 여기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 실루아노는 바울과 전도 여행을 함께 했던 동역자 실라입니다. 아마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까지 압송되어 온 바울과 함께 로마까지 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는 까닭에 그가 지금 베드로 곁을 지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대신해서 베드로의 편지를 베드로가 불러주는대로 쓰고 있습니다. 바울과 함께 빌립보 감옥에도 갇혔던 실라입니다. 그랬기에 실라로서는 결코 감옥도 죽음도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빌립보 감옥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았던 저입니다. 그날에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 감옥에서 밤중에 기도하고 찬양했더니 하나님이 지진을 통해 옥문을 여시고 모든 묶인 것이 다 풀려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시가 되어 그 날에 빌립보 간수장과 그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 실라는 압니다. 고난의 뒤에는 복이 온다는 것을. 그래서 그가 로마를 떠나지 않고 어쩌면 가장 위험할 수도 있을 베드로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실루아노를 베드로는 신실할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그래 실라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아름다운 형제로 그 이름이 소개가 됩니다. 그것도 베드로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여기에는 또 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는 다름 아닌 마가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첫 번째 전도여행에 따라 나섰다가 무슨 일 때문인지 도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던 마가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전도여행 때는 바나바는 함께 데려가자고 하고 바울은 안 된다고 하며 서로 다투다 결국 바나바는 마가를  그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각각 다른 길로 전도 여행을 떠났던 것이 아닙니까? 그랬던 그 마가가 그 연약하기만 했던 마가가 지금 뭐라고 소개됩니까? 내 아들 마가. 그러니까 베드로는 지금 마가를 내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그것은 마가가 자기의 신실한 후계자라는 뜻입니다. 마냥 철부지로만 알았던 마가가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베드로의 후계자 베드로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가가 바로 자기의 스승 베드로를 통해 전해들은 바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베드로처럼이나 마가도 실패자입니다. 그래서 바울로부터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외면당했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이 이래야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전보다 나중이 더 좋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즉 믿음 안에 든든히 서 있는 자, 은혜 아래 든든히 서 있는 자에게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게 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음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제사장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날마다 축복하며 찬양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그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 가운데 든든히 서서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언제든지 사랑과 화평의 교제를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함께 택하심을 입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하는 말씀에서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로마 교회’를 뜻합니다. 당시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면서 베드로는 자기 편지가 당국자의 손에 들어가면 로마 교회가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에 로마 교회를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고 살짝 바꿔서 불렀습니다. 어쩌면 죄악의 소굴 한 복판이라는 의미에서 바벨론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로마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마가가 또한 너희에게 안부를 전한다고 하면서 너희도 서로 사랑으로 문안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와 교회가 그리고 각 교회 안에 성도들이 서로 서로 내 교회라고 하는 벽을 넘어서 함께 교제하며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한 가지 안타까움은 이 교회라고 하는 벽을 넘어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를 힘들어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웃 교회에서 집회라도 한다하면 모든 이웃 교회들이 다 함께 힘을 합해 은혜를 받기에 힘썼는데 요즘은 내 교회가 아니면 들여다보려고도 하지를 않습니다. 아니 한 교회에 있어도 같은 구역 식구 같은 전도회원이 아니면 서로에게 관심조차 없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그런 면에서 향남 교회 성도들이야말로 진짜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자들임을 감사합니다. 이웃을 돌아보는 일에 함께 힙을 합하는 모습들을 볼 때마다 그저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입니다. 거기다가 힘들고 어려운 이웃 교회들을 섬기기 위한 수고도 아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이웃 교회와의 연합입니다. 

오늘 오후 예배 시간에 전도사님 사모님이 함께 한 예수 전 도단 충청지역 단기선교팀이 우리교회를 방문해서 은혜의 시간을 함께 갖게 될 것입니다. 기쁨으로 섬기시며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그것도 중심으로 환영하며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연합의 은혜를 우리가 마음에 새기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금요 심야 기도회 시간에는 화성시 중부지역 기독교 연합회에서 연합으로 함께 모여서 심야기도회를 갖게 됩니다. 우리만의 기도가 아닌 이웃 교회와 함께 하는 그것도 교파를 초월한 지역 교회들이 함께 모여 뜨겁게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교제하며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각 교회들마다 함께 성장하여 든든히 서가도록 기도하고 성도들의 가정 가정들이 다 화평하고 은혜로 가득한 가정이 되도록 위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와 교파를 초월해서 한 마음으로 교제하고 성도 서로를 함께 세워나가도록 할 때 이 지역이 놀랍도록 변화되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들의 삶 자체가 은혜로 충만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했고 그 결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교제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도록 그렇게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귀한 역사가 우리교회 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교회에도 다 함께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는 상황일지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떨어지고 있으므로 하늘을 향해 날아볼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절망의 골짜기에는 밑바닥이 없습니다. 아무리 깊이 떨어져도 우리를 산산조각으로 부서뜨릴 절망이란 이 세상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은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우리가 절망하는 것은 미래를 현재의 처지에 비추어 미리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류대를 못 다닌다고 해서 10년 후에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금의 빚을 5년 후에도 못 갚을 것이라고, 지금의 봉급으로는 평생 남들처럼 못 살 것이라고 미리 계산해 체념해 버립니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5년 후, 10년 후의 인생을 예상하기엔 너무 계산이 빠릅니다.
미래는 오직 하나님만의 영역일 뿐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넉넉하게 만들 수 있는 지식을 먼저 갖추고 사회에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을 먼저 해보십시오.

몇 년간 그렇게 살아 왔음에도 변화가 없다면 길을 잘못 들었을 뿐입니다.
그 잘못된 길에서 절망하지 말고 빨리 깜박이를 켜고 차선을 바꾸십시오.
새 길에서는 새 삶이 무섭도록 빠르게 달려올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보다 나중이 더 아름다운 우리 모두의 삶이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어려움을 보지 마시고 장래 오게 될 멋진 내일을 바라보십시오. 요셉이 한번도 하나님이 주셨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살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도록 다시 말해서 평강을 이루어나가는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자기 앞에 목숨을 구하는 형제들을 보면서 얼마든지 그들을 처단할 수도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형들은 이미 요셉이 쳐 놓은 올가미에 걸려들었습니다. 그걸 핑계로 해서 형들을 처단한다고 해서 그 누구도 요셉을 비난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들을 위로합니다. 

형들이 나를 팔았기에 내가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오늘을 미리 내다본 하나님께서 나를 형들보다 앞서서 애굽으로 보낸 것이었다고요. 나중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제는 그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때도 변함없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요. 그러면서 자기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이들을 책임지겠다고 말합니다. 요셉이야말로 진실된 사랑의 사람이요 평강을 이루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그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든든히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역사하심을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이 은혜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벗어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 안에 든든히 서서 살아가십시다. 처음보다 나중이 시작보다 끝이 더 아름다운 우리들의 삶이 되도록 사십시다. 그래서 오늘의 고난으로 인해 내일 더 기뻐하며 감사하는 아름다운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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