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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괴로운 날 (시 102:1-2, 요 12: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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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괴로운 날 (시 102:1-2, 요 12:26-27)

우리나라 해방 후, 1945-60년대의 대중가요 가사에는 이별, 괴로움 등이 주제였습니다. 그 당시의 가요에는 명사로는 꿈, 밤, 바람, 노래, 가슴, 눈물 등이 많이 등장하였고, 형용사로는 멀다, 괴롭다, 슬프다, 그립다 등이 많이 나왔고, 동사로는 울다, 헤어지다, 흐르다, 기다리다 등이 많이 있었습니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국가적 재난과 민족적 괴로움과 심리적 불안정을 대변하는 가사들이었습니다. 대중가요란 시대정서를 변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픔이나 괴로움이 고스란히 시편에 묻어나고 있습니다. 시편은 그들 마음의 노래입니다. 슬픔을 노래하고, 기쁨을 노래합니다.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의 모든 마음이 다 표현된 노래입니다. 
  
특히 그들은 시편에서 그들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그 외에도 많은 괴로움의 부르짖음이 시편 곳곳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인간의 7정(情)이라고 합니다. 괴로움이란 인간의 필연적 정입니다. 누구나 괴로움이란 정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괴로움이란 특별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 정입니다. 
  
시몬느 베이유는 “인간의 마음을 사무치게 하는 것은 두 가지 뿐이다. 아름다움과 괴로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괴로움을 이길 수 있는 힘만 있으면 인간은 살 의미가 있습니다. 또 인간은 괴로워할 수 있으면 기쁠 수도 있습니다.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인생이란 아무리 괴로워도 살 보람이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그것은 용기와 희망과 약간의 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괴로움은 이기려고 생기는 것, 극복하려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에 빠지는 사람과 물에 뜨는 사람을 비교해보면 똑 같은 물이지만 빠지는 사람이 있고 뜨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은 바다가 놀이터이지만, 물에 빠지는 사람은 바다가 사망의 골짜기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를 누리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괴로움을 극복하는 사람과 괴로움에 지배당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마태복음 6:34에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합니다. 그 날로 족한 그 날의 염려꺼리, 괴로움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괴로움은 나 혼자 당하는 나 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괴로움을 긍정적으로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의 기자는 ‘나의 괴로운 날’이라고 합니다. 자신만의 괴로운 날이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나의 괴로운 날에 괴로움을 극복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괴로운 날에 괴로움을 극복하는 비결을 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하나님 안에서 괴로움을 이겨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괴로운 날은 부르짖는 날입니다. 

시편 102:1에는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성경은 괴로우면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의 괴로움, 우리의 억울함을 들으실 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밖에 누가 우리의 괴로움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만이 우리의 괴로움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괴로움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마음에 괴로움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가슴에 한이 맺힌 여인입니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또 다른 아내 브닌나가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있는 브닌나는 아들이 없는 한나를 괴롭게 하였습니다. 아들이 없다는 것이 한나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라고 합니다. 한나는 자신의 마음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우리 마음의 괴로움은 부르짖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계산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마음속에서 미사여구를 고르는데 신경 쓰고 있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중언부언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적절한 어구를 찾느라 애쓰고 있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중언부언입니다. 하나님께 정직한 마음으로 부르짖지 않으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중언부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기도는 기도라기보다 차라리 울부짖음입니다. 부르짖음은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예레미야 33:3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부르짖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응답하고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은 연세가 93세인데 지금도 하루에 성경을 30-40장씩 읽으십니다. 장로님은 성경을 113번 통독하였습니다. 늘 기도가 성경을 100번 통독으로 읽고 하나님께 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장로님은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치매가 안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연세에, 그 눈을 가지고 글을 읽을 수 있겠느냐고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자신이 개발한 약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특별한 약이 아니라 눈에 맨소래탐을 바르시는 것입니다. 눈썹 아래에 맨소래탐을 발라보니 눈이 매워 안 되겠더랍니다. 그래서 눈썹 위에 바르니 눈물이 나고 안구건조증도 없고 좋다고 하십니다. 원래 장로님은 백내장이 있었는데 눈물을 많이 흘리고 나서 병원에 가보니 백내장이 없어졌답니다. 눈물을 많이 흘리고 나니 눈이 시원하고 성경 읽기가 좋다고 하십니다. 
  
눈물은 하나님께 부르짖음을 의미합니다. 흔히 눈물은 여자의 무기라고 합니다. 남자들은 여자의 눈물에는 약해집니다. 눈물은 인간의 무기입니다. 인간의 눈물에 하나님은 약해지셔서 인간을 돌보십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법 중 제일 무서운 법은 ‘떼법’이라고 합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곳곳에서 떼법이 통합니다. 떼를 쓰는 사람에게는 당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빗대어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떼법은 통합니다. 하나님께 떼쓰는 것이 최고의 법입니다. 성경에도 떼법이 나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를 만났습니다. 야곱은 천사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고 천사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야곱이 떼를 쓰니 천사가 져 주었습니다. 예수님도 떼법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 떼를 쓰셨습니다. 이 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누가복음 18장에는 기도를 가르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이 재판장에서 한 과부가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고 하며 나아갔습니다. 재판장은 이 과부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이 괴로움을 받을 것을 알고 과부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비유 말씀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원한을 다 풀어주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성경에는 소리치는 부르짖음이 많이 나옵니다. “나를 도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아들을 고쳐주소서”, “내 딸을 고쳐주소서”. 그 외에도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반면에 소리치지 못하고 아무 말이 없지만 말보다 더 강한 부르짖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의 행동은 말없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옷을 살짝 만졌습니다. 자신의 숨은 행동이 들켰을 때 이 여인은 몹시 떨었습니다. 이 여인의 숨은 행동은 소리 없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모리타 요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정신적 노이로제 치료법입니다. 괴로운 것은 괴롭고,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으로써, 대항하거나 무리하게 극복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불면증에 걸렸습니다.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아 치료하고, 온갖 약을 다 써봤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사도 고치지 못하는 병이니까 평생 불면증으로 살 수밖에 없지’하고 먹던 약을 모두 다 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부터 잠을 푹 자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요법은 그냥 받아들이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부르짖으면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흑인 영가에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라고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괴롬과 슬픔을 노래합니다. 주님밖에 누가 알랴고 합니다. 그래놓고 ‘할렐루야’를 노래합니다. 우리는 괴로움과 슬픔도 할렐루야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부르짖음이 되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 되는 순간 괴로움은 해결받기 때문입니다. 

  
둘째, 괴로운 날은 응답하시는 날입니다. 

2절에는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합니다. 나의 괴로운 날은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날은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날입니다. 
  
날씨가 흐린 날, 구름이 끼고 어두운 날에 소리가 더 잘 들립니다. 구름이 있을 때 소리의 파장이 짧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슴이 무너지고, 영혼이 번민하고, 마음에 괴로움이 쌓여 있을 때 하나님의 소리가 더 잘 들립니다. 마음이 괴로운 날에 하나님이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괴로움이 쌓일 때에 더 기도하게 되고, 말씀을 묵상하게 되고, 경건한 삶을 살게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병환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병원전도가 잘 되고, 마음에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있는 자들에게 상담과 심리치료가 효과적인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속히 응답하소서”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속히’ 응답하십니다. 응답하시는 그 시간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가장 적절한 시간입니다. 내게 이루시는 그 시간이 가장 빠른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여 이루시고, 확실하게 응답하여 이루시려고 미루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그분만을 의지할 수 있도록 때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늦추십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알고 계시는 적절한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인도의 선교사 윌리엄 캐리는 인도로 간지 7년 만에 최초의 개종자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하게 응답하시기 위하여 7년이나 그를 기다리게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22:23에는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에 괴롭게 부르짖는 소리를 한 번도 외면하거나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반드시 들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아들과 딸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패키지여행으로 괌에 갔는데 괌에서 심장병이 생겨서 급히 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에서 한국에 전화를 했는데 아들은 아버지께 소리만 치고 왜 병원에 빨리 안 갔느냐, 뭐하려 아프면서 거길 갔느냐고 야단을 치더랍니다. 딸에게도 전화를 했는데 딸은 울면서 500만원 가지고 입원하고 있는 괌까지 왔더랍니다. 그래서 그 분이 하는 말이 딸은 직통전화이고, 아들은 교환전화라고 합니다. 아들은 뭘 하려면 꼭 며느리를 통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교환전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직통전화입니다. 부르짖음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고 바로 들으시는 직통전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에 민감하십니다. 혹시 내가 아프지 않나, 괴로워하지 않나, 슬퍼하지 않나, 걱정하지 않나, 염려거리가 없나, 하나님은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런 우리의 괴로움에 대해 지켜보고,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담당하실 몫입니다. 
  
아주 오래 본 어느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기사 영화가 기억이 납니다. 기사인 아들이 결투를 합니다.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초조하게 아들의 결투 장면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투구와 갑옷을 입고 긴 장대를 한 쪽 팔에 끼고 말을 달려 상대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상대로 눈을 부릅뜨고 자기에게 달려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에게 긴 장대로 공격을 합니다. 그런데 아들의 장대가 상대를 정확하게 찌르지 못하고 상대의 장대에 맞아 아들이 떨어집니다. 그 순간 군중들은 ‘와’하며 환호를 지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어머니는 ‘악’하는 비명과 함께 얼굴을 가리고,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아들에 대한 부모의 본능입니다. 가을운동회 때 어머니들은 자신의 자녀가 자라서 달리기하는 모습이 대견할 것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달리다가 자녀가 넘어지면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자녀에게 달려갈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보다 더 민감하게 자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이나 괴로움에 우리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졸지도 않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하물며 너희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잠언 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우리가 생각은 자의로 하되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하는 일을 유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계획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달렸고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 응답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응답하시려고 대기하고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어느 선교사가 선교지에서의 사역이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사랑으로 섬기려고 하지만 사랑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 곧 핍박으로 추방 위기에 놓였습니다. 선교사는 산에 올라가 울부짖는 소리로 크게 하나님께 소리쳤습니다. ‘I need you!’(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친 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되돌아왔습니다. ‘I need you!’(난 네가 필요해). 

선교사는 이 소리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는 네가 필요해!’ 하는 말로 들린 것입니다. ‘아,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시는구나’. 선교사는 힘을 얻고 다시 돌아가 선교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로서 성공적 사역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새둥지에서 막 알에서 깨어난 새끼를 보세요. 크게 소리치는 새끼가 가장 먹이를 많이 먹게 됩니다. 어미 새는 입을 가장 크게 벌리는 새에게 먹이를 많이 줍니다. 심지어 실험을 하는데 손으로 만든 인형을 새처럼 만들어 손을 쫙 벌려 입을 벌리는 것처럼 했더니 어미 새가 그 인형에게 먹이를 주었습니다. 입을 제일 크게 벌린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도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을 크게 벌리고, 크게 부르짖는 사람의 소리를 가장 잘 들으십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어느 목사님은 전형적 시골뜨기에 비호감에 가난하고 학력도 변변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하는지 제가 청년 때보면 늘 그 분은 기도할 때에 ‘주여, 주시옵소서. 나는 마음이 심히 괴롭습니다’. 이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제가 그 때는 생각하기를 뭘 저렇게 거지같이 달라고 하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교인인 간호사를 부인으로 얻어 그 부인이 병원에서 일하면서 남편을 공부시켜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간호사 부인이 미국에 취업이민을 가게 되어 미국에 가서 목회학 박사 공부도 하고 목회를 잘 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무리 봐도 잘 될 만한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부르짖음을 잘 했습니다. 이게 그분의 장기이며 특허입니다. 결국 열심히 부르짖는 사람이 잘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86:7에는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괴로움이 있습니까? 슬픔이나, 고통이나, 말 못할 사정이나, 안타까움이 있습니까? 마음껏 소리쳐 부르짖으세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괴로운 날에는 부르짖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날입니다. 

  
결론 

중국의 화가 제백석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이 화가는 30, 40대에 목수 일을 하고, 공사장에서 칠을 하는 일을 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돈을 벌어야 했고 좀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나은 것을 하자고 생각하여 자신에게 가장 쉬운 것을 찾아 벽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힘이 들어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그림 그릴 재료를 직접 만들어서 사용하였습니다. 그 분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가 70세였습니다. 늦게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여 103세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화가의 그림 가운데 늙어서 그린 그림이 더 비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늙어서 그린 그림은 모방을 못했습니다. 나이가 많아 손이 떨려서 그린 그림이라 모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화가는 늘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지 못하면 배우지 말라고 하였답니다. 
  
우리의 어두움의 계절, 절망의 시간, 그리고 할 수 없다는 낙심이 가득할 때가 가치를 발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이때가 더 빛날 수 있습니다. 이런 어두운 날, 괴로운 날에 하나님은 더 빛나게 하시고, 신음을 들어주시고, 육체적으로 힘이 없으면 영적으로 힘을 주십니다. 절망의 날은 없습니다. 나의 괴로운 날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날입니다. 하나님께 응답받는 날입니다. 우리의 괴로운 모든 날들이 은총의 날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부르짖는 날이 축복의 날이기를 바랍니다. (이성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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