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냐, 바라바냐? (마 27:11-26)

첨부 1


예수냐, 바라바냐? (마 27:11-26)

1.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려던 대제사장과 장로, 그리고 바리새인 등 유대 종교 최고 지도자들이 마침내 스승을 배신한 가롯 유다를 앞세워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와 최고 의회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가롯 유다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받았던 은 삼십을 성전에 내던지고 스스로 목을 매달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가 어떻게 해서든 유죄를 입증해 예수를 처형하려고 했지만 증거를 찾아내는데 실패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고소할 거짓 증거라도 만들어 자신들의 막강한 권력으로 유죄를 선고하여 처형하고자 했지만, 쓸 만한 증거 하나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들 중 두 사람이 나서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세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요2:19) 며 증언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거나 모독하는 행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고난받으시기 전에 하신 말씀을 빌미삼아 거짓 증거로 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을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 심문에 대해 침묵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 다시 말해 십자가에 고난받아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을 그들이 이해할 리 없기 때문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진리의 말씀’을 설명해보았자 이해할리가 전무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말이라도 말꼬리를 잡아 죄를 뒤집어 씌울 그들의 심사를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두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7:6입니다.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그런데 그러한 말씀을 거짓 증거로 삼아 사형에 처하고자 했지만, 서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결국 법적 효력이 없는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막14:59) 

그러자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사람들이 그대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 데도,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라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예수께 다시 심문합니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고 그대에게 명령하니 대답하시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이에 예수께서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다시 말해 ‘비록 지금은 예수께서 죄인으로 가장 낮고 천한 위치에 있지만, 이 후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에는 그 모든 것이 변하여 영광과 권능으로 나타나는 것을 너희가 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고, 큰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그가 하나님을 모독하였소.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들이 더 필요하겠소? 보시오, 여러분은 방금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드디어 유죄를 입증할 자백을 받았다며 선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마다 “

그는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며 동조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또 더러는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하며 조롱했습니다. 판결도 하기 전에 죄인취급하며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답변을 구실로 종교적 재판을 하기에는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이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 반란 혐의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고발 내용은 예수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로마 식민 통치를 거역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 반란을 꾀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어 고발한 것입니다. 누가복음23:2입니다.

(눅23:2)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고발장을 접수한 빌라도는 로마 총독으로서 점령지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법과 질서의 문제에 민감했습니다. 만일 예수가 고발장대로 정치적 반란을 꾀한 것으로 그 증거가 확실하다면 빌라도는 예수를 로마의 십자가 처형을 선고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빌라도는 ‘예수가 정치적인 세력을 만들어 로마의 법과 질서에 위협을 가했는가?’ 에 초점을 두고 심문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러한 관점에서 예수에게 심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네 말이 옳도다.”고 답변하십니다. 

이 말씀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됨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구세주로서의 메시야, 다시 말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영원한 만왕의 왕으로 왕되심을 긍정하신 것입니다. 

물론 빌라도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유대인의 왕’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미의 ‘유대인의 왕’이라면 종교적인 문제이지 정치적 반란죄를 적용할 사안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분명히 빌라도에게 설명했습니다. 이 세상 나라 왕이 되는 것이었다면 자신이 체포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가 자신의 나라가 아님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정치적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요한복음18:34-37입니다.

(요18:34-3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을 두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종교적인 이유로 억지 사형 판결을 내렸지만, 그들에게 사형집행권이 없었습니다. 또한 유대 종교적 범죄를 로마법에 의해 재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법에 중대한 범죄 행위가 되는 정치적 반란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고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터무니없는 고발에 대해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침묵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시35:11-12) 불의한 자들이 일어나 거짓 증언을 하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일을 캐묻는구나 그들이 나에게 선을 악으로 갚다니! 내 영혼을 이토록 외롭게 하다니!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께서는 침묵으로 그들의 허위 고발을 부정(否定)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심문과정을 통해 빌라도 역시 예수에게서 그 어떠한 죄목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직감한 것입니다. 예수가 반란죄로 고발되었지만 실제 반란으로 인한 어떠한 소요 사태도 없었고, 반란을 음모했다는 어떠한 징후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빌라도는 평소에 예수의 활동이 로마의 통치에 하등 장애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의 활동이 로마 통치에 반역하는 것이거나 민란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면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손이 아니라 빌라도의 손에 의해 벌써 체포되어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자기를 변호할 기회를 주고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자기의 무죄함을 좀 더 강력하게 주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구명(救命)해주려는 빌라도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셨습니다. 틈만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무죄를 주장하며 살아나려고 자기를 변호하려는 것이 통상적인데, 예수께서는 그러한 모든 기회를 포기하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죄수들을 심문했던 빌라도는 이러한 사람을 일찍이 본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습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세상에 보내사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값을 자신에게 지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해 침묵하신 것입니다. 로마서8:3-4을 보겠습니다.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그 침묵 속에는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대로 잠잠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가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자신의 고난 속에 담으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실로 죽음 앞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침묵으로 자신의 무죄를 나타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빌라도 총독은 크게 놀랐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고발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반감을 사지 않으면서 예수를 석방하려고 변호할 기회를 주는 등 여러 가지로 배려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연한 태도에 적잖게 놀라며 고민에 빠졌습니다. 


3.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할 방도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찾아낸 생각이 유대인 명절에 죄수 한 명을 사면 석방하는 전례였습니다. 그때에 살인강도로 악명높은 ‘바라바’라 하는 죄수가 있었는데, 사형에 처할 반란 음모자였습니다. 빌라도는 이 ‘바라바’를 이용해서 예수를 석방하고자 했습니다. 너무나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두 사람을 앞세워 명절에 한 사람을 석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권을 백성들에게 맡겼습니다. 분명히 누가 선택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유대인들이 그간 예수 그리스도를 랍비, 선생으로 부르며 그의 교훈에 많은 감동을 받았고, 예수가 백성들에게 전혀 해를 끼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이렇게 극히 상식적 방법으로 예수를 석방하므로 예수에 대한 고발장을 무효화하고 그들의 계책을 무산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에 결함이 있다는 것과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없애려는 그들의 음모를 모두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권위와 권세 있는 가르침으로 자신들의 위선과 허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일로 자신들의 고유한 권위와 명예가 상당히 실추되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며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범으로 몰아 죽이려 하는 것을 빌라도가 알아채린 것입니다. 

빌라도가 이를 바탕으로 ‘바라바’와 ‘예수’를 선택하도록 한 것입니다. 총독으로서 얼마든지 자신이 결정해서 예수를 석방할 수도 있었지만, 만약 그렇게 해서 발생할 사태를 짐작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배수의 진을 치고 물었던 것입니다. 

(마27:17)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게다가 그 때에 빌라도는 자기 아내로부터 ‘당신은 그 옳은 사람에게 아무 관여도 하지 마십시오. 지난 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몹시 괴로움을 받았으니까요.’ 라는 편지를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빌라도의 아내는 클라우디아인데 남편을 따라 팔레스타인으로 건너 온 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였다고 합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꿈을 통해 예수에게 죄가 전혀 없다는 사실과, 예수를 살해하려는 일련의 음모가 있다는 것을 알고 심리적, 정신적 갈등으로 심각한 고통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꿈으로 보건데 심상치 않으니 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아내가 보낸 편지를 읽는 동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백성들 사이를 파고 들어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빌라도에게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하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라는 것입니다. 이윽고 빌라도 총독이 백성들에게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놓아 주기를 바라오?”라고 말하자 그들은 일제히 “바라바요”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군중 틈에서 ‘바라바’의 석방을 사주(使嗾)하여 선동하는데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뜻밖의 소리에 빌라도가 놀라 다시 한 번 선택을 묻습니다. 

(마27:21)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나 이미 사주를 받은 백성들은 산헤드린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소리칩니다. 사실 이때 빌라도는 내심으로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고 예수에게 불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유도해 보려고 했지만, 백성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바라바냐’, ‘예수냐’ 하는 선택의 문제 앞에 식민지 점령군 사령관의 말을 듣느니 차라리 밉지만 자기들 지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 훨씬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이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날조된 루머를 백성들에게 퍼뜨리면서 선동(煽動)했기 때문에 군중 심리에 내둘린 백성들로서는 당연히 예수의 사형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로마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을지라도 유대인들은 종교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제사장과 장로, 그리고 최고의 의회기관인 산헤드린의 직접적인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현실에 타협한 것입니다. 이미 산헤드린은 누구든지 예수를 따라다니거나 지지하는 사람에게는 사형과 다를 바 없는 출교처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예수를 선택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기울어지자 빌라도는 비록 산헤드린의 충동질에 ‘바라바’의 석방을 저들이 요구했지만, 일말의 기대를 걸고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를,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라며 다시 한 번 예수를 석방할 의도로 물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그러한 태도는 매우 무책임하고 결단성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유한 판결권을 가진 로마의 집정관으로 마땅히 자신의 양심적 소신에 따라서 판결을 내리면 될 사건을 백성들의 선택에 맡겼다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해 책임을 백성들에게 전가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아무리 백성들이 산헤드린의 선동으로 ‘바라바’를 선택했을지라도 옳지 않음을 명백히 하고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예수를 석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얄팍하게도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고 판결권을 백성들에게, 사주받은 백성들에게 떠넘긴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백성들은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며칠 전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자신들의 옷을 벗어 그 길에 깔아드리며 찬양했던 자들이었습니다.(마21:9). 그래도 조금의 양심은 있어서 빌라도가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라고 묻자, 백성들은 더욱 큰소리로 ‘그는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의 모습이었습니다. 

(사5: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에 빌라도는 만약 예수를 이러한 분위기에서 석방한다면 민란이 일어날 조짐을 느끼고, 백성들의 선택을 따르기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말하기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고 하자, 백성이 하나같이 두려움도 없이 더욱 소리 높여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27:20-25)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형에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집정관으로서 공명정대하게 소신껏 행동하지 못하고, 요즈음 말로 하면 여론 정치에 밀려 포퓰리즘(populism)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폭도로 변할 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포학하게 외쳐대는 백성들로 혹시 민란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로마 당국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군중들에게 떠넘기고 손을 씻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손을 씻음으로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죄에 대해 자신은 책임이 전혀 없고, 자신은 이 사건에 결백하고 전혀 무흠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 간단한 상징 행위를 통해 자기 무죄를 선언하는 대신 모인 무리들에게 그 죄책을 전가(imputation)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비록 자신의 무죄를 선언했지만 역사는 오늘도 그의 죄책을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 중에 분명히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에게도 있음을 명백히 한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심문한 결과에서도 예수의 무죄가 드러났고, 자기 아내의 꿈을 통해서도 예수의 무죄함을 지시받았고,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의 종교적인 문제를 터무니없는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시켜 예수가 고발된 사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빌라도였습니다. 

때문에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며 자신의 손을 씻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죄한 자를 무죄로 판결하지 못한 행위는 역사와 양심의 법,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 영영히 그 허물을 단죄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며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게 한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한 저들의 말대로 유대인들은 A.D.70년 예루살렘의 처참한 멸망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과연, 악을 선택하고 선을 버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피 값을 유대인은 2천년 동안 나라없는 백성으로 끝없이 방랑하며 세계 도처에서 참혹한 일을 수없이 당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세계 곳곳으로 추방당하고 학대를 받았으며 많은 나라에서 비참하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심지어는 히틀러에 의해서 600만이 가스실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던 것입니다. 

빌라도의 판결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는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사형수에게는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채찍질의 형벌이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채찍은 짧은 손잡이에 몇 줄의 가죽 끈을 달고 그 앞부분에 작은 납덩어리로 뾰족하게 만든 뼛조각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이 채찍으로 후려치면, 피가 분수처럼 뿜어나기도 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 등뼈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형수는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 형틀을 젊어지고 형장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의 잔인한 채찍이 그에게 사정없이 내려쳐진 후 이제 십자가의 형틀을 짊어지고 그 고난의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가셔야 하셨습니다. 

훗날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에게 “(행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고 하자, 그 앉은뱅이가 곧장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건을 목격했던 모든 백성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놀라워했습니다.(행3:1-10) 이에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사도행전3:12-16입니다. 

(행3:12-16)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주고,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 사실을 알고 석방하려했으나, 살인강도 바라바를 선택하고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 결국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그 이름이 바로 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수결에 따르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와 공평이 없는 다수는 죄악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정의와 공평이 예외되는 것 역시 죄악입니다. 출애굽기23:1-3을 보겠습니다.

(출23:1-3) 너희는 헛된 소문을 퍼뜨리지 말며 허위 증언을 하여 악한 사람을 돕지 말아라. 너희는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고 법정에서 증언할 때 대중의 편이 되어 허위 진술을 하지 말며 소송 문제를 다룰 때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두둔하지 말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죄가 없음에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정치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선동에 놀아나 ‘살인강도’, ‘바라바’를 놓아주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또한 유대 종교의 기득권을 장악한 대제사장, 장로들, 바리새인 등의 공갈 협박에 매수되어 굴복하므로 ‘바라바’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이 선동정치에 굴복해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했습니다. 정의와 진리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빌라도와 이스라엘은 결국 망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정의와 진리가 매몰된다면 그 사회와 국가는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 이름으로 온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아무리 손해를 보고 고통과 고난이 따른다 할지라도 정의와 진리,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될 때 개인과 더불어 그 사회 국가가 온전히 치유될 수 있습니다.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가 더욱 강한 것입니다. 진리 따라 살아갈 때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그리고 그 앞길에 어둔 장막이 덮친다 해도 진리가 되시는 예수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딛고 선 이 세상 나라가 내가 영원히 살 나라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이 영원히 살게 될 나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성도 여러분, 장차 영원히 누리게 될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받기 위해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얼마든지 함께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롬 8:17)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