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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행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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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I. 본문해설 

본문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난 직후의 일들을 보도하는 가운데 나오는 기사이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3년이 넘도록 동행하였지만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까지 예수님이 정말 누구이시고 그분이 지상에서 행하신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하심이 있은 후에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방언의 기적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언어의 다른 지방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사도들이 방언으로 말하였을 때 사람들은 각각 자기 지방의 언어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었다. 열한 사도와 함께 베드로는 굳건히 서서 방금 그들이 본 일의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계획하셨던 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경륜이 하나의 지점을 향하여 달음질쳐 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그래서 유대인인 베드로는 너희들이 그토록 사모하는 다윗왕의 시대의 번영은 하나님이 후대에 이루실 보다 완전한 영적인 이스라엘의 번영을 가리키는 예표였다고 설명했다. 

이 설교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의미도 모르고 알아왔던 구약의 선민으로서의 모든 자랑스러운 역사가 사실은 하나의 지점을 향해 줄달음쳐온 역사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II.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A. 이스라엘이 못 박은 예수 

그래서 사도는 얼마 전에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 외침으로 빌라도가 내어 주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못 박은 예수였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을 아는 지식을 이 세상에 흘려보내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한 사람, 한 가정, 한 민족을 택하여 나라를 이루게 하셨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관계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고 또 그 지식을 전파할 사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수시로 멀리 떠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도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구약의 신앙을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알고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건이 너무나 고대하던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백성들은 무지와 반역의 감정 속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외쳤다. 폭동을 두려워한 빌라도가 그가 죄가 없으신 분임을 확신하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되셨던 것이다. 

얼핏 볼 때 이 사건은 간악한 유대인들이 꾸민 사건이었고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가 성취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인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 큰 하나님의 백성들의 씨가 퍼지지 못하도록 말살하려고 했던 사단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 넘어 더 위를 바라보면 사단도 미처 알지 못하고, 종교 지도자들과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 놀라운 지혜가 그 위에 원인으로 작용했다. 

B. 하나님의 지혜 

그럼 도대체 하나님이 무슨 지혜를 가지고 계시기에 흠 없으신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간악한 사람들의 손아귀에 넘겨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허락하셨을까?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이 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수밖에 없으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온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후 사람을 지으셨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이는 인간이 단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일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영혼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영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존재이고 육체적으로는 하나님과는 멀고 이 세상 피조물들에게 가까이 있는 독특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하나님이 첫 번째 인간은 그렇게 지으셨지만, 두 번째 인간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창조하셨다. 창조한 인간을 잠들게 하여 그의 신체 중 일부를 위하여 두 번째 사람을 창조하셨다. 

아담은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고백이 남편과 아내 사이의 고백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담과 하와는 이후에 만들어질 부부의 조상인 동시에 이후에 태어날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머리이기도 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후에 이들의 생식을 통하여 번성하게 될 모든 인류를 어떤 공동체로 만들고 싶어 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들이 서로에 대하여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가족적인 일체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이 이 고백 속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이타적인 삶을 살고 위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한 몸으로서 한 뼈로서 공경하는 인류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한 몸이 된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다스리라고 주신 세계를 돌보고 가꾸어 그 속의 아름다움을 더 찬란하게 꽃 피워 주니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이웃의 행복에 이바지하며 사는 인류가 되기 원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대신 모든 것들을 자기의 발 아래 굴복시키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게 되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무참히 짓밟았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또 이것은 사람과의 깨어진 관계로 나타나서 서로 찢고 죽이는 살인의 역사를 연출하게 된다. 자연과의 관계도 끊어져 자연의 위협에 두려워하여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철저한 파괴 속에서 인간은 아무 희망이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미 멀리 떠났지만 인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충만한 영광 속에서 이렇게 비참한 인류를 완전히 구원해 낼 위대한 계획을 작정하셨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 속에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셨다. 오셔서 병들고 눈멀고 가난하고 무지한 자들과 함께 하셨을 때 이제껏 그들은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그분의 생생한 삶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3년 동안을 이 세상에 사시면서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죄인들을 섬기셨다. 죄 지은 자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이 회개하며 용서하게 해 주셨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무지한 자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나누어 주셨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나타나게 될 더 큰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바로 그 본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실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다.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거기에서 진노를 푸신 하나님이 이제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사랑만을 남기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진실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안 사람이다. 그 십자가를 통해 죄에 대해서 부들부들 떠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를 발견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기로 한다. 그러나 또 죄 없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들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 끔찍한 고난의 죽음이 역설적으로 자기와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큰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정사와 권세들, 즉 사단의 무리들을 무장 해제시켰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의 용서만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이길 수 있는 놀라운 은혜의 힘을 주셨던 것이다.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죽이시고 당신을 모질게 대적한 원수들인 우리들은 살리심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사랑의 하나님이신지를 이 세상 모든 인간들에게 보도록 드러내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였다. 


III. 십자가 앞에서 할 일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십자가 앞에서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일까?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였다’(행 2:37)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회개하라고 강력하게 촉구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면 여러분들이 하여야 할 일은 진실하게 자기의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남이 그려놓은 십자가, 남이 알려준 십자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실존이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가 매달려 계신 그리스도 예수의 면류관을 쓰신 그 얼굴과 못 박히신 양손과 발, 창에 찔려 흐르는 그 상처를 통해 떨어지는 핏방울을 온 몸에 맞으며 해야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회개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나 이것이 나의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원래는 흉악하고 더러운 죄인이었고, 진노의 자식이었고, 악독하고 모질게 하나님께 모독을 드리던 능지처참하여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물과 모든 피는 내가 거기에 매달려 쏟아지는 진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며 짓이겨져 죽임을 당하여야 할 끔찍한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말했다. 한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 분의 고난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나의 자랑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없다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난 나의 자아들, 육욕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다시 은혜 없이 살아난 이 모든 것들과 싸우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참회하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처절한 회개가 있는 곳에 자아의 담장은 무너지고, 자아의 담장이 무너진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밀려온다.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 목마른 영혼을 가득 적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살았던 우리의 강퍅했던 날들을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목회자인 나에게 가장 기쁜 날은 예배당이 호기심 많은 교인들로 꽉 차는 순간도 아니고, 헌금이 수십억 나왔다는 소식을 재정부로 전해들은 날도 아니다. 바윗돌같이 굳어졌던 여러분들의 얼굴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아는 눈물이 뜨겁게 흐르는 그날, 그리고 우리 모두 저 높고 높은 별을 지나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위해 오셔서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을 찢으며 ‘나의 이 큰 죄, 나의 이 더러운 죄를 어찌할꼬.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울부짖을 때 그 때가 아마 나에게는 아마 천국일 것이다. 메마른 기도 생활, 힘겨운 헌신, 뿌리 깊이 돋아나는 미움과 원망 그리고 절망감들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가 없는 자리에서 피어나는 독초와 같은 것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가 없는 그 자리에서 돋아나는 독초이다. 나는 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여러분들은 회심한 사람들이고 원래 주님을 깊이 사랑하던 사람들이고,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고, 주님의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변심했다. 이제는 개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거기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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