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방주 안에서의 생활 (창 7:6-12)

첨부 1


방주 안에서의 생활 (창 7:6-12) 
 
 
노아의 시대 사람들은 방주가 배라는 것도, 타면 물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으나 타는 것은 싫어했고 거절했습니다. 구원보다는 세상에 있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들어오기 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계신 곳은 불편했고 세상에 있는 것이 더 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즐기는 죄인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과는 달리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은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방주에서의 불편한 생활을 받아들였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주에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쩌면 불편을 감수하는 삶인 것입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선택은 순간적이지만 방주 안에서 사는 것은 생활입니다.   

먼저 노아가 하나님께서 닫아주신 방주 안에서 머물며 생활했던 기간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노아가 600세되던 해에 대홍수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 식구들은 방주에 들어갔고 방주에 들어간 후 7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였습니다. 그 7일 후의 날자가 노아가 600세된 그 해 2월 17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 600세 2월 10일에 방주에 들어간 샘입니다. 

그리고 창 8:13~14절 말씀을 보면 601년 1월 1일에 땅 위에서 물이 걷쳤습니다. 그리고 601년 2월 27일에 땅이 말랐습니다. 이처럼 날짜를 정확이 기록하고 언급한 것은 대홍수가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서 생활한 기간은 1년 17일간, 즉 382일이나 됩니다. 그것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긴 기간이었습니다. 집나가면 고생입니다. 한주간도 아니고 한달도 아니었습니다. 1년 17일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노아와 그 식구들의 방주 안에서의 생활상입니다. 노아와 그 식구들의 방주 안의 생활은 결코 희희락락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아주 불편한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답답하고 따분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 기간 동안에 노아는 인내와 감사와 순종의 신앙으로 방주생활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노아 방주는 지금의 쿠르즈선과 같이 안락한 선박이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장치만 되어있는 큰 상자와 같았습니다. 그 안에 잘 길들여지지도 않은 야생성을 가진 온갖 동물들이 함께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짐승들과 함께 1년 하고도 17일 동안을 더 생활한 것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의 방주생활이 결코 행복하거나 즐겁지 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냄새나는 동물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 또한 만만치 않았을 테고 제한된 공간 안에서의 생활이란 참으로 답답하고 힘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욱이 오랜 홍수로 인해서 이곳도 습기고 저곳도 습기인데다 후덥지근하고 불편한 곳이었을 것이 뻔합니다. 거기다가 지겨운 배멀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이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모든 것이 최악의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아는 그 긴 기간을 묵묵히 이겨낸 인내의 사람이었습니다. 인내하고 순종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노아가 이처럼 긴기간 동안 불편한 방주 생활을 잘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엄청난 홍수에서 구원받은 놀라운 사실을 잊지 않고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에 약간의 불편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면 방주생활의 불편함이나 피곤함만을 불평하고 짜증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받은 바 구원의 은혜가 크고 놀아웠기 때문에 고후 11:23~27을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런 엄청난 불편을 오히려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노아는 앞에 놓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전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현재의 고난, 현재의 불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에 있는 영광, 장차 받아 누릴 축복을 바라보았습니다. 

불편이 주는 유익이 있고 고난이 주는 유익이 반드시 있습니다.

찰스코우만 여사는 곤충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1년 동안 애벌레가 나방에서 태어나오는 과정을 관찰했습니다. 번데기에서 나방이 나오는 그 과정을 관찰했습니다. 번데기에서 나방이  나오는 그 구멍이 너무  작아서, 나오기가 매우 어려워, 나방은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까 너무 불쌍해서, 가위를 가지고 좀 잘라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만 쉽게 쑥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나오기는 했어도  나방은 방구석에서 뒹굴면서 날지를 못하였던 것입니다

'아하, 내가 나방의 신세를  망쳤구나. 이 나방은 이 작은 구멍으로 나오는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통해서 건강한 나비가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그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쉽게 나와 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나방이 되지못하였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연구에 의하면 고치 안에 있을 때 나비의 모든 영양분은 어께에 쌓여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어께에 있던 영양분은 좁은 구멍으로 나올 때 어깨의 에너지가 점점 몸으로 특히 날개쪽으로 골고루 퍼져서 드디어 날개에 힘이 생기는데 자기가 넓혀서 나온 나비의 영양분은 어깨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깡패 모양으로 어깨만 힘이 있어 으쓱거렸지만 정작 날아야 할 날개쪽에는 전혀 힘이 가질 않아서 날 지 못하였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카프만 부인은 "아, 역시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그 분 만이 가장 지혜로우시다."라고 감탄했답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조금만 불편해도 참지 못하는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많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무엇보다도 편함을 추구합니다. 불편한 것은 못 참습니다. 좀 더 편한 것을 찾기 위해서 오히려 지나치게 비용을 지불하고 불편한 희생을 감수합니다. 그런데 편한 의복, 편한 식사. 편한 주거, 편한 이동 등 이런 편한 것의 추구가 인간의 병듬과 무관치 않으며 환경의 병듬과도 무관치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인간이 시달리는 각종 질병들은 인간이 편리함을 추구한 결과물이며, 환경이 몸살을 앓고 재난과 재앙을 초래하게 된 것도 인간의 편리함에 대한 그릇된 애정과 욕망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불편하게 사는 것을 미개인처럼 취급하고 편리하게 사는 것을 문화인으로 생각하는 이 판단의 오류가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불편하게 사는 것이 존경받는 시대가 되어야 인간과 환경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서양사나 우리의 국사나 할 것 없이 왕들이 장수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단명합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는 여러가지 측면이 있겠으나 왕이란 절대권력이 불편함을 불충이라고 하고 편리함을 충성이라고 해서 왕에게 편리함만을 제공하다보니  병들과 쇄약해지고 빨리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고전 심청전을 이런 측면으로 재해석하는 사람이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원래 심봉사는 건강한 사람이었고 잘먹고 잘사는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잘 먹고 편한 것이 그에게 당뇨를 가져왔고 그 결과로 눈이 어두어졌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심청이란 딸이 있었는데 심성이 착하고 효도할 줄 아는 딸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효도하는 딸이 심봉사옆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병을 고칠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효심이 지극해서 심봉사에게 좋은 것 편한 것만 해주게 됨으로 병의 원인이 잘먹고 잘살고 편한 것 때문인데 그래서 아버지와 딸을 떨어뜨리는 전개를 심청전에서는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석에 몸에 팔았는데 상인들이 그것을 가상히 여겨 7십석의 쌀을 더 얹어주었고 그것을 노리고 뻉덕어미가 그 집에 들어와 심봉사를 돌본다고 하면서 그것을 야금 야금 다 빼먹고 맙니다. 그리고 심봉사에게는 거지같은 음식을 주고 온갖 구박을 다합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왕궁에서 눈먼사람들을 위한 잔치가 열리니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고 시골땅에서 서울로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왕비가 된 심청을 그곳에서 보고 눈을 떴다는 것인데 그 눈을 뜨게 된 이유 분석이 의미가 있습니다. 심봉사가 뺑덕어미를 통해서 받은 불편한 학대와 거지같은 식생활, 그리고 시골에서 서울까지 걸어간 것이 당뇨를 치로하게 되었고, 그리고 당뇨가 치료되니까 자연스럽게 눈도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기발한 해석이 아닙니까? 
거지같은 식생활과 부지런히 겉는 불편함을 감당해야 사람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땀을 흘려야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서 불편하게 살고자 하는 운동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올렛길, 둘레길, 소릿길, 강변길, 옛길, 순레길 이런 길들을 만들고 복원하고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걷고자 합니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자신의 몸을 불편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지나치게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편리함에 대한 애정과 욕망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편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야 하고 편리함을 거절하고 불편하게 사는 이들이 보호되어야 하며 혜택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 살고 못사는 것의 차이가 편리한 물건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 인식되는 이 문화의 야만성을 경멸하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인류의 많은 문제꺼리들이 불편에 답이 있습니다. 불편을 감수하기로 하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혹여라도 초조하고 불안해하며 마음에 조금씩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이 생기지는 않겠습니까? 불편하다고 아우성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노아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나도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오늘일까? 내일일까?'하며 조바심을 내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변함없이 그 방주 안에 수용되어 불편한 생활살이를 잘 감당 했습니다. 이것이 온전한 순종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좀 더디게 성취되는 것 같아 보여도 한 번 하신 말씀을 끝까지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불편을 참고 견뎌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정확한 때를 맞추어 반드시 말씀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당장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의심을 하거나 충만함이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불평하고 원망하고 생각과 감성이 날카로워져서 좌충우돌합니다. 그러나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은 방주 안에서 참고 기다리면서 준비된 양식을 먹고 생존함과 동시에 새 시대를 바라보는 소망 중에 불편함을 참고 인내하는 신앙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마치 방주 안에서의 생활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도 노아가 방주에서 살았던 삶과 같은 것입니다. 따분하고 답답하고 고독하고 외롭고 다람쥐 체 바퀴 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안전하게 보장해 주신 것같이! 음부의 권세와 원수마귀의 유혹이 휘몰아치는 세상에서 속에서 가장 안전한곳은 이시대의 방주인 교회입니다. 지금의 방주 안에 사는 삶은 교회 안에 사는 삶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