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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사야가 본 택한 백성 (사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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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가 본 택한 백성 (사 1:1-9) 


신구약 전체 내용 가운데 분량 면에서 본다면 시편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두 번째가 바로 이사야 성경입니다. 이사야 성경은 모두 66장으로 되어있고 83페이지로 되어있는 방대한 예언서입니다. 내용도 특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 성경에는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예언과 십자가 고난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어서 예언서 중에 가장 권위 있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사야는 한 사람이 아닙니다. 1장에서 39장까지 예언을 이사야 예언으로 보고 40장에서 66장까지의 예언은 누구인지 인적 사항을 확실히 알 수가 없어서 그냥 편의상 ‘제2이사야서’라고 부릅니다. 

BC 750년에서 BC 700년에 활동한 예언자이니까 예언자 중에 가장 오랜 시간, 즉 50년 이상 예언자 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그의 나이 20대 초반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70세가 넘기까지 활동을 하였으므로 활동 분량이 많았고 예언의 특징이 힘이 있고 남다른 것이 많아서 예언자 중에 유명도를 따진다면 가장 유명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먼저 그의 가족 배경을 살피면 이사야는 평민의 자녀가 아닙니다. 고관의 자녀로 출생했습니다. 

유대 나라의 제9대왕 ‘웃시아’라고 있었는데 이사야는 웃시아 왕과 사촌간의 형제입니다. 로얄 패밀리로 태어나서 궁중 생활을 소년시절부터 했고 최고의 영광스럽고 좋은 것을 어린 시절에 누리면서 자랐습니다. 유대나라를 통치했던 42명의 통치자 중에 하나님 앞에나 백성들에게 아주 선하고 좋은 평가를 받는 임금은 10명이 채 안됩니다. 그런데 웃시아 왕은 크게 존경받는 선한 왕으로 성경에 조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었습니다. 

51년 동안 유대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가 평안에 공을 세워서 온 국민이 그를 의지하고 존경했습니다. 이제 젊은 청년 이사야는 왕궁에서 아주 장래가 촉망되는 유력한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항간의 소문은 그가 이 나라의 왕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많이 돌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잘 섬기고 덕이 있는 웃시아 왕 밑에서 이사야는 훌륭한 신앙인으로 촉망받는 인물로 국가적 엘리트로 성장했는데 인생이 변해버렸습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웃시아 왕이 별안간 죽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라. 호흡이 끊어지면 당일에 그 규모가 소멸하리로다.” 

이런 말이 있는데 웃시아 왕이 죽고 나니까 이사야의 가문은 하루아침에 모든 희망과 이루고 있던 성취가 다 무너지고 촉망받던 이사야는 세상의 줄이 삽시간에 끊어지고 그의 인생에 캄캄한 어둠의 역사가 한 젊은이의 마음을 무겁게 눌렀습니다. 그래서 심한 좌절과 고민에 빠져있던 그 시기에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자로서 성령님의 감동이 주어졌을 때 그 영감에 의해서 그가 바라본 하나님의 백성된 유대 백성, 즉 택한 백성의 현 주소는 무엇인가? 즉, 이사야가 바라본 택한 백성의 모습이 이사야 성경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그 첫 번째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적 배경은 유다 왕 네 사람의 왕을 거쳤습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입니다. 이 사람들이 통치하던 긴 역사 속에서 아주 멀고도 외로운 길인 예언자의 길을 50년 이상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바라본 하나님이 선택한 자기 백성의 내용은 무엇인가? 오늘 아주 참혹한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짐승만도 못하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도다.” 이것이 이사야가 바라본 택한 백성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식으로 말하면 아주 불효자식들이요 은공적으로 말하면 배신자들이요 가치관으로 말하면 짐승만도 못하다.” 심한 표현의 공격적 선포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사야가 무엇 때문에 자기 민족 전체를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발했는가? 이사야에 나타난 히브리 민족의 죄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하였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 2절에 나타났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자식을 양육하였는데 아버지를 모르는 백성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부분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는 선민사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성격을 우리가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구원하시며,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의 이 구원사역은 절대로 하나님이 혼자 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 사람을 시켜서 구원의 역사를 확장시켜 나가십니다. 그런데 이 택한 백성이라는 유대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이 온 세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한 민족을 선택하십니다. 그게 유대 민족입니다. “너희들은 나와 같이 일을 하자.” 그래서 아들을 교육시키듯 그 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시고 특별한 관심을 두셔서 그런 일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공동체적 의미, 그것이 택한 백성이요 구체적 대상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타나는 족보 이야기를 보십시오. 성경에는 족보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특별 관심하시고 손을 잡고 있는 어떤 족보의 한 계보가 줄기차게 나옵니다. 수많은 혈통의 줄기가 뻗어나가지만 하나님이 한 줄기를 붙잡고 끝까지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족보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아담 때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다 기억하는 줄기를 보십시오. 아담이 있고, 노아가 있고, 셈이 있고, 아브라함이 있고, 야곱이 있고, 다윗이 있고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바로 그 줄기입니다. 

이 줄기는 하나님의 특별 선택권 안에서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쓰시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줄기에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줄기는 하나님의 특별 선택권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에는 족보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사야가 지적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백성이란 바로 그 줄기에 있는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양육하신,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짐승만도 못하게 군다. 하나님의 특별 선택의 축복을 배반한 민족이다.” 

이렇게 규정을 했습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규정했는가? 성경에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나옵니다. 여러분! 십계명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명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계명 가운데 첫째가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이며, 두 번째가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게 절하거나 우상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절대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 빠르게 내리도록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죄들은 참고 그냥 넘어가는 것도 많은데 이것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보시면 유대 이스라엘 백성의 42명이나 되는 통치자들이 그 성경 첫줄에 뭐라고 나옵니까? “아무개, 아무개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무슨 악입니까? “우상 숭배하는 악을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42명 통치자들 가운데 10명이 안되게 하나님을 섬겼고 그 외에는 전부 다 악을 행하여 우상 숭배를 했고 특별히 그 우상 가운데 바알 숭배를 그렇게 많이 했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 가운데 제일 유명한 선지자 한 사람을 엘리야로 꼽지 않습니까? 

그런데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뭐라고 기도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다 없어지고 나 혼자 남았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사람, 하나님이 택한 백성 가운데 나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나 하나마저 그들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까 그들의 손에 죽는 것보다 하나님 손에 죽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빨리 내 목숨을 거두어주소서.” 안타깝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하나님 섬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짐승만도 못하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 속에 특별 선택을 받아서 최고의 축복권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를, 우상 숭배의 죄를 짓고 있으니까 하나님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너희들은 짐승만도 못하다.” 이렇게 규정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잘 교육하지 못하셨는가? 왜 그렇게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 바로 여기에 이사야 신학의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인격적 하나님이란 말을 씁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이요 선악과 사건입니다. 우리들은 가끔 의문이 나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 하셨으며, 왜 이것은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런데 질문의 마지막은 에덴동산 선악과로 올라갑니다. ‘아니, 하나님이 왜 선악과는 만들어서 연약한 인간이 그것을 바라보면 따먹는 유혹을 받도록 하셨는가? 그것을 안 만들어놓으면 되셨을 텐데….’ 최종의 질문은 거기까지 항상 갑니다. 

“그런 유혹성을 항상 준비해 놓으시고 그것을 따먹었다고 죄로 인정해버리고 인간을 죄 가운데 떨어뜨려 버리면 하나님이 잘못하신 게 아닌가?” 이런 말도 하고 어쨌든 질문은 거기까지 올라갑니다. 아마 그 당시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질문을 했다면 “하나님이 그런 것은 왜 우리 앞에 만들어놓으시고 우리 연약한 사람들이 그것에 유혹을 받아서 벌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셨나이까? 그거 없어버리셨다면 괜찮으셨을 텐데….” 이런 질문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의 해답은 어디서 찾습니까? 우리 현실에서 넉넉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에도 그런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영적으로 깨달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인격이라고 하는 신학적 용어를 제가 사용했는데 그러면 그 인격이라는 말의 성립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인격적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여러분! 한번 인격이라는 말을 두고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 저 사람은 참 인격자야.’ 무엇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그러한 평가를 내리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이 문제는 해결됩니다. 

우리 문화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한 문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언제나 양자택일의 길을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어떤 일이 주어져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안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선악과’라고 했습니다. 선과 악이 언제나 있습니다. 내가 선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입니다. 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선악과를 먹을 수 있습니다. 안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 먹는 쪽으로 선택을 하라고 잘 가르쳐 주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것을 먹는 쪽으로 선택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말씀에 거역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똑같이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무한한 창조력과 마음의 선택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가 곧 인간입니다. 

여러분! 동물은 에덴동산에서 지어진 그대로 지금까지 영원합니다. 동물들이 무슨 정부를 만들고 동물들이 국회를 만들고 법을 만들고 그럽니까? 에덴동산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격적 하나님은 인간은 무엇이나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동질성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같이 할 수 있습니다. 할 수도 있습니다.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문화는 여기를 벗어나서 절대 아무것도 해석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둘 중에서 가장 선하고 귀한 것을 선택하라고 인간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못하게 하시는 것과 안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 주변에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은 평생 북한 드나드는 것을 자기 사역으로 생각하시며 열심히 하십니다. 일반 목회는 안하시고 의약품 거두고 돈 거두어서 필요한 것을 북한에 갖다 주는 사역만 평생 하셨습니다. 거기 가실 때 되면 으레 저한테 오셔서 “이번에 거기 학교에 타자기 10대가 필요하고 오르간이 필요한데 이것 좀 해주십시오. 의약품이 뭐가 필요한데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제약회사 다니면서 컨테이너로 해서 남포항으로 운송시키는 사역만 계속 하십니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자꾸 갖다 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북한에도 아는 사람도 많아지고 잘 가져다주니까 거기나 여기나 똑같이 되었습니다. 그분 말로는 북한에 40번 갔다 왔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곳의 청년들도 많이 알게 되었는데 하루는 그곳에 있는 청년들이 “목사님! 우리 이야기 좀 하십시다.” “그러지.” 그래서 둘러앉았답니다. “뭔 이야기를 할 거냐?” “지금 우리는 정보에 의해서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더 잘 산다는 것은 확실하게 우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사실이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우리가 남한보다 아주 깨끗하게 삽니다.” “그렇구나. 내가 보아도 너희 말이 맞다. 

현재 사회상을 여기 평양의 사회상을 보고 서울 가보면 네 말이 맞다. 남한에 있는 청년들이 너희 같은 나이의 청년들이 깨끗하게 살지 않고 좀 타락성이 있는 생활을 하는 게 맞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도 이렇게 많이 오고 또 서울에도 많이 가는 사람으로서 남한 같은 사회생활이 더 좋다고 하거나 아니면 북한 같은 사회가 더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너희들이 알아야 된다. 그것이 뭐냐? 이곳은 너희들 같은 청년들이 타락할 자유가 없다. 

아마 이런 사회가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깨끗하고 더러운 문제는 너희들이 이곳이 아닌 서울에 가서 그 거리에 너희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온통 반짝이는 불빛 속에서 절대로 유혹을 받지 않고 죄악과 타락의 그 거리 한복판에서도 깨끗하게 살았을 때 그게 깨끗한 것이지 더러워지려야 더러워질 것이 하나도 없는 사회에서는 깨끗한 것이 아니다. 만약 너희를 서울 거리에 갖다 놓으면 너희가 그동안 못해본 것을 다 해보자고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을 때 양자택일의 사건 앞에서 훌륭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인격자요 그 사람이 훌륭하고 깨끗한 것이지 죄를 지으려야 지을 것도 없는 제한 속에서는 깨끗할 것도 없고 타락할 것도 없다. 죄 지은 사람을 감옥에다 가두어 둔다. 그 감옥 안에서는 죄를 지으려야 지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제한 사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 깨끗한 것이냐? 그게 깨끗하게 사는 것이냐? 그 사람을 풀어서 사회에 내놨을 때도 아무 죄를 안 지을 때 그 사람이 깨끗한 것이지 할 수 있는 여건이 다 주어졌을 때 거룩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양자택일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그게 깨끗한 거야.” 
하나님은 인간들에게만은 그렇게 인격적으로 선언하신 겁니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고 안할 수도 있는데 거룩한 것을 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며 살아라.” 이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겁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택한 백성, 인간!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인데 인간들의 자유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유에까지 이를 수 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인격적 모습이다. 그래서 하나님이다.” 만약에 인간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너희들은 이렇게만 살아라.” 그렇다면 영원히 깨끗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려해도 배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짐승입니다. 우리가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소나 당나귀 같은 동물들은 최소한 하나님 앞에 죄는 짓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게 깨끗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못하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구원 받아서 천국에서 살 거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는 여러 가지 선택권 중에서 가장 귀한 하나님의 가는 길을 선택했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좋아하시는 겁니다. 그런 백성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구원해서 영생을 주시는 겁니다. 소나 나귀나 이런 동물들은 인간을 위해서 가장 많이 희생을 하는 동물과에 속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5천년 동안 소가 일을 해주었기 때문에 인간이 먹고 살았습니다. 실컷 부려먹다가 마지막에 잡아먹습니다. 그 동물들은 주인을 위해서 그것보다 더 희생할 것이 없는 삶을 살다가 그대로 희생된 것입니다. 동물은 훌륭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짐승만도 못하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포기하시느냐? 이사야 신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붙들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아담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하나님의 백성은 포기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 이후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선택권이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이 잘못 가는 하나님의 백성은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매를 들어버리십니다. “안되겠다.” 그래서 “매를 더 맞기 전에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인간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는데 하나님 뜻에 있는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주시는 사랑의 매입니다. 그런데 무섭습니다. 하나님이 때리는 매가 되돌이킬 수 없는 어려움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짐승만도 못한 택한 백성들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매를 더 맞게 된다.” 옛날에 우리 학교, 군대는 다 매를 맞으면서 자랐지 않습니까? 매도 얼마나 무섭게 맞았는지 모릅니다. 몽둥이로 죽일 거 같이 때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서우면 사람들이 범죄에서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때리는 매는 시간만 지나면 괜찮습니다. 선생님한테 매 맞아서 내가 일평생 그것이 무슨 내 인생에 괴로움을 줍니까? 잠시입니다. 하나님의 매는 참 무섭습니다. 민족적으로 매를 맞기 시작하면 말도 못합니다. 택한 백성이 유대인이 역사에서 하나님께 맞은 매를 기억해 보세요. 엄청납니다. 그래서 지금 이사야는 더 이상 매를 맞기 전에 “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 너는 고집불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매를 맞으면 인간은 그 자리에서 겸손해집니다. 그런데 그 매가 너무나 무섭습니다. 

여기 포도원 농장 비유를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를 심었는데 좋은 포도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그래서 주인은 화가 나서 포도원을 헐어버리고 짓밟히게 할 것이라.” 여기서 ‘극상품’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유대 민족 극상품의 축복을 내려주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모든 세상의 모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명을 너희들에게 주었다. 이거 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느냐?” 극상품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사명을 열매 맺는 백성에게 옮길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많은 축복 가운데 가장 큰 극상품의 축복이 뭡니까? 구원 사역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되고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좋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이 세상 것에만 관심을 두고 그렇게 하니 짐승만도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특별 선택권의 사람이다.” 

우리는 다 아담과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택함 속에 있습니다. 그 줄기 속에 하나님은 줄기찬 관심을 가지고 계속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영적으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최고의 극상품의 선택권의 우리 안에 있다. 이렇게 최고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그 영적인 은혜를 모르고 세상 것을 그리워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하면 하나님은 매를 들겠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가는 길이라는 것을 이사야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 같은 목회자도 어느 때는 고난스러울 때 은근히 마음속에 원망스럽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 문제는 왜 이렇게 어렵게 하십니까? 하나님 좋고 교회도 좋고 교인들 좋고 목사도 좋고 다 그런 좋은 쪽으로 우리가 다 노력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해주셔야지 정 반대의 길을 가게 하시면 어떡하십니까?’ 이런 원망스러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반문하십니다. 

“갈보리교회 담임 목사! 야! 너 그러면 갈보리교회 말고 대한민국에서, 아니면 세계에서 어느 교회 담임 목사 되기 원하느냐?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나는 지나간 47년 동안 너 돌봐주느라고 시간 없었다. 네가 어디 가서 하나님 믿는 사람 한 사람도 없는 그런 지역에 가서 교회를 열어도 나는 네가 목회하는 교회 다 부흥시켜 주었고 좋은 사람 너한테 다 붙여주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줄 알아라.” ‘아멘’을 안하시네요. 저는 많이 다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른 교회 형편을 다 보지 않습니까? 저는 갈보리교회보다 좋은 교회가 사실 제 마음에 없습니다. 

도심에 아주 큰 교회들도 제가 가서 보면 이게 내가 교회에 와 있는 건지 동대문 시장 복판에 와있는 건지 주변이 어수선합니다. 갈보리교회는 내일도 갈보리교회 소문을 듣고 은퇴목사님들 500명이 구경하러 오신답니다. “그 교회는 조용한 교회이고 TV에도 안 나오고 선전도 안하는데 무슨 좋은 소문이 날마다 나느냐? 우리 한번 구경 가겠다.” “오십시오.” 그랬더니 저는 한 10여명 오시는 줄 알았더니 “500명이 가니까 점심 준비하라.” “네. 하겠습니다.” “갈 때 차비 주어야 한다.” “알았습니다.” 갈보리교회 구경 오신답니다. 

사실 우리 갈보리교회 얼마나 좋습니까? 교회에 오면 산이 있어서 주변이 아늑하고 교회 자리로서 너무나도 좋습니다. 어떤 목사가 우리 갈보리교회 와서 설교했습니다. 나가면서 저한테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갈보리교회는 멋쟁이들만 모였다.” 그래서 “목사를 닮아서 그런 거야.” 평균적으로 볼 때 우리 갈보리교회는 중산층이 모입니다. 남자 교인이 47퍼센트에서 48퍼센트입니다. 여러 가지 면이 아주 탁월합니다. 세계에서 교회 중에 이렇게 선교사 많이 파송한 교회도 없고 그러나 소문은 절대로 안냅니다. 매스컴에 나갑니까? 절대로 안 나갑니다. 

지금 어느 일간 신문사에서 ‘2011년도 선교 대상 갈보리교회’ 정해놓고 저한테 이 상을 받으라고 공문을 계속 보내놓고 있습니다. “아이, 싫습니다. 안 받습니다.” 그러고 있습니다. 소문이 나서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의 최대 축복을 받은 극상품 포도! “갈보리교회를 내가 제일 좋은 교회로 만들어주지 않았느냐? 야! 이필재 목사! 너 최고로 충성하는 교인들을 갈보리교회로 다 보내주지 않았느냐? 뭐가 문제냐?”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제일 좋은 목사 보내주지 않았느냐?” 좋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좋은 것을 받은 자들이 그 좋은 것을 모르고 있으니 짐승만도 못하다. 

인류의 그 많은 종족 가운데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라고 하는 유대 민족을 하나님이 최고의 극상품의 축복을 내려주셨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바알이나 섬기고 있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 이 민족! 짐승만도 못하다.” 이렇게 되어 버린 겁니다. 이사야가 본 택한 백성의 위치! 여러분! 평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 하나님 아버지! 이사야가 준 말씀 “이게 택한 백성의 모습이냐? 짐승만도 못하다.” 그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적 선택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고 있는데 최고의 좋은 축복을 보지 못하는 어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모두의 마음을 순화시켜 주시고 충만하게 인도하여 주셔서 나는 최고의 하나님의 축복권 안에 들어있음을 고백하는 지혜로운 청지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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