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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하시옵소서! (엡 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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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여, 우리에게 하시옵소서! (엡 1:18-19)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내일은 한가위, 추석입니다. 이미 한가위를 지내기 위한 ‘민족대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간, 고향을 방문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또한 고향을 방문하고 계시는 영생의 성도들이 안전하고 행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한가위의 한은 ‘하다(大·正)’라는 뜻에서, 가위란 ‘가운데’라는 뜻에서 왔다고 합니다. 한가위는 8월의 정중앙, 음력 8월 15일을 가리켜 이르는 말입니다. 한가위를 추석(秋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한자가 들어온 이후라고 하니, 한가위는 정겨운 우리말입니다. 

한가위는 ‘달’과 연관이 있습니다. 한가위하면 생각나는 것이 보름달입니다. 그러나 보름달로만 치자면 대보름이라고 부르는 정월의 보름달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정월의 보름달이야말로 크고 깨끗하게 보입니다. 한가위의 의미는 보름달 보다는 오히려 계절적으로 가을의 한 가운데 있어서 모든 것이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한가위만 같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가위는 가을의 수확을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기뻐하는 절기입니다. 한가위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을 보면 보름달과 함께 잘 익은 감을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감사를 상징하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도시로 몰려들어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사람들에게 곡식을 심고 거두는 농경시대의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한가위를 맞으면 떠나온 고향으로 꼬리를 물고 가는 이유는 잃어버린 영혼의 고향을 찾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향을 찾아가도 떠나온 영혼의 고향을 찾을 수 없기에 방황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 없이 또는 습관적으로 고향을 찾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마음의 고향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단지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즐기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영혼이 얼마나 황폐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이번 한가위에는 하나님의 품에 안긴 자신의 영혼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가족들과 함께 행복을 나누십시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를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를 함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를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를 위한 우리의 기도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알게 하시기(:17)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면 마음의 눈이 밝아집니다(:18).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은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서 다시 한 번 마음의 눈이 밝아 하나님을 더욱 분명히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소망에 관한 것입니다.

I. 소망

소망, 이것은 바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가지려는 것은 그것이 누구의 소망인가 하는 것입니다.

18절 첫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18a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는 첫 번째 내용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입니다. 여기에서 지나쳐 버리기 쉬운 중요한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누구의 소망이냐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에 이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가 내어주심으로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은 ‘그의 부르심’ 즉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라고 할 때 소망[ejlpiv"/엘피스]은 누구의 소망일까요?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부르심이 그의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처럼 소망은 그의 소망,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고 바라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사람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그 일을 통하여 이루기 원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합격을 소망합니다. 운동하는 사람은 승리를 소망합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성공을 소망합니다. 아무런 소망도 없이 일하는 사람은 노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하는 일을 통하여 무엇인가 이루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빔’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명절이나 잔치 때에 새 옷을 차려입는 것을, 또는 그 옷을 빔이라고 합니다. 추석에 입는 새 옷을 추석빔이라고 합니다.

추석이 가까워 오면 어머니는 시장에 가서 새 옷을 사오십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큰 것으로 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매와 바지를 한두 번씩은 반드시 접어 올려야 했습니다. 새 옷인데도 물려 입은 헌 옷처럼 헐렁하고 컸습니다. 나중에 접었던 단을 뜯어 놓으면 헌옷에 새 옷감을 덧댄 것처럼 표시가 났습니다.

아마도 자식이 쑥쑥 자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소원이 있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면 어려운 살림에 자식의 키가 큰 다음에도 계속해서 입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이 아련하게 기억하고 있는 명절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할 때는 반드시 그 일을 하는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 일을 통하여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하시는 모든 일에도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부르심에 하나님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2. 우리는 그 소망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를 통하여 무엇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소망을 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는 사람은 제대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기를 원하는 자녀가 부모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부르신 이유와 목적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 호세아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a)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열심히 공부하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고 하나님의 소원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제물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망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마음의 눈이 더 밝아져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알아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소망을 희미하게 알 던 사람이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하나님께서 이루기 원하시는 소망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루기 원하는 소망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우리의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심으로, 하나님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기를 기도하심으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을 더욱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알아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에는 소망이 있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낳은 자녀들에게 가지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자식들이 어떻게 되기를 소망하십니까?
  

II. 영광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소망하시는 내용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말씀에서 찾습니다.

18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8b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심으로 우리들이 알게 되기를 원하는 두 번째 내용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기도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원하시는 소망의 내용은 성도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즉 성도를 영광스럽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성도의 영광입니다. 

1. 성도의 영광입니다.

소망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영광은 성도들의 것입니다. 본래 영광은 오직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요 17:2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큰 민족을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 주시기를 소망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세계 유일신 종교라고 불리는 3대 종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입니다. 구약성경을 믿는 유대교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믿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독교, 우리가 흔히 천주교라고 부르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라고 부르는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등 그리고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등등의 개신교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이슬람교 역시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으로 섬깁니다. 다만 그들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 이스마엘을 조상으로 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공동의 조상입니다.

오늘 이 세계의 문제는 아브라함의 이름이 너무 창대해서 생긴 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자손들이 너무 큰 민족이 되어 그 자손들끼리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평화를 이루려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브라함 안에서 화목하여야 합니다. 신앙은 양보할 수 없겠지만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의 노예로 살던 사람을 그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로 부르심은 죄인을 부르셔서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 성도가 되었습니다. 성도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에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그 영광을 바라야 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그 소망을 바라보며 삽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희망을 붙들고 삽니다. 부모의 소망을 아는 사람은 가능한 한 그 소망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삽니다. 하나님의 소망을 아는 사람은 영광스러운 삶을 바라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소망하는 것을 소망하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을 더욱 분명하게 알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망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지금은 희미하지만 장차 분명하고 확실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될 것을 바울은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꿈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하시는 것을 우리도 소망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것은 우리도 소망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놓고 그 자식이 구질구질하고 초라하게 살기를 원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비록 자신들은 못 입고 못 먹어도 자식만은 잘 입고 잘 먹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못 배웠어도 자식들만은 잘 가르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것은 내세울 만한 물질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경제대국이 될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 결과, 세계가 놀라는 오늘의 한국 경제를 이루었습니다. 부모 세대의 소망이 오늘의 영광을 낳았습니다. 해 줄 수 있는 힘이 없어서 못 해주었을 뿐이지 어느 부모도 자식을 위한 사랑만큼은 남달랐습니다. 소망은 영광을 낳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소망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지 영광스러운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실 것을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망하면서도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을 믿고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실 것을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쉽게 절망합니다. 도대체 우리를 힘 있게 하는 능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III. 능력  

우리는 역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성도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것을 이루시는 능력에 대하여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오늘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주목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먼저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힘의 위력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기억하여야 할 것은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입니다. 이것은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능력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1.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들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자주 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자주 실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능력이 없지만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결코 어떤 능력을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능력의 주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b)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능력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제자들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였던 제자들이라도 서로 다투고 갈라지는 초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능력은 언제나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만 믿는 우리들에게 그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그 능력은 믿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비로소 하나님의 소망대로 우리가 영광스럽게 됩니다.  

자신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영광스러운 삶은 어떤 모습입니까?


2. 우리는 그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한가위의 공동체 놀이는 단연 강강술래입니다. 강강술래는 한가위와 맞아 떨어지는 놀이입니다. 강강술래는 손에 손을 잡고 큰 원을 그리며 끝없이 돌아갑니다. ‘앞소리’에 맞춰 놀이꾼들이 뒷소리로 ‘강강술래’를 일제히 받으며 신명지게 돌아갑니다. 손을 잡고 둥글게 도는 것은 둥근 달을 땅위에 그려 보는 기원의 놀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달을 땅에 그리는 것이 강강술래라고 합니다. 참으로 멋지지 않습니까!

달은 해처럼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단지 해의 빛을 반사하여 땅을 비춥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발하는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빛을 받아 세상에 비추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능력이 없지만 함께 계신 분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없으니 우리 자신의 능력을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함께 계신 분의 그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겸손이 아니라 실제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잠자는 거인일 뿐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종이 호랑이라는 말입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잠이 깊이 들었습니다. 잠을 깨워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로 교회의 잠을 깨워야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시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옵소서! 마음의 눈을 밝히시옵소서!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소망을 깨닫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주시는 성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드러내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소망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성도의 영광을 회복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 교회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보름달 보다 더 큰 부르심의 소망과 영광의 풍성과 능력의 크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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