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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대답지 아니하시니라 (삼상 28: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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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대답지 아니하시니라 (삼상 28:3-25)


제가 군대에서 병장이 되어 소위 제대 말년을 보내고 있을 때 제 바로 다음에 있는 후임 사병이 주사(酒邪)가 아주 고약하고 심했습니다.
특히 술만 마시면 자기 밑의 졸병들을 집합시켜 놓고 기합을 주기 일쑤였는데, 언젠가 그 친구가 또 술에 대취해서 난리를 치고 있기에 제가 말리러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갑자기 제 턱에 주먹을 날리는 바람에 제 입술이 터지고 피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군대에서 졸병이 상급자를 구타하는 있을 수 없는 하극상이 벌어진 것인데, 한 두어 시간쯤 지나 술이 좀 깨었는지 저를 찾아와서 손발이 닳도록 빌기에 그냥 용서하고 그 사건을 덮어 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바로 그날 밤에 그와 똑같은 일을 또 한 번 저질렀습니다.
제 바로 위에 있는 선임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그를 불러서 야단을 쳤는데, 이 친구가 그 선임에게도 역시 주먹을 날려서 이번에는 아예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이 들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임은 우리 중대에서 마음이 제일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어서 역시 그를 용서해 주었고, 그 친구는 며칠 후에 휴가에서 돌아온 다른 선임에게 불려가서 단단히 경을 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창은 가지 않고 그 사건이 무마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제 속을 썩이는 일이 계속되는 바람에 저도 참다 참다 못하여 어느 날부터 아예 작정을 하고서 제대할 때까지 두어 달 동안 그 친구와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고 지냈었습니다.

윗사람이 불러서 야단을 치는 것은 그래도 그를 여전히 사람 취급해 주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만 이미 틀려먹은 인간이라고 판단되었을 때에는 아예 대화 자체도 하기 싫어지는 것인데, 사울 왕이 바로 그런 꼴을 당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싫은 소리건 좋은 소리건 한마디도 듣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내리막길을 걸어왔던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이 아예 끊기는 결정타를 맞게 되었으며 그 이후에 남은 순서라고는 곧장 죽음의 길로 직행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과연 어떤 행동을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대꾸조차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예 입을 다물게 되는 구제불능의 인생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급할 때에 무당에게 가듯이 당신을 찾는 사람'에게 아무 말씀도 주지 않으십니다.

본문 3절로 7절의 말씀에 "3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4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5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6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7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죽었을 때에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 즉 오늘날로 말하자면 강신술사나 무당같이 미신을 행하는 자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다 쫓아내었습니다.
물론 그 자체는 옳은 일이었지만, 사실상 그것은 사무엘 선지자가 죽고 나서야 죄책감이 들면서 뭔가 좀 잘해 보겠다고 뒤늦게 생색을 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수넴"은 갈릴리 남쪽 이스르엘 평지 부근인데 블레셋 군대가 여기에 침입하여 진을 침으로써 사울은 북쪽 지파로부터 원조를 받는 것이 차단당할 위험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처럼 다급한 상황이 되니까 사울은 하나님께 여쭈어 보려고 온갖 발버둥을 쳤지만, 하나님께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전혀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했는데, 바로 자기 신하들에게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명을 내렸던 것입니다.
얼마 전에 특별 왕명을 내려서 다 쫓아내었던 무당을 이제 자기 스스로 찾아 나선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울의 신하들이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라고 즉시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엔돌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성읍이었는데, 사울의 신하들이 그런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무당 축출의 명령 그 자체가 완전히 수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도 사실은 그동안 몰래 점치러 다니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무당들을 보면 아예 월간 잡지나 버스에 대문짝만한 비싼 광고들을 냅니다.
경기가 나쁘고 어려운 일들이 개인과 사회에 덮칠수록 이 무당이라는 업종만큼은 더욱 문전성시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무당에게 찾아가서 뭔가 좋은 소리를 좀 듣고 싶어 하는 이 미신적 심리는 옛날 사람들뿐 아니라 현대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울 왕도 미신을 자기 영토에서는 쫓아내었지만 자기 마음에서는 여전히 몰아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8절 이하 14절에 기록하기를 "8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 9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의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10사울이 여호와로 그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 11여인이 가로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올리랴 사울이 가로되 사무엘을 불러올리라 

12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13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14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자기 신하들이 가르쳐 준 정보를 듣고서 "변장"을 하고 "밤에" 그녀를 찾아갔는데, 이것은 자기 스스로도 낯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는 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신접한 여인에게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처럼 사무엘의 영을 무당을 통해서 만나 보겠다고 한 것은 곧 하나님의 선지자를 무당과 같은 수준에 있는 자들로, 같은 영역에서 서로 통하는 사람들로 여긴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 '사무엘의 신'이란 것이 나타났을 때도 사울 왕은 그 앞에서 넙죽 엎드려 절했습니다.
죽은 영 즉 귀신 앞에 절하는 것을 두고 본인은 선지자에 대한 존경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엄청난 죄악일 뿐입니다.
즉 사울이 선지자를 대하는 자세는 우상숭배자들이 흔히 하는 식과 똑같았던 것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그처럼 선지자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모독하고 있었습니다.
그 신접한 여인이 사울 왕이 내렸던 특명을 상기시키면서 자기 스스로 죽을 짓을 할 수 없다고 겁을 낼 때 사울이 뭐라고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습니까?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무당들을 쫓아냈고 죽였던 사울 왕이 이제 와서는 바로 그 여호와의 이름을 빌어서 그 신접한 여인 생명을 보장해 주고 있었습니다.
정말 명색이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왕이라 하면서 이보다 더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작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울의 요청과 보장을 받고 그 신접한 여인은 '겉옷을 입은 한 노인의 영'을 불러올렸다고 했는데,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가르치기 위하여 진짜로 사무엘의 영을 보내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13절에 보면 그 "신(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그녀가 보았다고 했으며, 또 나중에 19절에서도 그 사무엘의 영이라는 것이 사울을 향하여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물론 '음부'에 내려갈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진짜 사무엘 선지자의 영이 음부에 있을 리는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또 15절에 그 사무엘의 신이 "어찌하여 나로 분요케 하느냐"고 신접한 여인에게 불평을 하는데, 하나님의 품에 안겨 안식하고 있는 선지자의 영혼을 무슨 접신녀 따위가 오라 가라고 귀찮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그 신접한 여인이 독심술 따위를 써서 사울의 의도를 파악하고 어떤 쇼를 벌였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15절 이하에서 그 사무엘의 신이 말하는 내용이 너무나도 정확하기 때문에 이것 역시 취하기 어렵습니다.

칼빈을 위시한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취하는 해석은 유령 따위가 사무엘의 영을 흉내 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에 "사단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으니 이런 일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16장 17절에서 빌립보의 귀신들린 여종, 즉 점쟁이 여인이 사도 바울 일행을 보고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말하는 장면은 귀신의 영도 그 말 자체는 옳을 때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어떤 경로이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건의 배후에 계셔서 사울 왕에게 그의 종말을 선고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사무엘 선지자가 살아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사울 왕에게 얼마나 많이 말씀해 주셨습니까?
하지만 이제 늦어도 한참 늦은 때에 와서 죽은 사무엘의 영을 찾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한 것은 결코 선지자에 대한 참된 존경도,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자신의 다급한 처지에 쫓기는 가운데 하나님과 선지자를 무당과 귀신처럼 여기는 지극히 불신앙적인 행위일 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무당 세계에서 일어나는 귀신의 장난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무슨 엑소시스트, 강신술 따위가 전혀 허위의 사건들은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믿고 따르는 것은 그야말로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멸망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소위 '심령 현상'이라는 것들은 이 세상이 아직도 사단이 지배하고 마귀가 활동하는 영역임을 분명히 일깨워 주는 사실일 따름이지, 결코 그것들을 찾아다니거나 도움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무당놀음은 믿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행하는 교인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목사를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가 아니라 그저 무슨 '복 빌어 주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평소에는 예배생활조차 제멋대로 게을리하는 교인일수록 중병에 걸리거나 자녀의 대학 입시를 앞두게 되면 그제야 무슨 '백일기도'니 '사십일 기도'니 난리를 칩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그 믿음이라는 것이 꼭 무당 앞에서 무슨 복을 비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런 사람에게 응답해 주시겠습니까?
꼭 급한 불을 꺼야 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당신을 세상의 '신접한 자와 박수'의 수준으로 깎아내리는 그런 사람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당신 앞에 나아오기를 마치 귀신을 통해 복을 받겠다는 식으로 찾아오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일언반구의 응답도 하지 않으시는 것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평소에 당신의 말씀을 습관적으로 불순종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15절로부터 19절에 "15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16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17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무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그 영은 실제로 사울 왕에게 정확히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에게 '선지자나, 계시나, 우림'을 통해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귀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이미 하나님께서 전혀 만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저 사울의 영적 수준에 걸맞은 귀신 세계를 통하여 이미 그전에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그에게 일러 주셨던 말씀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셨을 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사무엘의 영이 대답한 첫마디는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와서 더 이상 내게 뭐 묻고 자시고 할 것이 있느냐? 너와 나 사이에는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미래는 더 이상 하나님께 묻고 대답을 들을 필요조차 없이 이미 다 결정되어 있는 '기정 사실', 즉 '여호와께서 사무엘 생전에 그를 통해 사울에게 이미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순서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바로 그 다음날에 전쟁에서 패하여 죽고 말았던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사울이 엔돌의 신접녀를 찾아갔던 그날 밤에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래도 시작할 때에는 정말 겸손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 명예와 특권을 누렸던 그가 어쩌다가 이제는 하나님과 더 이상 말씀 한마디도 나눌 것이 없어진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까?

그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라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 한 가지를 불순종했던 과거의 그 어느 한순간을 기점으로 사울의 인생은 내리막을 치닫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아말렉에 속한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엄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삼상 15:9) 남겨 둠으로써 '여호와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는' 불순종을 범했습니다.
바로 그 명백한 하극상이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사울에게 행하시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사울에게 말씀해 주신 때가 있었으며 회개의 기회도 여러 차례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의 회개들은 순간적인 감정의 회개로 끝나 버리고 말았으며 오히려 더욱 악한 행위들로 연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이제 와서는 그 마지막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에게 말씀해 주실 가치조차 없는, 이미 끝난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으신 때가 지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순종할 수 있었던 그 아까운 기회들은 다 제 발로 차버려 놓고 이제 와서 발버둥치고 안달해 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일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말씀 순종의 여부는 평상시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미 판가름 나게 됩니다.
꼭 '일제' 때나 '6.25 전쟁' 따위가 터질 때만 누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순종하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시험 시작의 종'이 울리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커다란 인생의 환난이 닥쳐와야만 그 사람이 정말 말씀대로 사는지 못 사는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평소에 읽고 있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매주일 듣게 되는 설교 말씀을 가지고서 각 사람의 순종 여부에 대하여 항상 테스트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 시험의 점수 역시 하나도 빠지지 않고 매기고 계십니다.
정말 그 들은 '말씀을 생활에서 순종하고 체험하고 있는지' 저와 여러분은 사실상 매일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전혀 가망이 없는 낙제생 교인에게는 아예 시험 문제지 자체를 주지 않으실 때가 옵니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서 완전히 순종은 못하더라도 그나마 마음이 찔리고 양심에 가책이라도 느끼고 있으면 그래도 아직은 기회가 주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리신 존재가 되면 그야말로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단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아예 말씀 자체가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듣는 즉시 새가 와서 그것을 쪼아 먹어 버리는' 최악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말'만 기다리는 사람, '자기 기분에 맞는 말'에만 동감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 말씀을 '가려서' 듣기 시작하면 이미 불순종은 저질러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실까?'라는 생각이 들면, '내가 과연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고 있나?'라는 질문부터 스스로 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무당을 찾아가서 좋은 운세를 받는 것처럼 여기는 것도 '하나님을 격하'시키는 지극히 불손한 행위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불순종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은 악한 신성모독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을 깔보는' 행위인 것입니다.
윗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들은 체 만 체 하는 것만큼 건방진 자세가 어디 있겠습니까?
말씀을 듣고도 아예 습관적으로 불순종하는 그런 무례한 자에게는 하나님 편에서도 아예 그 아까운 말씀을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을 날이 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늦기 전에 지금 당장 깨닫고 평소부터 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최후통첩을 받은 사울은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려졌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심히 두려워함과 그 기력이 진하여진 것"밖에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하 25절까지 28장의 나머지 말씀은, 사울이 그 무당이 차려 주는 마지막 밥상을 받아먹고 이제 자기 죽을 길을 향해 떠나는, 실로 사형수가 형장을 향해 떠나는 것과 똑같은 비참한 장면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을 두고 역대상 10장 13절과 14절은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사울의 죄는 '하나님을 무당처럼 대하는 것'과 '그 말씀을 불순종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와 대화를 나눌 필요조차 느끼지 않게 되셨을 때, 아니 그에게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해 주실 가치조차 없게 여기게 되셨을 때에 사울의 인생은 끝장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가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정말 심각한 적신호인 줄 알아야 합니다.
목사 설교까지 지겹고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고 공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도대체 무슨 다른 수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혼자 독학을 하겠습니까?
점쟁이한테 가서 성경 말씀을 좀 풀어 달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성령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무슨 특별 개인수업을 해 주시겠습니까?

'선지자로도 대답지 아니하시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떠나시는 증거입니다.
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으면서 목사를 무당처럼 대하는 사람, 이미 들은 말씀도 전혀 순종하지 않으면서 자기에게 무슨 '좋은 말씀'해 주기만을 바라는 사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는 다시는 한마디 말씀도 주지 않으실 때가 오고야 맙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다 끝난 '엎질러진 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떠나신 때이기 때문입니다.

매 주일마다, 매 수요일마다, 구역 성경공부 시간마다, 새벽기도 시간마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때가 정말 행복한 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여전히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고 계신다면 그래도 아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고 계시는 때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선지자를 통하여, 성경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때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라고 깨닫고 '믿는 마음'으로 순종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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