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죽은 자도 순종하는 음성 (요 11:33-44) - 죽음

첨부 1


죽은 자도 순종하는 음성 (요 11:33-44)

예수님이 나사로를 일으킨 사건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 다음으로 큰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기적이 왜 요한복음에만 나오고 다른 복음서에는 빠져 있느냐.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다른 복음서 기자들의 관심을 끌지 않았겠느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다른 복음서에도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기록이 나오는데 예컨대 열두 살 난 소녀를 살리시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록이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돼 있는데 요한은 그것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성경 저자들이 선별적으로 기록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다 기록한 것이 아니고 그중에서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별해서 기록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을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마는 요한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뿐만이 아니고 장차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과 또 성도들이 미래에 부활할 것의 예표로써 이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사로를 일으키시기 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구절이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아, 예수님은 위대하시다, 예수님이 능력이 많으시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안 되고 이것을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기억하고 우리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고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님이 운명하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캐나다로 가니까 아버님은 이미 funeral home 관에 누워계셨습니다. 이제 장례를 마치고 한국으로 되돌아와야 되는데 처음 몇 년은 제가 할 수만 있다면 매일이라도 아버님의 산소를 가 뵙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지요,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최근에 토론토를 방문했을 때는 두 주나 거기 있었기 때문에 아버님의 산소에 자주 가 뵐 수 있었습니다. 집에서 가깝기 때문에. 

그런데 캐나다의 묘지는 한국과 달라서 봉분이 없습니다. 평평합니다. 그러다보니까 어디에 서야 될지 좀 난처합니다. 비석 앞에 서자니 아버님 관 위에 서는 것이 되고, 좀 그런 면이 있는데 제가 이번에 느낀 것은 아버님이 거기 계시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아버님의 유해는 거기 누워 계시지만 아버님의 인격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거기에서 저를 맞아 주시는 게 아니고 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가에서 느끼는 것은 절대적인 적막함과 침묵입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죽음은 고독한 것입니다. 제가 아직 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니까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천사가 와서 그 영혼을 데리고 가는 장면이 나오던데 예수님의 비유에도 나사로가 죽으니까 천사가 그의 영혼을 데리고 아브라함 품으로 갔다는 구절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죽는 사람은 고독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마는 남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독한 것입니다. 

누가 해외로 떠날 때 공항에 배웅을 나가지만 정작 출국장으로 들어갈 때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을 떠나는 이들을 우리가 더 이상 배웅할 수 없고 그들의 경험을 공감할 수 없는 시점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돌아가시는 분 보다는 남아있는 사람에게 더 고통스러울 수 있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산 자가 죽은 자를 추모하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성묘를 한다거나 묘지를 찾아가서 애도한다거나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이 애통해 했다, 또 아내를 장사지냈다는 구절은 나오지만 아브라함이 사라의 묘지에 찾아가서 애통했다는 구절은 나오지 않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는 모세가 어디에 어떻게 장사되었는지 성경이 아예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것은 의아한 일입니다. 유일하게 죽은 자의 묘지를 의도적으로 찾아가는 장면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신 일과 이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이 전부입니다. 왜 그러느냐. 왜 이처럼 산 자의 애통하는 장면이 별로 나오지 않느냐. 그건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정해서 그랬느냐. 아니면 그들의 내세에 대한 신앙이 좋아서 그랬느냐. 그건 그들이 무정해서가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의 정서보다는 성경을 기록한 자들의 사상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인간의 죽음을 그렇게 큰일로 본 것 같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의 대소사를 그들은 그렇게 크게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생기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 스데반의 죽음을 기록할 때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게 전부입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 한마디로 끝내버렸어요.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장면을 기록할 때도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이게 전부에요. 또 야곱에 대해서도 ‘나이 많고 기운이 진하여 열조에게로 돌아가니라’ 아주 단순하게 성경의 인물들의 죽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살아있는 동안의 이야기의 비중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그의 무덤에 찾아가신 게 아니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기 위해서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이미 돌문이 열려있었고 무덤은 비어있었다고 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 죽음은 영원하지 못하다는 사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는 사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은 우리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사해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죽음은 인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죽는다고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그렇기 때문에 자살은 옵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살한 사람의 영혼이 어디에 갔느냐, 이건 오늘의 주제가 아닙니다. 다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자살이 바른 옵션이 될 수 없지요. 죽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고 오히려 문제가 더 많아집니다. 

생명은 귀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아이를 맡아서 보호한다면 얼마나 책임이 큽니까. 우리가 남의 돈을 맡아서 관리해야 된다면 얼마나 긴장하겠습니까. 우리가 나라라든가 교회의 직분을 맡았다면 얼마나 책임이 큽니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생명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남의 아이를 맡은 것처럼, 남의 돈을 맡은 것처럼 내가 어디의 직책을 맡은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내게 생명주신 것을 내가 바르게 관리하고 책임져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내 것이라고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진리에요. 

예수께서는 이미 죽어서 누워있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어요. 아마 나사로의 입장에서는 이것보다 더 귀찮은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누워있는데. 자는 사람 깨우는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오늘이 911테러의 십 주년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테러가 발생했을 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한다고 하는데 저도 기억합니다. 911테러가 발생했을 때 저는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집사람이 저를 깨웠어요.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가 충돌해서 불타고 있다. 그래서 일어나서 밤새 뉴스를 본 기억이 나는데 911정도 되니까 제가 자다가도 일어났지, 그렇지 않은 일로 저를 깨웠으면 아마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사로도 이미 죽었는데 이미 죽어서 쉬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를 깨우신 것은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이미 죽어 장사된 사람을 다시 일어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죽음은 얼마만큼의 위력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는 죽음을 얼마만큼 존중해야 됩니까. 예수님은 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는 장면을 보지 못하셨기 때문에 왜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가느냐, 그런 의미에서 살리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의 부흥사 스미스 위글스월스 목사님이 출타 중에 사모님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 위글스월스 목사님이 집에 와서 누워있는 아내를 살렸어요. 죽은 아내를 살렸어요. 그리고 왜 작별인사도 안하고 가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사모님이 살아나서 내가 먼저 천국에 가서 당신을 기다릴테니 나중에 만나자 이렇게 말씀하시고 다시 돌아가셨어요. 이건 실화입니다. 인사할 기회 없이 돌아갔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일으킨. 예수님도 나사로야 빠이빠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느냐, 이런 취지는 아니었겠지요.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살고 가라. 아직도 할 일이 있다. 이런 의미로 그를 일으키셨을 수도 있고.

세 번째는 예수께서 죽음에 대한 권세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아무리 죽은 오라버니의 이름을 불러도 오라버니는 응답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죽은 나사로가 응답했습니다. 

이건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러지 않고 그 묘지에서 그냥 ‘나오너라’ 했으면 여기저기서 일어났을 것입니다. 모든 죽은 사람이 응답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했더니 죽은 나사로가 응답한 것입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에 예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에 일어날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차 예수께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는 것을 나사로를 일으키신 것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은 자가 다른 사람의 말에는 침묵합니다.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데 예수님의 음성에는 순종하는, 얼마나 위대한 진리인지 몰라요. 

그리고 네 번째 이유는 생명이 죽음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건강이 질병보다 소중하지 않다면 예수님이 왜 병자를 고쳐주셨겠습니까. 사람의 눈이 볼 수 있는 것이 소경되는 것보다 낫지 않다면 예수님이 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지 않다면 예수님이 왜 죽은 자를 살리셨겠습니까. 이것은 생명이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생명. 그렇지 않으면 그냥 죽은 채로 내버려 두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이냐. 우리도 죽은 사람을 살리라는 말이냐. 아프리카 나이제리아에 벤슨 이다호사라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이분이 소년이었을 때 선교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귀가 번쩍 뜨였어요. 젊은 이다호사가 선교사님께 물어봤습니다. 선교사님은 죽은 자를 살려본 적이 있느냐 했더니 없다고 하더래요. 그런데 이 소년 이다호사는 나는 죽은 자를 살리고 싶다 해서 자전거를 타고 온 도시를 돌아다녔어요. 죽은 사람을 찾기 위해서. 그런데 마침내 상이 난 집을 찾았어요. 

어느 소녀가 그날 아침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 그 집에 들어가서 부모의 허락을 받고 그 소녀가 다시 살아나기를 기도하는데 아무리 기도하고 기도해도 일어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성경말씀을 읽어보니까 예수님이 열두 살 난 소녀에게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아, 내가 달리다굼이라는 말을 안 해서 그렇구나!’ 그래서 그 죽은 소녀에게 ‘달리다굼!’하니까 정말로 그 소녀가 일어나더래요. 제일 많이 놀란 사람이 그 부모님이에요. 그래서 진짜로 그분이 목회를 하는 동안 죽은 사람을 몇 번 살리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폴 케인이라는 목사님은 이분도 죽은 자가 살아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교회 초청을 받아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중에 그 주최 목사님에게 만일 이 기간 중에 어느 교인이 돌아가시면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살아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때 마침 그 부흥회 기간 중에 나이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그 담임목사님과 폴 케인 목사님이 그 집에 심방 갔어요. 

그런데 그 담임목사님은 그 돌아가신 분의 부인에게 차마 이 목사님이 왜 오셨는지를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라는 말씀을 드릴수가 없어서 그냥 위로하러 온 것으로 그분은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대화를 하는데 좀 이상하더래요. 그래서 폴 케인 목사님이 ‘부인,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부인을 위로하기 위한 게 아니고 돌아가신 남편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부인이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하더랍니다. 아니 안 그렇습니까. 허락을 받아야지요. 그래서 차마 기도를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마는. 

우리도 죽은 사람을 살리라는 얘기냐. 그건 하나님이 그럴 기회를 주시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여러분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시편 118편 17절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I shall not die, but live-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살아야 하나님의 행사를 선포하든, 살아야 사랑을 실천하든, 살아야 하나님을 찬양하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가 오지만 그때까지는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예수께서 생명을 주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셨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생명이 역사해요. 영적인 생명, 몸의 생명, 모든 생명이 역사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입니다. 

죽음 자체를 예수님이 부인하신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다스리는 권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에게는 이러한 권세가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날이 오면 갑니다. 그러나 그때가지 잘 살아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우리가 무덤에 묻힌 후에라도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날, 그 목소리에 순종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