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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용서, 사랑, 위로의 가정 (창 5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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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사랑, 위로의 가정 (창 50:15-21)
   
오늘 우리는 추석을 앞에 두고 우리의 가정을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가족제도가 자리 잡은 나라입니다. 명절이 되면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됩니다. 우리네 가정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니는 살아계시든지, 돌아가셨든지 어머니는 영원한 어머니가 되십니다. 우리 한국은 가정중심주의가 뿌리 깊은 민족입니다. 한국의 가정에는 항상 어머니가 존재하고 계십니다. 가정을 잘 지키는 것이 우리 사회와 국가를 튼튼하게 세울 수 있는 비결이 됩니다. 
   
가정이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로 이루어집니다. 하루 세 때의 식사를 나누지만, 천과 만의 용기와 위로와 소망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가정입니다. 

“가정”이란 단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사람이나 좀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을 막론하고, 자기 가정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 가정에서 행복을 얻고, 누릴 수 없다면 어디에서도 행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독일 시인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왕이나 백성을 막론하고, 가정에서 행복을 찾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가정에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면 어디에서도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 ‘토마스 무어’ (Moore)는 “사람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기 위하여 온 세상을 여행하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와 그것을 찾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정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 사람의 행복에 있어 가정을 대신할만한 것은 전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즈음 “가정 사역”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가정은 창조주 하나님이 가장 먼저 세우시고 구성하신 조직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나 사회 어떤 단체나 국가를 세우기 전에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교회 생활에 익숙해졌고, 사회생활에 열심을 내지만 가정이 중요하고 가정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역해야 하는 가정 중요한 공동체입니다. 우리네의 가정에는 사랑의 사역이 일어나야 하고, 꿈과 소망이 넘치고 용서하며 관용하는 공동체가 되어야겠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이탈리아가 패전했을 때, 시실리 섬에 산 하나를 두고 두 고아원이 이웃하고 있었습니다. 한 고아원은 연합군과 자매결연이 되어서 시설도 좋고 영양도 좋은 것으로 잘 먹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고아원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뿐 아니라 분유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설과 영양이 좋은 쪽의 아동들의 사망률이 지원도 없고 시설이 좋지 않는 고아원보다 60%나 높았습니다. 이런 일이 생긴 이유를 조사해 보았더니, 전쟁 중에 세 아이를 잃고 실성한 여인이 시설이 나쁜 고아원의 고아들을 자기 자식들로 착각하고 안아주고, 얼러주며, 친자식처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 실성한 어머니는 모든 원생들의 어머니였습니다. 먹는 게 부족하고 시설이 열악해도 아이들은 너무나 행복했고 건강하였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삽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이라는 분을 새롭게 조명해보아야 합니다. 그는 한 마디로 말해서 용서의 사람이었고, 통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야곱이 147세에 애굽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유언하였습니다.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창49:29) 

옛날 아브라함이 부인 사라가 127세에 세상을 떠났을 때에 은 400세겔이나 주고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과 딸린 밭을 사들여 가족의 매장지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과 부인 리브가가 장사되었고, 야곱은 부인 레아를 그곳에 장사지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야곱의 12 아들은 아버지를 가나안 땅,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제 아버지 야곱의 장례가 끝나고 보니, 10명의 형들이 불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과거 11번째 아들이요 동생인 요셉에게 못할 짓을 한 것이 후회가 되었고, 요셉이 자기들을 용서해주었다고 하지만, 이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보니 다시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옛날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고 또 다시 일어났습니다. 형들의 마음에는 요셉이 자기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모든 식구들에게 잘 대우해준 것은 오직 아버지 때문이었고,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려는 심사였지, 결코 자기들을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낯을 생각하여 봐줄 이유가 없어졌으니 반드시 형들에게 보복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동생 요셉의 친절과 관용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죄책감이란 쉽게 죽지 않고 오래 살아서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오는 법입니다. 

형들은 직접 나서다가는 요셉의 노여움을 살 것으로 생각하였는지, 사람을 요셉에게 보냈습니다. 형들은 고센 땅에 살고 있었고, 동생 요셉은 나라의 총리로 왕도인 멤피스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형들은 사람을 보내어 돌아가신 아버지 야곱을 중보자로 삼아 아버지의 유언이었다고 하면서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라고 전하였습니다. 그래도 요셉이 착한 사람이요 믿음이 좋은 사람이기에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면 분노를 억누를 것으로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중보자로 삼아 아버지의 부탁이니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는 마땅히 인정하면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임을 잘 알기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들먹이면서 용서해주라고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라고 하여 자기들의 죄악은 인정합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대로 형들은 자기들의 죄악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잘못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부탁이요 명령이라는 점을 말하고는 다시 하나님과 연관을 지어 믿음이 좋은 요셉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창50:17)고 하였습니다. 형들은 종교적인 연줄로 혈육의 연줄을 강화시키려고 합니다. 이 말을 잘 분석해보면 “우리가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듯이 또한 한 하나님을 믿고 받들어 섬기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을 보아서라도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요셉은 일생 하나님을 잘 믿었고,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란 말로 들어도 겸비하게 순종하려고 하는 요셉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형들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하여 호소하고 있습니다. 

형들은 자기들은 형이라고 하지 않고 종들이라고 부릅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가 있기에 철저히 자기를 종이라고 합니다. 요셉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이 노예라고 말합니다. 철저히 자신을 비하시키면서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요셉은 울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은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한번 용서하여 주었으면 영원히 용서한 것인데, 동생의 용서해주었다는 말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창45:7-8에서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어려운 흉년을 이기고 안정되게 살아갈 수 있게 잘 보살펴드렸습니다. 그러면 동생이 진정으로 형들을 용서하고 받아준 것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형들의 말을 전하려고 보낸 사람이 돌아와서 요셉의 분위기를 전하였습니다. 전령의 말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울었다는 보고였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마음의 안정을 찾고 사람을 보내어 용서해달라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형들이 직접 와서 요셉에게 잘못을 시인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에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0명의 형들이 친히 요셉을 찾아와서 엎드렸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이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먹었지만, 이제는 자신들이 동생의 노예가 되겠다고 자처하면서 잘못을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한 마디로 용서해야 진정한 용서가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형들이 찾아와 엎드려 잘못을 시인하면서 자신들이 종이 되겠다고 할 때에, 요셉은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19-20)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한 말을 들어보면 정말 성숙한 사람이요, 통이 큰 사람이요, 용서의 사람인 것을 봅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스스로를 심판자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요셉도 한 사람의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용서받아야 할 사람인데, 다른 사람에게 복수하겠다고 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화를 복되게 하시고, 지금 눈에 보이는 성공이 성공이 아니며, 지금 당하는 어려움이 단순히 어려움으로 그치지 않게 역사하십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이란 믿음의 사람, 소망의 사람을 연단시키시고 미리 환란을 대비하여 먼저 애굽으로 보내어 사전 준비를 하게 하시고,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직감하였습니다. 감옥의 수감자인데, 총리에 발탁되고, 흉년을 여겨내고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자기의 족속 히브리인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먼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다시 한 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50:21)고 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와 형들을 애굽으로 초청놓고 보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형들과 형들의 자식들을 책임지고 먹이고 살리겠다는 것은 요셉의 변함없는 확신이었습니다. 이제 요셉은 형들만이 아니라, 형들의 가족을 책임지고 먹이겠다고 약속합니다. 

1. 형제간에 용서하십시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형제지간에는 무조건을 용서해야 합니다. 지금도 형님을 용서하지 못하는 아우들이 있습니까? 형님은 사랑할 대상이지 결코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자라날 때에 형님이 고집을 부리고 동생들을 험하게 다루었다고 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고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형제들이 있습니까? 

형제는 누구입니까? 잠언17:17에서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말은 형제 우애를 더해야 합니다. 

벧후1:5-7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는 잘 믿는 것 같은데, 형제 간에 왕래가 끊어지고 우애가 끊어졌다면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의 사람이라고 하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들게 됩니다. 남아프리카의 흑인 인권 운동가인 넬슨 만델라는 백인 정부의 핍박을 받아서 44세에 징역을 받아 27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습니다. 젊음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살았으니 그 마음의 고통과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72세에는 감옥에서 나와서 76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지 못하였는데, 만델라는 하루 하루를 감사하므로 보냈습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감사하고 혹독한 노동에도 감사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 그동안 고생한 것에 이를 갈면서 백인들에게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선언하고 흑백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나라를 만드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증오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 믿음의 사람은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러면서 감옥에 있는 동안에 오히려 준비를 하여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그는 진정 노벨 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용서는 사랑으로 이어져야 참된 용서가 됩니다. 


2. 형제간에 사랑하십시오. 

형제간에 우애가 넘쳐야 합니다.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도 형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형제간에 서로 왕래하고 함께 잘 모이고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시는 부모님은 흐뭇하게 보십니다. 사랑이 안 가는 형제가 있습니까?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미움은 살인입니다. 요일3:15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스탠리 존스과 노만 필 박사의 책에 보면 사람의 마음에 미움과 원한이 있을 때 정신과 육체에 얼마나 많은 해독을 주는지를 실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한 부인이 평소 건강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오른 팔을 올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진단을 해보니 그 여성은 친정어머니와 오랫동안 함께 살았는데, 하도 친정어머니가 잔소리를 많이 하고 간섭을 많이 하기 때문에 한번은 친정 어머니이지만 뺨을 후려 때리고 싶은 생각이 났는데, 참았습니다. 그런데 오른팔이 저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친정 어머니가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시고 간섭하는데, 이 집에 누가 주인으로 사는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오래 계속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오른손이 마비가 되어서 오른팔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참고 참다가 이 딸이 팔 병신이 되었어요. 그래서 목사님 앞에 나와서 상의를 하고 진단을 하고 어머니가 미워서 때리고 싶은 마음이 화근이 되어서 팔이 마비되었으니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 앞에 나가서 회개하고 어머니와 부둥켜안고 화해하고 난 다음 그 손이 팔이 말끔히 나았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도 그렇습니다. 내가 낳은 딸이니 함부로 할 수 있고, 간섭할 수 있다고 하지 마셔야 합니다. 출가한 딸집에 와서 신세지고 있으면, 섬기는 심정이어야 합니다. 


3. 형제지간에는 위로가 넘쳐야 합니다. 

고후5:19에는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형제 간에 사랑하시고 화목해야 합니다. 형제가 모이면 웃음이 넘치고 함께 만난 것으로도 위로를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 요셉은 형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였습니다. 요셉은 간곡한 말로 형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간곡하는 말은 히브리어의 레브라고 하여 ‘심장’이라는 말입니다. 과거 형들을 애굽으로 초청할 때에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식들을 먹이겠다고 하였는데,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는 1천 32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누군가를 용서한 사람이 한을 품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멜른 대학교에서는 276명을 대상으로 연구 조사했는데, 평소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이 감기에 걸릴 확률도 4분의 1 정도로 줄어든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용서하고 화해하면 건강하고 면역성이 강해져서 병도 잘 안 걸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장수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와 화해는 우리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14절을 읽고 마치려고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도 읽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없이 용서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예수 믿으면 예수님 안에서 형제와 이웃을 용서해 주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형제간에 용서하시고, 사랑하십시오. 형제는 위로하고 위로받는 사이입니다. 복된 명절에 형제 우애로 힘을 얻으시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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