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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삼상 25:1, 12: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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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삼상 25:1, 12:23-25)


지난주에 막을 내린 대구 세계육상대회는 기대만큼 세계 신기록이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 운동 경기가 얼마나 인생의 축소판이 되는가를 실감할 수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우리나라에서는 육상이 비인기 종목인데다가 메달 하나 따지 못하니까 열기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그래도 TV나 신문을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히 세계 100m 단거리 선수로 기록 제조기인 우사인 볼트가 결승에서 부정 출발로 실격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어떤 사람입니까? 자고 깨면 기록 단축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실수를 하는 것 보면, 정말 세상에 쉬운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흔히 우리 인생을 가리켜 경주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인생 경주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그 긴 코스 가운데 어떤 이는 초반, 어떤 이는 중반을 어떤 이는 후반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어느 지점에 해당되든지 어쨌든 우리는 모두 2011년이란 인생 구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마치 마라톤 경기에서 42.195 km 코스의 중간 중간에 거리 표시가 있듯이 우리 인생도 삶의 구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인생의 길목에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는 과연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산다면 후회 없는 인생을 마칠 수 있을까? 혹시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이대로 살아가다 보면 나중에 인생을 그르치게 되는 건 아닐까? 꼼꼼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인생을 잘 살아왔으면 잘 살아온 대로, 잘못 살아왔으면 잘못 살아온 대로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장 혼란스러웠을 때 나라를 견고히 세우고 자신은 야인처럼 살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간 사무엘의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1절을 보면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애곡하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누구나 함께 살던 사람이 곁을 떠날 때 얼마나 고통이 크겠습니까? 그런데 자신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고 생의 보람을 준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에게 그는 가히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일대기를 서술한 자서전이 400권이 넘습니다. 그의 어록만도 80권이 넘습니다. 1948년 1월, 그가 어떤 미치광이에 의해 피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 전역에서 그를 따라서 자살한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많이 잡으면 100만 내지 200만 명이고, 적게 잡으면 20만 내지 60만 명이라고 합니다. 

간디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진정 내 마음을 드리는 대상이면, 정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무엘의 죽음은 그 어느 죽음보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더 큰 슬픔으로 다가 온 죽음입니다. 사무엘이 태어난 시대는, 사사시대의 끝자락,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사사요 제사장인 엘리와 그 아들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국운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었을 때였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 어린 나이에 하나님께 드려진 사무엘은 성전에서 지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과 함께 계시면서 그의 말이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무엘의 삶이 이 땅에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가는 그 길이지만, 이 사무엘의 죽음이 우리에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정말 오늘날 이런 지도자가 점점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무엘의 죽음 앞에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애곡하며’ 그의 죽음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충격이었는가를 보여 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사무엘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 그리고 떠나야 할 자리를 분명히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붙들어야 할 몇 가지 교훈을 줍니다. 

먼저 사무엘은 세상 앞에 신앙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삼상12장에 보면 사울이 왕으로 등극하자 그는 사사 직에서 퇴임합니다. 그 때 이렇게 고별사를 시작합니다. 3절상반절을 보면.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여기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 앞에서’의 이 말은 그의 평생 지켜온 인생의 원칙이요 신앙의 모토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데, 라틴어로 ‘코람 데오’(Coram Deo)입니다. ‘코람 데오’는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이 신앙의 모토로 삼은 말이기도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은혜와 기쁨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이 임재의식을 갖고 살면 우리의 본성을 누르게 되고 영성의 삶을 살아가는 능력이 생깁니다. 이 은혜를 누리기 위해 그 중에 하나가 기도의 줄을 놓치 않고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상 소유에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 23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 기도를 안 하는 것을 죄라고 고백합니다. 사무엘이 중보기도하지 않은 것을 죄로 고백하게 된 보다 깊은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①. 사명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삼상 12장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시점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 하나님께 왕을 세워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통치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청이 간절해서 하나님께서 마지못해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정정치가 마감되고 왕정정치가 시작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사무엘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시고자 하였으나 철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민족처럼 왕을 세워 강력한 왕권국가를 세우기 원했습니다. 여기에 자칫 큰 위기가 찾아올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워진 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게 될 위험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민족과 다를 바가 없게 될 위험성입니다. 사무엘은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깊이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본문에 나온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가르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저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일입니다. 특별히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기도 하는 것을 남은 평생의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사사로서 자신의 하던 일은 왕에게 넘기고 자기는 영적 사역에 전념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②.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왕이 세워졌기 때문에 이제 무거운 짐을 벗었습니다. 이제 홀가분하게 자신의 남은여생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무거운 중보기도 사명을 자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 18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이 심히 중하여 유황불로 심판하실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천사들을 확인하러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들은 뒤에 하나님께 간청을 드리게 됩니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인 오십이 있다면 그들을 그대로 멸망하도록 버려두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십이 있으면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니까 오십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45인, 40인, 30인, 20인, 10인으로 그 수를 바꿔 가면 무려 여섯 번이나 하나님께 간청을 드리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집요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조카 롯이 바로 그 성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롯을 유황불 심판 한 가운데 버려 둘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롯이 유황 불 심판으로 죽게 되도록 내버려두었다면 아브라함은 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사랑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사무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중보기도하게 했습니다. 사랑이 중보기도를 쉬는 것을 죄로 여기게 했습니다. 사실 저는 사랑의 빚을 많이 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제가 재수 할 때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깊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밤늦게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교회에 들려 기도하고 집에 오곤 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밤늦게 교회에 기도하러 들어가는데 본당 저 앞에서 제 이름이 크게 불려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무 놀랐고, 크게 당황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저를 지도하던 여선생님께서 저를 위해 그 밤에 눈물로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제 심령에 전해지면서 기도의 문이 정말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늘 문이 그 밤에 크게 열렸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깊이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중보기도가 저를 바꾼 것입니다. 제게 놀라운 은혜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으로 드려지는 중보기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지금도 기도대원들이, 많은 교우들이 저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랑의 빚을 갚을 길이 없어 그분들을 위해 다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보기도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 사랑의 기도가 역사를 일으킵니다. 

성도 여러분! 현대인들이 얼마나 바쁘고 분주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중요한 것은 합니다. 밥 먹는 것이 중요하니까 서서라도 먹습니다. 차 안에서라도 먹습니다. 아파서 병원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하니까 직장 빠지고서라도 병원에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바빠서가 아닙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항상 깨어 기도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 영혼이 살아 약동하고, 하나님이 우리 삶의 현장에 임재하십니다.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것, 이웃을 위한 기도를 쉬는 것을 죄로 여길 정도로 기도를 중요시했습니다. 

2. 뿐만 아니라 사무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했기에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3절을 보세요.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사무엘은 마지막 자신의 사역을 돌아보면서 혹시라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부끄럽게 행한 일이 없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뭐라고 반응합니까? 4절에.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백성 중 그 누구도 사무엘의 비리를 대지 못합니다. 이구동성으로 그의 정직성을 증거 합니다. 사무엘은 한 생을 살면서 자신의 권력을 가지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소유에 대한 자유했습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사람들도 인사 청문회를 거치면서 드러난 일로 당사자는 물론 그를 아끼는 사람들마져 충격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 정말 소유에 대한 만족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소유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욕망을 지닌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욕망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무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높은 욕망, 거룩한 욕망, 의로운 욕망을 위해 살라고 가르칩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이 그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거룩한 욕망을 가지면 추한 욕망이 극복될 것입니다. 

의로운 욕망을 가지면 불의한 욕망이 극복되지 않겠습니까? 선한 욕망을 가지면 악한 욕망을 극복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온갖 추한 욕구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그 유일한 대답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임재 현장으로 서게 합니다. 사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희생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깨달았다면, 우리는 본성에 휘둘리지 않고, 깊은 영성을 소유한 인생으로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몇 주일 전, 어느 가게 앞에서 문득 옛 교인 한 분을 만났습니다. 한동안 열심이었다가 언젠가부터 사라진 얼굴인데 몇 년 만에 마주친 것입니다. 매우 반갑게 악수하며 몇마디 인사를 나누는 중에 알게 된 것이 ‘아, 이분 이 우리교회만 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신앙에서 떠났구나!’하는 사실 이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신앙을 키우며 교회의 여러 일에 봉사도 많이 하던 분이었기에 충격이었습니다. 동시에 주님 앞에서 참 죄송한 생각을 떨 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런 형제, 자매들을 마주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날 따라 “너는 네 양무리를 어떻게 돌보았기에 저렇게 아예 신앙을 버리게 했느냐”하는 책망을 받는 찔림이었습니다. 견딜 수가 없는 통증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목사 맞는가?하는 아픔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분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그분이 누리던 영성의 문을 어느새 닫아 버리고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가는 인간 본성에 돌아 간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목마른 영성과 육신을 쫓아가는 강렬한 본성의 욕구 사이에 치열한 격돌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되는 끝없는 격돌입니다. 술을 엄청 마시며 파괴적인 삶을 살던 분이 예수를 만나 새 삶으로 변했는데 몇 년이 못가 다시 그 술을 따라가는 것 입니다. 말리고 경고했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아내와 갈라질 듯이 아슬아슬하게 살던 한 형제가 놀랍게 교회를 나와 마음을 정하고 행복한 부부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난데없이 거래처에서 일하는 여성과 바람이 나 집을 나가버린 것입니다. 영성을 뒤엎는 본성의 도전이 종종 삶을 파괴하고 인생을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이 교회에 와서 전에 모르던 은혜를 받고 이제는 여기가 자기 생애의 마지막 교회라고 하던 분이 다시 또 교회를 욕하고 목사를 탓하며 또 다른 교회를 찾아가는 뒷모습들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제 보면 언제나 교회 탓이나 목사탓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씀의 은혜와 감동을 통해 큰 기쁨을 체험하며 본성을 누르다가 영적 긴장과 훈련이 떨어지면, 다시 옛 성격으로 돌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결론은 한 가지 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야 합니다. 코람데오!! 하나님 임재 앞에 내가 서 있다는 이 자세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 서서히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밀려 사는 초라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프랑스의 샤를르 푸코라는 군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하라 사막에 들어가 선교하다가 원주민이 쏜 총에 순교했습니다. 그분이 쓴 <사하라의 불꽃>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까? 그런데도 왜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적인 삶 속에서 성경과 전혀 동떨어진 행동을 합니까? 그 순간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는 만큼 그 사실을 내가 인식하며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경건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들에서 죽였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쌓인 가인에게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철저하게 경외하던 다윗은 남의 아내를 데리고 궁중의 밀실에서 통정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욕정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애굽에 도망갔을 때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가친척을 떠나는 용단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객지의 까닭 없는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분을 인식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선교와 봉사 그리고 섬김의 행위를 아름답게 행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 앞에서, 욕정 앞에서, 두려움 앞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사무엘!! 격동 어린 시대에 태어나 일생을 변함없이 주의 은혜로 살았던 사람!! 그의 손을 통해 왕을 두 번이나 세웠던 사람!! 세상에 어떤 누구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했던 믿음의 사람!! 그가 그립지 않습니까? 사무엘, 그는 한생을 하나님의 임재 의식 앞에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무릎을 꿇었고 세상의 숱한 소욕 속에서도 자유 했습니다. 

나는 오늘 인생의 경주장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느끼며 살아갑니까? 우리가 큰일을 하든지, 작은 일을 하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갖고 날마다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부활의 능력을 덧입는 영성의 소유자로 이 시대를 향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이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과 같은 이 시대의 인물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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