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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도나무의 교훈 (요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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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의 교훈 (요 15:1-11)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 날 밤에 하신 설교입니다. 이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꿈꾸고 계신 교회의 모습, 예수님께서 꿈꾸고 계신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 꿈을 말씀하시되 포도나무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열매가 풍성하게 맺힌 포도나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를 비유로 교훈하신 배경에 대해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었던 방에 밖에 있는 포도나무 가지가 창문 사이로 들어온 것을 보시면서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달빛이 비취는 포도원을 내다보시면서 말씀을 하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당시 창문에 새겨져 있는 포도나무를 상상하시면서 말씀하셨을 것으로 상상했습니다. 또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일행이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가시는 도중 포도원을 보시면서 말씀하셨을 것으로 추측을 했습니다. 

一. 포도나무 비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에는 특별히 예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시면서“나는...이다”라고 말씀하신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나는 세상의 빛이라”“나는 생명의 물이라”“나는 선한 목자라”“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보편적이고 쉬운 말들입니다. 누구나 알기 쉬운 빛, 물, 떡, 목자, 나무 등 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이 모두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들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없으면 절대 안 되는 것들입니다. 인간은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고, 빛이 없어도 그렇고, 먹을 양식이 없어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포도나무 가지라면 줄기가 없으면 그 가지는 곧 말라 죽게 됩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하셨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서 끊어져 나가면 곧 말라버리는 것처럼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는 이처럼 절대적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가치에 대해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하나의 액세서리 정도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영적인 소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 바울 사도는 고백하기를“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그가 살아가는 삶 자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삶의 목적이며, 자기 존재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뺀다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의 비유가 바로 이러한 절대적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 곧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이 있고,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삶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공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행복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근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하셨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들의 관계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떠나면 마귀의 자식이 되는 것인데, 마귀의 자식으로 무엇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죄의 종으로 무엇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26절에는 예수님을 떠난 삶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이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삶은 성공 같으나 실패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삶은 행복 같으나 불행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2장 1절~2절 말씀에“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 없는 지식, 예수님 없이 쌓아둔 물질, 예수님 없이 얻은 권세, 이는 모두가 다 허무한 것으로 끝날 뿐입니다. 

이 진리를 깊이 깨달은 솔로몬은 전도서 1장 2절~3절에 고백하기를“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한 때는 하나님을 떠나 더 나은 행복을 찾아 다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의 권세를 이용하여 원한 없이 재물을 모았습니다. 왕의 절대적인 권세를 이용하여 원한 없이 세상 향락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에게 남은 것은 허무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마치 포도나무 줄기에서 잘려나간 가지와 같습니다. 줄기에서 잘려나간 가지는 곧 불태워지듯 그리스도 없는 삶은 영원한 멸망 지옥의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二. 맺혀야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모든 과일나무가 다 그렇듯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포도나무에 비유된 우리들은 어떤 열매를 맺혀야 하겠습니까? 

1. 내 자신의 내적 변화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먼저 변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신의 내면적인 변화를 열매에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24절 말씀에“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이란 가장 소중한 열매이기에 성령의 열매 가운데 첫 번째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가 첫 번째 이지만 사랑은 모든 열매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나머지 모든 것이 다 사랑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에“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3절에“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살게 내여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하셨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이민해서 살고 있는 한인 2세가 명문 콜롬비아대학 의과대학에 지원을 했습니다. 공부도 잘해서 SAT 시험에 만점을 받았습니다. 집안 형편도 부유해서 무난히 합격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불합격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불합격 사유란에 기록하기를“귀하의 성적은 아주 우수합니다. 가정형편이나 여러 조건들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서류 어디를 보아도 헌혈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헌혈한 경험도 없는 귀하가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귀하는 의사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생명을 다루는 의사될 자격이 없듯, 사랑의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에게 있어서도 사랑이 없으면 그의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요한일서 4장 7절~8절에는“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10절에“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계명이라 하면 너무 광범위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얼른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성경 66권의 방대한 말씀의 계율을 한 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서로 사랑하려면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한 예로, 퇴근한 남편이 양말을 벗을 때 자꾸 뒤집어 벗어냅니다. 아내가 뒤집힌 양말을 씻을 때 그 양말을 바로 뒤집으면서 이를 두고 짜증을 내며 아내의 속까지 뒤집힐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바에야 그 양말 바로 뒤집지 말고 뒤집힌 그대로 씻으면 됩니다. 그 다음은 남편이 알아서 할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각자의 독특한 개성이 있고, 습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 일뿐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표준으로 여기고 그 잣대에 의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착각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 까닭에 갈등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때문에 가장 소중한 사랑을 잃게 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생산적인 일입니까? 진리가 아닌 것 때문에 진리가 손상을 입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민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정한 관습을 예수님께서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안식일을 바로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노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것을 노동이라 명시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 스스로 정한 규율에 위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관례 일뿐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정한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하여 주님을 미워했으며 끝내 죽였습니다. 자기들의 습관을 따르지 않는다 하여 성경 최고의 계명인 사랑의 법을 어겼습니다. 사람을 살려야할 사명을 받은 종교 지도자들이 도리어 사람을 죽였습니다. 가장 정성스럽게 주님을 섬겨야할 사람들이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왜요? 자기들의 습관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지키려고 진리를 짓밟았습니다. 비 본질 까닭에 본질을 버렸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생각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까닭에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고, 교회의 화평이 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성경 최고의 진리인 사랑의 법을 어기고 맙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아니면 상대방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요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단정하면 그것은 범죄의 시작입니다. 이에서 판단과 미움이 싹트고, 분쟁이 야기되고, 단결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된 적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주된 싸움의 대상이 무엇입니까? 험한 세파입니다. 죄악입니다. 우리들의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을 불신앙으로 사로잡고 있는 사탄입니다. 이러한 적들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 우리들은 사소한 것 까닭에 힘을 분산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12절에 당부하시기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므로 주안에 거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귀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2. 외적으로 영혼구원의 열매입니다.

영혼구원에 대하여 하나님은 매우 시급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디모데후서 4장 1절~2절 말씀에“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냥두면 그 영혼이 지옥의 불 못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 구원은 시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전략은 항상 내일로 미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이라 하시는데 사탄은 자꾸만 다음으로 미루도록 미혹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부흥사였던 D.L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토록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벙어리라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벙어리로 태어나는 것을 커다란 재난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그 사실에 큰 슬픔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벙어리가 많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교회에는 그러한 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지 못한다. 그들은 정치, 예술, 경제, 과학, 유행 등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곧잘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는 벙어리이다.” 복음증거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무디의 심정을 밝힌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하되 끊임없이 전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찾으시는 포도나무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 열매를 많이 맺을 때 포도나무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그러한 성도들을 사랑하시며,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四. 열매 맺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본문 4절에“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자기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하셨습니다.“붙어 있다”는 것은“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4절~10절 말씀 가운데“거한다”는 말씀이 9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거한다”는 것은“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곧 삶의 열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의 순종을 가리킵니다. 본문 10절에“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하셨습니다. 계명이란 어떤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 계명이란 사랑입니다. 본문 9절과 12절에“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한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하셨습니다.

계명의 순종은 곧 사랑의 실천이라 하셨습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곧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내적 열매인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는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그 영혼들이 감동을 받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五. 열매 맺음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곡식이나 과일 나무에 있어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우량종자라 하여 농부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됩니다. 우량종자 잘 보호하고 육성합니다. 번식을 시킵니다. 좋은 열매 많이 맺는 포도나무 가지와 같은 성도에게도 하나님의 마음은 이와 같습니다. 

1. 하나님의 보호가 있습니다.

열매를 잘 맺으면 농부에 비유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보호하심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본문 2절에“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하셨습니다. 깨끗케 하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봄이 되면 농부들은 포도나무의 가지의 묵은 껍질을 벗겨줍니다. 그 껍질 안에 벌레들이 기생하여 포도나무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를 깨끗케 하신다는 것은 관리하며 보호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농부들은 언제나 좋은 열매 맺는 과일이나 곡식은, 다음해에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깊은 관심을 기울여 그 농작물을 특별히 관리하게 됩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 말씀에“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면 나를 해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면 부족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아름다운 열매 맺는 심령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본문 8절에“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은 영광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삶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잠언 4장 8절에“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하셨습니다.

미 우주선 패스파인더호의 화성착륙은 “천문학의 승리”였습니다.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세운 과학자는 요한 케플러(1571-1630)라고 합니다. 그는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단순히 원형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초점으로 타원의 궤도를 그린다는 이론을 폈습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말하기를“천문학자는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연이라는 책에서 무언가 찾도록 허락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일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춘 삶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의 영광이 있습니다. 

3. 기도의 응답이 있습니다.

본문 7절에“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하셨습니다. 기도 응답의 조건이 열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농부가 좋은 열매 맺는 과일나무를 사랑하며 돌보듯, 아름다운 열매 즉 심령의 열매와 영혼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도를 사랑하셔서 이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 넘치는 행복이 있습니다.

본문 11절에“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하셨습니다. 기쁨이 무엇입니까? 행복입니다. 땅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순간적입니다.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의 네로 황제는 그가 살았던 왕궁의 복도 길이가 1마일(약 1.6km)이나 되는 호화찬란한 궁성이었습니다. 집안의 모든 벽은 상아와 자개로 장식되었고, 천정에는 특별한 샤워장치가 되어 있어서 찾아오는 손님에게는 향수가 이슬처럼 포근히 뿌려지도록 했다고 합니다. 네로가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은 30만 달러가 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사용했던 노새와 조랑말은 은으로 장식된 신발을 신겼습니다. 그가 한번 출타할 때면 천 명 정도의 군사와 마차가 위를 따랐고, 네로가 낚시를 할 때면 금으로 만든 낚시 바늘을 썼다고 합니다. 값비싸고 좋은 옷이 너무 많아 한 번 입었던 옷은 두 번 다시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부귀영화의 극치를 누리며 살았던 네로는 행복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네로는 하무와 공포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7절에“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하셨습니다. 

행복이란, 헬라어로“유다이모니아”라고 합니다.“다이모니아”란“하나님”이란 말이며“유”란“같이”라는 말로“하나님과 같이”란 말입니다. 즉 하나님과 같이 있을 때에 비로소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한 자리에서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채워도 참된 행복은 누릴 수 없습니다. 참된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마치 포도나무 줄기에 가지가 붙어있듯 주안에 거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고백처럼 하나님과 함께하지 아니한 모든 것의 결과는 헛된 것뿐입니다.“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도서 1:2~3)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자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처럼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무엇을 해도 결국은 헛수고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된 보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생활의 푯대를 삼고, 주님의 말씀이 내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므로 영혼구원을 힘써야 합니다. 듣던지 아니 듣던지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맺혀야할 삶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이 기도하면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이 행복하도록 참된 만족과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이러한 축복이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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