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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창 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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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창 3:1-13)

어느 기독교 잡지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페루의 어떤 주술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습니다. 이 주술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상당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능력이 컸냐면 그가 누구를 저주하면 저주받은 사람이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엄청난 능력, 물론 이것은 악령에 의한 능력이지요. 그런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느냐. 그가 어렸을 때 친구들이 그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네가 영력을 갖고 싶으면 개와 교미를 하라. 그러면 영력을 갖게 될 것이다.’ 오늘 설교는 15세 이상 관람 가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요. 

하지만 이 사람은 들은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개와 교미를 했는데 그 이후부터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음성을 따라 하면서 영력을 소유한 주술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그 속에 있던 귀신이 떠나가고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한다는 얘기냐. 어떻게 이 사람이 이런 몹쓸 짓을 해서 마귀의 영력을 소유하게 됐다는 말이냐. 

몇 년 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이라는 나라에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영화 로드 오브 워라든가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보면 이 내전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내전을 일으켰던 RUF라는 단체가 있는데 이 단체는 어린 소년들을 전사로 끌어들였습니다.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사이의 어린 소년들. 이 아이들이 어떻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RUF는 이 아이들을 데려다가 몹쓸 짓을 시켰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람을 죽이게 만들고 심지어 자기 부모를 죽이게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마약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가슴에 RUF라는 글자를 칼로 새겨서 흉터를 남겼습니다. 그 결과로 이 아이들이 눈에 뵈는 게 없는 살인자로 변신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 십만 명에 달하는 어린 소년들이 RUF 전사가 돼서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이후에 내전이 끝나고 RUF가 해산해서 이 아이들이 집에 돌아갔는데 마음속에 남아있는 후유증을 치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례에서 인간이 악한 길로 빠지게 하는 데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나쁜 짓을 하게 하면 그들이 선한 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을 꺾어 버리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차단한다는 것입니다. 왜 마피아 같은 범죄 단체가 그 단체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살인을 명령하느냐. 악한 짓을 하게 함으로써 악한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입회식인 것입니다. 

왜 윤락 여성들이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원치 않는 삶을 살지만 그 삶을 떠나지 못하느냐. 왜 빠져나오지 못하느냐. 그 이유는 스스로를 더럽혀진 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깨끗해 질 수 있다는 믿음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키지 않아도 그 삶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것도 나쁜 일이지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쁜 짓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더 나쁜 것입니다. 그것은 남의 영혼을 실족시키는 것이고 선한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 드렸던 페루의 주술사도 개와 몹쓸 짓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쾌합니까. 여러분이 들으시는 것도 불쾌한데 본인은 어땠겠습니까. 그러나 본인도 자기가 용납할 수 없는 흉한 짓을 하고보니까 이제는 스스로를 흉한 존재로 여기게 되고 그 길로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소위 ibm-이미 버린 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니까 악한 영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어보신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의 벗었음을 누가 너에게 고하였느냐''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3장을 강해할 때 이 구절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물어보셨어요.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너에게 고하였느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나무 뒤에 숨었던 이유는 자기들이 벌거벗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인데 그럼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벌거벗지 않았다는 얘기냐. 그때도 벌거벗었어요. 그러나 그때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을 보면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그때도 이미 벌거벗었어요.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자기 자신의 벌거벗음을 알게 되고 부끄러워하고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은 것입니다. 숨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부르셨어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리고 하나님이 물어보시기를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너에게 고하였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의 진노와 안타까움을 담고 있습니다. ‘너의 벌거벗음을 내가 몰랐던 게 아니다. 네가 벌거벗었을 때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그런데 누가 네가 벌거벗었다고 말해줌으로 나로부터 숨게 만들었느냐?’ 이런 질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담이 벗었다는 사실보다도 그가 벗었다는 것을 아담에게 고하는 것이 더 나쁜 일이었어요. 왜냐하면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피해서 숨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것도 나쁘지만 자기를 나쁜 사람으로 단정 짓는 것은 더 나쁩니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순간부터 사람은 낙심하고 회개하지 못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부득이 더 나쁜 길로 빠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귀의 역할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가 그저 나쁜 짓을 하도록 유혹하는 자라고만 생각하는데 그것보다도 더 무서운 계략이 있어서 마귀는 사람을 꼬여서 나쁜 짓을 하게 만든 다음에 나쁜 자라고 그를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더 무섭습니다. 나쁜 사람이라고 사람을 정죄하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그 사람은 자기를 부끄럽게 여기고 자기를 추하게 여기고 자기 자신을 나쁜 자라고 단정 짓고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피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숨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아담처럼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나님은 빛이신데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숨을수록 어둠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원하는 것입니다. 

이 시에라리온의 끌려가서 온갖 흉악한 짓을 했던 소년들이 내전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정상적인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만 흉터가 남아있는 게 아니고 그들 맨가슴에 흉터가 남아있어요. 칼로 RUF라고 흉터를 남겼기 때문에 이 아이들이 과거에 어떤 짓을 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가슴을 드러내지 못하고 또 남들이 자기의 과거를 아는 것뿐만이 아니고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과거에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가를 생각하면서 이 아이들이 엄청난 정신적인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이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서 서방세계의 성형외과 의사들이 흉터 제거수술을 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흉터가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고 수술의 흔적은 남지만 적어도 그 글자가 지워지면서 이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회복하고 자기 자신을 흉하게 여기지 않고 다시 정상적인 삶에 동화할 수 있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 3장에도 일단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그대로 방치하실 수가 없어서 21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이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기 위해서는 짐승을 잡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됩니다. 인간의 벌거벗음을 감추기 위해서 피 흘림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세상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 않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냥 아담과 하와에게 ‘나는 괜찮으니까 너희도 스스로 괜찮게 여기라.’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너희가 벌거벗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개의치 않을 테니 너희도 개의치 말아라.’ 이렇게 하실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부끄러워하는걸 아시고 그들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아담에게는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것이 더 이상 괜찮지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옷을 해 입혀주시지 않으면 스스로 옷을 해 입을 사람들입니다. 

7절을 보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이것이 인류 패션의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괜찮게 여기시더라도 사람은 스스로를 괜찮게 여기지 않아요. 그래서 부끄러워하고 자기 스스로라도 옷을 만들어서 자기를 가리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데 사람의 죄를 그냥 사면하실 수도 있지 않겠느냐. 우리나라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소위 국민 대통합을 명분으로 무엇을 합니까. 교통법규위반 ․ 면허정지 ․ 범칙금 이런 것을 다 사면해 주지 않습니까. 대사면. 그때가지 기다리면 범칙금 ․ 면허정지 다 용서받을 수가 있는데 하나님도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느냐. 그냥 인류의 죄를 없던 걸로 하자! 없는 걸로 하자! 대사면! 끝! 하나님이신데 왜 그렇게 하실 수 없을까. 그러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게 죄인에게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미 스스로를 추하게 여기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에게 ‘괜찮아. 나는 괜찮으니까 너도 괜찮아.’ 라고 말씀하신다고 그게 통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가 그 아들을 맞아준 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냥 맞아주고 안아주고 입을 맞춘 것뿐만이 아니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혔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냥 맞아준 것뿐만이 아니에요. 아들이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그 유산을 다 탕진하고 입을 옷도 없고 신도 없이 맨발로 거지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아버지가 그 아들을 그냥 맞아주는 게 아니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라고 했습니다. 

이 제일 좋은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의 벌거벗음을 감춰주는 의의 옷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왜 목사가 주일 설교를 할 때 가운을 입느냐. 사실 저는 저에게 잘 어울리기 때문에 입습니다. 만약 어울리지 않았다면 옛날부터 그냥 정장을 입고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가운이 저에게 어울려요. 키가 커 보여요. 그러나 그건 개인적인 이유이고 여기에는 신학적인 이유가 있지요. 하나님의 의의 옷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의의 옷을 의지하여 이 자리에 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왜 아버지가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혔느냐.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부끄럽지 말라고. 자기 아버지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식 치고 부모가 대견스러워하는 자식이 되고 싶지 않은 자녀가 어디 있습니까. 어느 자녀가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 앞에 초라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있기를 원하겠습니까. 얼마나 아버지가 민망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얼마나 본인이 민망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힌 것이고 또 아버지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잃어버린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저는 사회봉사하는 분들의 정말로 중요한 사회봉사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옷을 입히는 것이든 먹이는 것이든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마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제일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의 확신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신앙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떡을 주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의 벌거벗음, 그 마음의 수치심, 이것은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의의 옷으로만 감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로 하여금 나는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하기 위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힌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과거와의 단절을 가져다주기 위한 것입니다. 과거와의 단절. 죄가 이 아들을 다스릴 그 과거, 부끄러운 과거, 과거의 실패, 수치, 여기로부터 단절을 가져오기 위하여 옷을 내어다가 입힌 것이고 또 죄가 인간에게 끼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죄는 용서를 받았더라도 죄의 기억이 남아있고 죄가 나에게 끼친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어요. 그것을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인간에게 끼친 권세보다도 하나님의 권세가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는 것입니다. 또 이제는 종이 아니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힌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벗었음을 우리에게 고하는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걸 고하는 이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어보신 것입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하나님이 고하시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의 벗었음을 여러분에게 고하는 이가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벗은 몸을 덮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에요. 그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우리에게 증명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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