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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으로 성숙한 자 (히 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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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 성숙한 자 (히 5:11-14)

예배당 뒤에 작은 텃밭에 보니까 집사님이 배추를 심어 놓았습니다. 새벽기도회가 끝나고 집에 가기 전에 해가 나지 않은 시간을 이용해서 몇 번 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추석을 지나고 와 보니까 배추가 놀랄 만큼 자랐습니다. 권사님이 겨울에 김장해도 되겠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 신비롭습니다. 수분을 적당히 흡수하고, 적절한 햇볕을 받으며 시기에 맞춰서 자라나서 농부에게 기쁨을 줍니다. 

비단 식물뿐이겠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을 통하여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고, 적당한 가르침도 받고, 세월이 흐르면서 성장해갑니다. 그런데 식물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키도 자라가지만 무엇보다도 그 정신이 자라가야 정상입니다. 인간의 성장에는 키와 정신이 함께 자라가야 하는 올바른 성장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성숙>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간이란 성장만 이루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고 성숙을 이루어야만 훌륭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장만 이루고 성숙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마치 겉잎만 무성하게 자라고 속에 알을 배지 못한 배추와 같은 것입니다. 텃밭에 심겨진 배추가 성장은 잘 하고 있습니다만 나중에 그 속에 노란 알이 차고 정말 쓸 만한 성숙한 배추가 되느냐가 문제이거든요. 그러므로 식물이든 사람이든 성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성숙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성장해 가고 있습니까? 성숙해 가고 있습니까?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고 상대방의 말대로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되면 자기의 견해를 변경 할 용의가 있고 자기 계획을 조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지적성숙>이라고 합니다. 또 사람이 성숙할수록 말도 없이 무조건 토라지거나 도망하기보다는 자기의 불만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행여 자기에 대한 비판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을<정서적 성숙>이라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마음을 열고 어느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만나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우정관계를 잘 맺는<사회적 성숙>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소위“낯을 가린다.”는 말로 흔히 피해가려고 합니다만 말하자면<사회적 미숙아>입니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일수록 도덕적으로도 성숙합니다. 어린아이의 도덕은 보통 본능적이고 비이성적입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가면서 자기중심을 벗어나 이타주의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도덕적 성숙>의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지적으로 성숙하고,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사회적으로 성숙하고, 도덕적으로 성숙하게 되어있습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성숙한 한 인격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냥 하루아침에 어른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UCLA대학의 심리학 교수인[로저 고울드(Roger Gould)]박사에 의하면 한 사람이 성인이 되기까지는 7단계의 발달과정을 거친다고 했습니다. 도망의 시기 - 탐색의 시기 - 투쟁의 시기 -  회의의 시기 - 불안의 시기 - 회고의 시기를 지나면서 비로소 한 인간의 성숙의 시기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가 언제냐 하면 50세 이상이 되어서야 나를 알고 나와 너의 관계를 알게 되는<성숙의 시기>에 접어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 의하면 50세가 안 된 사람은 아직 사회적으로는 미성숙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인간이 성숙한 인격체가 된다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자,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간의 성숙에 대한 이론이라면 오늘 여기에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더 하려고 합니다. 바로 오늘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또 하나의 성숙입니다. 이른 바<영적 성숙>이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 된 히브리서는 박해를 피하고 편안한 인생을 즐기려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유대인성도들에게 기독교신앙의 확실성과 위대성을 확신시켜주기 위해서 기록된 편지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영적 성숙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책망하며 쓴 글입니다. 아울러 오늘 우리에게도 올바른<영적 성숙>을 이룰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의 미성숙 상태를 어린아이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일 때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까지도 부모가 돌봐주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장성하여 성인이 되면 부모의 도움 없이 성인이 먹는 음식을 먹고, 어려운 일들을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습득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이라는 것도 처음에는 미숙한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배우고, 깨닫고, 경험하면서 장성한 신앙인이 되면 성숙하게 되고 마침내는 남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위치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대로 된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야지 그렇지 못해서<기형적인 성장>에 머물러 있다면 그 문제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근심을 끼치게 하는 동시에, 몸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에 누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나이도 있고, 신앙생활한지도 오래인데 아직도 영적 어린아이를 벗어나지 못해서 젖병만 입에 물고 사는 성도들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다른 것은 도무지 먹지를 못합니다. 언제든지 아주 쉽게 꿀꺽꿀꺽 마실 수 있는 젖병에 든 우유 외에 조금의 단단한 것만 들어가도 소화 불량이 되고 설사를 합니다. 

가령 칭찬은 좋아하는데“정직한 십일조를 철저하게 해라!”,“무슨 일이 있어도 본 교회에서 주일성수하라!”그러면 이게 딱딱한 음식이 되어서 그만 믿음에 소화불량이 걸립니다. 그래서 기분 나쁘고, 더 삐딱하게 나가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조금만 어려움이 오고, 시험이 오면 넘어져서 아예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갓 시작한 초 신자라면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본문 12절에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 믿은 지 일,이년도 아닌 사람이 그렇다는 얘깁니다. 아무리 예수를 몇 십 년 믿으면 뭐합니까? 아직도 영적으로 미성숙하여 젖병 물고 있는 어린아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 먼저 항존 직분 자를 비롯한 직분 자들로부터 모두가 자신들을 깊이 한번 돌아봐야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보십시오. 젖병을 물고 있는 어른,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는 성인,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성인 아이, 상상이나 가십니까? 상식적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기 시작해서 오늘 본문 말씀처럼 때가 오래되어 가면 우리 속에 있는 미개한 신앙이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 신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올바른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 교회공동체에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 직분자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안 되면 젖병을 물고 있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말입니다. 

아기들이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엔가 아무나보고“엄마, 아빠”라고 합니다. 그때는 구별능력과 인지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대로 된 아빠와 엄마를 구별하게 됩니다. 성장하면서 인지능력도, 구별능력도 성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연조는 깊어 가는데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신앙적 구별능력도 없고, 옳고 그름의 인지능력과 판단능력이 없어서 조그마한 일에도 쉽게 시험에 들고, 매사를 어린아이 수준에서 상상하고 혼자 대본을 쓰고 앉아서 사건을 만들고 있다면 이야말로 정말 우스운 모습의<성인아이>입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이 누구 신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몸집은 비대한데 하는 짓은 어린아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치한 신앙의 삶을 산단 말입니다. 오늘 성경대로“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어 있으니 이게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젖을 떼고 단단한 것도 먹을 수 있는 영적 성숙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날 저희 아들 녀석이 그럽니다.“어머니, 아버지 때려서라도 저한테 악기 배우게 하시지 그랬어요!”사실 철든 게 아닙니다. 이제 와서 음악이 하고 싶은데 잘 안되니까 괜스레 하소연하는 겁니다. 가르치고 싶어서 권유했지만 자기가 싫다고 하지 않았던 거거든요. 그리고 본인이 싫다는 걸 때리면서까지 가르치고 싶지는 않았고요. 

그렇습니다. 잠시 싫어도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다 유익이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단단한 음식이란 신앙 생활하면서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영양제입니다. 받아먹으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들으면 보약이 되는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이게 싫어서 늘 도망 다녔습니다. 귀를 닫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직도 젖을 떼지 못한 채로 신앙 생활하는 미성숙자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수염이 난 어린아이입니다. 몸은 어른인데 유모차를 타고 젖병을 입에 물고 있는 영적 미숙아입니다. 이제는 만성이 되어서 신앙에 자극도 되지 않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본문 11절에“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그랬습니다. IQ가 모자란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권면이 잔소리로만 들리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다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 자는 게 아닙니다. ‘나는 저 소리 듣기 싫다!’는 표현입니다. 
영적으로 미숙하여 이렇게까지 둔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제발 입에 물고 있는 젖병을 떼고 성숙한 어른으로 살라고 충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젖병을 입에 물고 있는 영적 미성숙자의 모습은 아닙니까? 성인아이를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신앙에 유익한 말씀들을 받아들일 줄 아는 그래서 이제는 아무리 단단한 음식이라도 먹고 소화시킬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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