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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물의 사람 예레미야 (렘 9: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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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사람 예레미야 (렘 9:17-26)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밤을 새워 울며 가슴을 앓던 눈물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죄가 아니라 이웃과 사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민족의 영광과 번영을 예고하는 일을 담당했다면 얼마나 즐겁고 신이 났을까요?  하지만 선지자들의 사명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런 즐거운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멸망과 회개를 촉구하는 고통스러운 임무를 맡은 슬픈 선지자였습니다.   

물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고 위로하실 것을 전제한 고난을 예고했지만 멸망을 선포하는 선지자는 마음이 괴롭고 슬펐습니다.   선지자의 애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도리어 조롱하고 비웃었으며 매질을 하고 물 없는 진흙 구덩이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때 예레미야 외에도 선지자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메시지도 받은 적이 없었던 그들의 입에서는 ‘우리는 안전하다 평안하다’ 하며 백성들을 우선 안심시키려는 거짓 평안의 복음만 선포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때 이미 유다 왕국의 심판이 분명하게 예고되었지만 백성들은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 임금이 죽고 아들 므낫세가 뒤를 이었는데 므낫세는 선대의 어떤 왕들보다 더 악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므낫세는 부친 히스기야의 정책과는 정반대로 산당을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으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몰렉을 섬겼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제단을 세웠고 점쟁이들을 불러 길흉화복을 점치는 일도 서슴치 않고 저질렀습니다.   왕의 타락한 정책을 반대하는 의로운 사람들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을 온통 피바다로 만들었던 가장 악한 왕 중의 왕이었습니다.   

므낫세가 죽고 아들 아몬이 즉위2년 만에 신하들의 손에 죽은 뒤 8살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 요시아 임금은 므낫세와 아몬과는 달리 다윗의 길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유다 왕국의 마지막 의로운 왕이었습니다.  요시아 임금은 선대 왕들이 세운 우상들을 철폐하고 강력한 종교개혁 정책을 펼치며 오랫동안 지키지 않았던 유월절을 회복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요시아가 왕이 되었을 때 왕족이었던 선지자 스바냐가 왕족들과 국가 지도자들의 죄를 책망하였고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며 회개하고 돌아오라 강력하게 촉구하였습니다.  

요시아의 적극적인 종교개혁 정책은 선지자 스바냐의 외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한 사람 예레미야는 요시아가 왕이 되고 13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스바냐 선지자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하였습니다.  8세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여호와 신앙으로 나라를 이끌어가려고 힘썼던 요시아에게는 그래도 이런 신앙의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평가하는 역대기에는 요시아 시대에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으로 말하지만(대하34:33), 우리가 읽고 있는 예레미야서를 보면 그들의 돌아옴은 거짓이었다고 밝힙니다(렘3:10).   요시아 임금의 종교개혁 정책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전체적인 영적 분위기는 이미 되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요시아 왕은 유다의 왕들 중에 보기 드물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었지만 의로운 왕 홀로 나라를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외롭게 의로운 길을 걸어야만 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유다 왕국의 비참한 최후를 예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요시아의 의로움을 보시고 그의 시대에는 유다의 비참한 멸망을 눈으로 보지 않고 평안히 무덤에 들어갈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요시아 임금은 왕국의 멸망을 눈으로 보지 않고 애굽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여 왕들의 묘실에 들어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아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가를 지었고 모든 백성들이 이 슬픈 노래를 불러 요시아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대하35:25).  요시아 임금이 죽은 후 즉위한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등 후대의 왕들은 한결같이 타락한 왕들이었습니다.   시드기야 임금 11년 5월에 드디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되고 왕자들은 왕이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왕은 두 눈이 뽑혀 쇠사슬에 매여 끌려갔고, 왕족들과 귀족들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시기에 자기 민족이 당하는 아픔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해야만 했던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신문과 TV 화면으로 보아 알고 있는 것처럼, 8월초 런던과 지방 도시들에서 발생한 폭동에 영국의 10대 청소년들이 가담하였습니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저소득층 가정 아이들만이 아니라 번듯한 가정의 아이들도 군중심리에 편승하여 가게를 약탈하고 불을 지르며 경찰차를 파괴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폭행하였습니다.   무질서와 폭동의 와중에 어떤15세 소년이 13세 여자아이의 블랙베리폰을 빼앗고 교회 근처 골목에서 성추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남자아이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 간호사였는데 언론에 나와 아들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 집은 결손가정도 아니고, 기독교적 가치를 지닌 좋은 가정이었는데, 아이가 빗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며 “너무 부끄럽다”고 울먹였다고 합니다.

이번 폭동을 두고 사회 전문가들은 정치가들의 경제정책 실패로 실업률이 증가하고 복지혜택마저 줄어들어 당장 살 길이 막연해진 빈곤층들의 불만이 터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와 함께 ‘병든 영국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인 청년층들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 대한 개인의 불만, 집단의 불만을 그런 방식으로 터뜨렸다고 말합니다.  정의와 공의가 실종되어 부를 가진 특권층의 탐욕이 최고조에 달하고 사회에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하며 실업과 부패, 빈부격차 때문에 계급상승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청년들의 좌절이 심각하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엔가 이와 비슷한 상황이 소개되어 있지 않았던가요?   이사야 선지자가 신랄하게 고발하였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책망하신 유다 왕국의 멸망 직전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무시되고 오직 인간의 탐욕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예레미야서의 상황은 이사야의 때보다 더 악화된 상황이었습니다.   

이사야보다 100여년 후에 활동한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직전부터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완전히 무너진 국가적 위기의 때를 살았습니다.   이사야가 그렇게 목이 터지도록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외쳤지만 유다 백성들은 겉으로는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멸망의 길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처럼 타락의 길을 걸으며 멸망의 구덩이로 빠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날마다 눈물로 호소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무려 100번 이상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영국사회에 예레미야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영국교회는 오래 전에 교회를 떠나버린 청소년 세대와 대학생 청년층 젊은 세대들에 대한 신앙교육이 거의 불가능해진 상태입니다.  영국교회가 이런 시점에서 어떻게 젊은 세대들에 대한 영적 교육을 담당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영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자 교회의 위기입니다.   

오늘날 영국사회의 문제가 경제적, 정치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강물처럼 흐르게 해달라고 눈물로 외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영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고 사람의 지혜와 인간의 용맹과 경제적 부를 자랑했던 죄를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은 영국 뿐 아니라 우리 나라와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자랑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지혜나 인간의 용맹이나 재물이 많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닮아 자비와 공평과 정직하게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때나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시행되어야 할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이 영국 땅에 하나님을 향해 눈물로 회개하는 정직한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위기상황에 서로를 탓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고통분담을 부담스러워하며 참을성이 부족하고 무질서한 시민들의 격한 행동을 탓하고 있으며 시민들은 무능한 정부를 탓합니다.  이것 또한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나라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함은 마음이 부싯돌처럼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울음은 보통 약한 자들에게서 나옵니다.   잘 우는 사람은 아무래도 강한 쪽보다는 약한 쪽입니다.  어른보다 어린아이들이 더 잘 울고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더 잘 웁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 더 잘 울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하며 헤어나올 수 없는 문제에 빠진 약자들에게 눈물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지 않아도 될만큼 강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끝까지 버티고 자존심 세우며 스스로 강한 척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는 약자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부르짖는 울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완악한 유다 백성들은 울어야 할 때 울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이 없는 완악한 유다 백성들에게 눈물을 가르치십니다. ‘곡하는 부녀들을 불러오고 지혜로운 부녀들을 불러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해 울게 하라.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하십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는 교만한 백성들에게 전문 울음꾼들을 불러 눈물샘을 자극하여서라도 울며 자복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 하십니다.   

어떻게 울어야 했습니까?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는구나.   우리가 적들에게 땅을 빼앗기며 집을 빼앗겨 고국 땅을 떠나왔구나’ 하고 탄식하는 눈물입니다.   곡하는 여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딸들에게 이렇게 슬픈 울음과 슬픈 노래를 가르쳐 부르게 하라.  사망이 우리 창문과 궁궐에 올라오며 밖에서는 우리 자녀들과 젊은이들을 멸절하려 한다.  사람의 시체가 거름더미처럼 들에 떨어지고 추수하는 사람들 뒤에 떨어지며 거두지 못한 이삭들처럼 되리라’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보고 이렇게 울어야 마땅한 백성들이었습니다.  남자들은 전쟁에서 다 죽어 울어야 할 남자들조차 없을 때 여인들이 울며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화강석처럼 단단해진 교만한 백성들이 울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답답하고 슬프셨으며 선지자 예레미야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민족의 멸망을 눈앞에 둔 선지자가 소리 높여 울며 부른 슬픈 노래입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어린 아이들이 성읍 거리에 혼미함이로다’ (애가 2:11) 하였고,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굶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애2:18, 19)  하였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전하는 회개의 메시지를 듣기 싫어하며 선지자를 깊은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져넣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에서 호소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애3:40)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는도다’ (애3:48-50)   

멸망 직전의 유다 백성들은 육체의 할례는 받았지만 그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가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첫 열매로 삼아 만백성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제사장 사명을 주셨건만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였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지만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였습니다(렘2:13).    그들이 범한 죄는 잿물로 씻을 수 없고 많은 비누를 사용해도 씻겨지지 않는 죄악이었습니다 (렘2:22).     

예루살렘 거리를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공의와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만 찾아올지라도 내가 이 성을 용서하리라 하실 정도로 그 성은 죄가 차고 넘쳤습니다.   안식일과 절기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지만 모두가 거짓이었고 그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하여 회개하기를 싫어하였습니다(렘5:1-3).   회개를 선포하는 선지자를 가리켜 지나가는 바람이라 비웃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없다 조롱하였습니다(렘5:13).   심지어 하나님을 부인하며 말하기를, ‘여호와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않을 것이다’(렘5:12) 하였고, ‘여호와는 복도 화도 내리지 않는 분이다’(습1:12) 하였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고,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고 바알에게 분향하면서 성전에 올라와 내 앞에 서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하느냐?   이런 일을 하는 너희는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집이 강도의 굴혈로 보이느냐?   내가 너희의 모든 죄악을 다 보았다’(렘7장)  하셨습니다.   불법을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동시에 성전 제사도 드리는 거짓된 성전신앙을 지적하신 하나님은 ‘너희 조상이 애굽을 나와 처음에 법궤를 두었던 실로가 어떻게 되었가 가서 너희 눈으로 확인하라’ 하십니다.     

엘리 제사장이 실로에 있는 성막에서 수종들 때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집을 더럽힌 망나니 중의 망나니들이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돌아와 법궤를 메고 나가면 하나님이 함께 하여 승리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다시 나갔지만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법궤는 빼앗기고 제사장 두 아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법궤를 의지하는 신앙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아니라 미신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때의 일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거짓된 것이었는가 알려주셨습니다.   

그들처럼 너희도 거짓으로 나를 섬기며 맹세하지만 나는 너희가 새벽부터 부지런히 기도하여도 듣지 아니하겠고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실로가 비참하게 무너진 것처럼 내 이름으로 일컫는 이 성전도 무너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전에 우상의 신상을 들이고 거기서 거짓으로 제사하는 백성들은 성전 안에 있으면 무사하고 평안하리라는 자기 신념으로 살던 혼합주의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하나님의 법궤가 무슨 부적이나 호신부가 되는 것처럼 여기고 성전에서 제사드리던 그들은 하나님을 다른 신들 가운데 하나처럼 여길 뿐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든 상관치 않고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예배당에 찾아와 예배드리고 봉사생활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평안을 보장해 주실 것이라 믿고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않으면서 예배당에 잘 출석하고 적당한 헌금도 드리며 ‘나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확신한다면 참으로 구원얻은 하나님의 자녀일까요?   교회 안에 등록된 교인 숫자가 아무리 많아지고, 재정이 든든해지며 선한 사업을 많이 펼친다 할지라도 교인들 한사람 한사람 개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실과 공평과 정의를 따라 정직한 노동으로 얻은 재물로 하나님께 즐거이 드리는 헌물이 아닌 이상 그 모든 것들은 바람처럼 헛될 뿐이며 하나님 앞에 가증한 재물일 뿐입니다.     구원은 교회에 소속되었다고 자동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얻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마음의 가죽을 베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육체의 할례만 자랑하여 자만에 빠졌던 자들이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런 자기 백성들을 보며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리고 수 많은 세월이 흘러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날을 몇일 앞둔 어느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다 성 가까이 오셨을 때 그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장차 당할 환란을 생각하며 슬퍼 우셨습니다 (눅19:41).     성전이 이방인들 손에 비참하게 무너질 줄도 모르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나 성전 두목들이 장사치들과 손잡고 아버지의 집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있음을 슬퍼하신 눈물입니다.   그 아름다운 성에서 벌어질 살육과 약탈이 곧 눈 앞에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가리워 보지 못하는 백성들이 당할 고난을 불쌍히 여기시는 통한의 눈물입니다.   

성전은 곧 당신의 몸이었으니 성전이 무너짐은 곧 자신의 육체가 찢겨짐이었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아들을 대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버려두셔야만 했던 아버지의 찢겨신 심정을 이해하며 흘리는 아들의 눈물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울며 부르짖었던 주님의 기도를 가리켜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라고 기록합니다.  이 통곡의 눈물은 곧 우리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고귀한 눈물입니다.    

주님은‘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마5:4) 하셨으며,   야고보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약4:8-10) 하셨습니다.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합니다.    나의 억울함, 원통함, 이기적인 욕망을 이루지 못했을 때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미움과 분노로 치를 떨며 통한의 눈물을 흘릴 줄 알지만 정직한 눈물, 참회의 눈물은 말라버린 삭막한 세상입니다.   나의 부끄러운 죄를 놓고 울어야 함은 마땅하지만 나 말고 이웃을 위해 울었던 적이 언제입니까?    나와 우리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울어야 합니다.   가족을 위해 우십시오.  자녀들을 위하여 울고, 교회를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뿐 아니라 조국의 교회들을 위하여 울어야 하고, 이곳 영국의 교회들을 위하여 그리고 세계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서도록 눈물로 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처럼, 우리 주님처럼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눈물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이 참혹한 세상과 소망이 사라진 사람들의 마음에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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