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심령이 가난한 사람 (마 5:1-3)

첨부 1


심령이 가난한 사람 (마 5:1-3)          

성경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은 <율법>을 그 중심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약은 <복음>이 중심주제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분위기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너희는 이렇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에 따라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저는 율법을 잘 지킬 수 있으니, 한 번 지켜봐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하나님 앞에서 <난 잘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고 계십니까? 저는 그런 자신감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구약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좌절감을 느끼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율법보다 복음이 좋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복음에서 얼마나 위로를 받는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복음은 <잘 못해도 괜찮아. 이리 오너라. 내가 위로해 주마.>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율법에서 복음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흔히 성경을 읽을 때 구약에서 시작해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우리 신앙이 성숙해지면 율법에서 복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잘 할 수 있습니다.>라는 자신감으로부터 <잘 할 수 없습니다.>라는 겸손한 고백으로 넘어가길 원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저는 잘 할 수 있습니다.>란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교단 총회가 있었습니다. 총회가 진행되는 중간에 우리나라의 대형교회들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충격적인 TV프로그램이 방송되었습니다. 아마 방송을 본 모든 분들이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의 진위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무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더 이상 이 세상의 등불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혼란한 와중에 저는 이번 총회에서 목사님, 장로님들께 설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 같이 부족한 사람이 전국에서 모인 목사님, 장로님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 자체가 황송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설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순종했습니다. 그 날 예배를 마친 후 어떤 목사님께서 저를 찾아와서 말씀했습니다. <김 목사님, 저는 설교를 들으며 울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저를 돌아볼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아마도 그 날 함께 나눈 말씀이 충격적 방송과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에 비추어 그 분의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시간 그 날 나누었던 말씀의 주제를 오늘 교우님들과 다시 한 번 나누고 싶습니다. 그 설교의 제목은 <다시 쓰는 이력서>였습니다. 저는 그 날 모세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평소에 <모세는 언변이 뛰어난 분이었을까, 아니면 말재주가 무딘 분이었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같은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서로 다르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스데반 집사님께서 순교하기 전에 하신 마지막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 22절을 보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이 능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 궁궐에서 최고의 지도자 교육을 받았고, 말과 하는 일이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영화 <십계>를 보면 모세가 애굽 군대를 지휘하여 대승을 거두고 개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상에 입각한 것이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세는 수많은 군사들을 인솔하고, 많은 백성 앞에 돋보이는 인재였을 것입니다. 그는 대중 연설에도 능한 말 잘하는 리더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출애굽기 4장 10절을 보면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이것은 정말 이상합니다. 분명히 스데반 집사님께서는 모세가 말과 하는 일에 뛰어난 인재라고 했는데, 출애굽기에서는 말할 줄 모른다, 입이 뻣뻣하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어떤 말이 맞는 것일까요? 

저는 이 두 가지가 모두 맞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의 말씀은 스데반 집사님께서 모세를 제3자의 입장에서 칭찬하는 말씀입니다.  <그 분은 훌륭한 분입니다. 그 분은 정말 말을 잘합니다. 그 분은 능력이 대단합니다. 그 분은 리더십이 뛰어난 인재입니다. 그에게 맡겨 보십시오. 그 분을 모셔 오십시오. 그 분이 맡으면 잘 해낼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4장의 말씀은 모세 자신의 고백입니다. <남들은 저를 두고 제가 제법 뛰어난 인재라고 말합니다만, 그 말들을 잘못되었습니다. 그 분이 저를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말재주가 없습니다. 저는 무능합니다. 저는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부족합니다.> 

모세 자신도 한 때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맨 발로 엎드려서 <말할 줄 모릅니다.>라고 고백하던 때로부터 40년 전에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력서를 제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궁궐에서 철저한 애굽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몸속에 히브리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동족을 구원해야 할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애굽 사람과 싸우는 한 히브리인을 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게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을 죽이고 히브리인을 구한 행동은 그가 하나님께 제출한 이력서였습니다. 

그가 그 날 제출한 이력서를 요즘 형식으로 옮긴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름 - 모세. 나이 - 사십 세. 신분과 직업 - 애굽의 왕자이며, 군대 장군.  학력 - 애굽의 모든 학업 과정을 마쳤음. 특기 - 리더십이 뛰어나고, 언변에 능하고, 무술과 군사 전략에 능함. 기타 - 열정이 불타고 있고,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애정이 뜨거움. 맡겨주신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겠음.> 

그런데 이일이 있은 후 사십 년이 지났을 때, 미디안 광야의 뜨거운 햇빛 아래서 얼굴이 그을고, 모래 바람 속에서 그의 얼굴이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을 때, 그는 <다시 쓴 이력서>를 하나님께 제출하였습니다. 처음 썼던 이력서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앞뒤를 빽빽이 채우고 있었지만, 다시 쓴 이력서는 매우 간단했습니다. <이름 - 모세. 나이 - 팔십 세. 직업 - 목축. 특기 - 별로 없음. 언변도 능력도 없음. 열정 - 다 식었음.> 이것이 모세가 다시 쓴 이력서였습니다. 

그가 이력서를 다시 쓴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자신이 제출한 첫 이력서를 하나님께서 폐기처분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사십 년 전 처음 썼던 이력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처음 이력서를 제출한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지도자가 되기는커녕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백성을 구원하기는커녕 자기 몸 하나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영웅이 되기는커녕 찾는 사람 없는 광야에서 지평선만 바라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사람들의 지도자가 되는 대신에 양떼를 몰아야 했습니다. 위대하게 되고자 했으나, 아주 작은 사막의 목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께 존귀하게 인정받고 쓰임 받게 되는 것은 <잘 할 수 있습니다.>란 이력서를 포기하고, <잘 할 수 없습니다.>라는 다시 쓴 이력서를 제출할 때입니다. 그 누구도 첫 이력서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화려한 이력서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두 번째 이력서를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너의 처음 이력서는 정말 맘에 들지 않았다. 그 이력서는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지. 그러나 다시 쓴 이력서를 보니 이제 됐어. 널 내 사람으로 쓰겠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 너를 세우겠다. 내 백성을 인도하라.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라!> 이력서를 다시 썼을 때,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모세가 처음에 썼던 이력서를 쓰는 데 익숙합니다. 목사님이 안 계신 교회들은 목사님을 어떤 기준으로 찾습니까? 교회들은 <난 잘 할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은 마음의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난 멋진 목회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난 몇 년 안에 교회를 두 배 이상 부흥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난 교육전문가이며, 제자훈련 전문가이며, 난 가정목회 전문가이며, 청소년 전문가입니다. 난, 난....모든 것을 다 잘 합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지금 한국 교회 안에 이런 풍토가 만연해 있습니다. 모두 <난 잘 할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이런 생각은 교회 안에서 <난 충분히 장로 자격이 있습니다. 난 권사가 되고도 남습니다. 나야말로 선교회 회장이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나 정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또 있습니까?>라는 식의 자화자찬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 때 우리 마음에는 무서운 교만이 싹트게 됩니다. <어쩌면 그렇게 잘 하십니까? 부럽습니다. 저도 좀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칭찬을 들을 때, 바로 그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래 난 잘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차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한국교회의 여러 가지 부끄러운 문제들은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한다. >는 교만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잘 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하게 만듭니다. 잘 할 수 있게 도우신 하나님을 잊게 만듭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이 올라서게 됩니다.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잘 할 수 있다. 날 지켜봐 달라. 잘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결말은 언제나 치욕적입니다. 누구보다 깨끗함을 자처하던 사람들이 교도소에 들어갑니다. 누구보다 경륜과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람들이 일을 망치고 쫓겨납니다. 스스로 <난 잘하고 있어.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어>라고 고개를 세우면 멀지 않아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일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런 식의 이력서, 자기소개서는 찢어버려야 합니다. 현재 우리는 모세가 첫 번 이력서를 제출했으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못했던 때와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우리는 이 나라의 존경받는 선구자요, 견인차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향해 찬사를 보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그 반대가 되고 있습니다. 위대하게 되고 싶지만 작아지고 있습니다. 민족의 선구자가 되고 싶고,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국민들은 우리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핀잔을 줍니다. 이제 공을 넘겨주고 마운드에서 내려오라고 압박을 받는 투수와 같습니다. 끝까지 완투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이력서를 다시 써야 합니다. 목회자들도 이력서를 다시 써야 합니다. <하나님, 전 자신 없습니다. 전 이 교회를 맡을 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저는 너무 무능합니다. 전 설교도 잘 못합니다. 설교한 대로 사는 것은 더더욱 못합니다. 전 남을 잘 용서하지도 못합니다. 전 가난하고 병든 교우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품어주는 일도 잘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을 설명할만한 언변이 없습니다. 전 늘 부끄럽기만 합니다.> 

장로님들도 이력서를 다시 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전 장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 많은 성도들의 인도자가 되겠습니까? 저보다 더 순결하고, 더 주님을 사랑하고, 저보다 더 열심히 복음을 위해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전 정말 무능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산상수훈 중에서  팔복의 첫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말씀을 하시기 전에 제일 먼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받는 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다>는 헬라어 <프토코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파산을 당하거나,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치 파산 당한 사람처럼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주님, 저는 제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제 힘으로 목회를 잘 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쳤지만, 잘 못하고 있습니다. 제 힘으로 성숙한 인생을 살고자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 쓴 이력서를 하나님께 제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복을 받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얻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천국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나중에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살아 있는 동안에도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천국은 기쁨과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사람, 즉 <하나님, 전 제 힘으로 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는 사람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그는 잘 하고 싶었지만, 잘 하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고, 하나님께 찾아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품에 기댑니다. 하나님께서 <그 동안 수고 했다. 이제 내 곁에서 쉬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 천국의 평안이 그 마음을 채웁니다. 그게 행복입니다. 

이런 사람은 <난 잘 못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돕습니다. 그는 <잘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 때보다 더 잘하게 됩니다. 그러나 <잘 해야지>라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는 일은 오직 하나, <늘 이력서를 다시 쓰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일만 하면 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승리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 사도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도 모세처럼 이력서를 다시 쓴 분입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의 훌륭함을 드러내기 위해 썼던 이력서의 예를 들어보면 빌립보서 3장 5-6절입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시 쓴 이력서의 예는 빌립보서 3장 7절 이하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썼던 내 이력서는 취소하겠습니다. 제발 그 이력서를 쓰레기통에 버려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새 이력서를 보낼 테니, 그것으로 해 주십시요>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울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를 숙여야 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펜과 종이를 주셨습니다. 이력서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이 가을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리게 되길 기원합니다. <천국의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축복을 얻으시길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