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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족, 회개, 용서 (눅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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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족, 회개, 용서 (눅 17:1-4) 
 

1. 실족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먼저 “실족”에 관한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족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스칸달론”인데요. 이 말은 “스칸달리제이”(마18:6)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그 의미는 ‘덫으로 쓰이는 미끼 대’입니다. 즉 막대기에 미끼를 붙이거나 달아서 동물이 그것을 보고 먹으려고 와서 잡히도록 유인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실족이란 누군가를 범죄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며, ‘죄짓게 하는 덫’, ‘사람을 파멸시키는 덫’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 말은 대체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는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실족하는 경우이고(마18:6), 둘째는 내가 실족하게 되는 경우입니다(요16:1, 마5:30). 

➀ 먼저 생각할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경우입니다. 즉 나의 言行心事가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만드는 경우이지요.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아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너지고 삶이 엉망으로 망가져버린 경우가 예수님 당시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을 실족시킨 당사자는 주로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세리와 창기와 이방인들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무엇보다 큰 잘못은 자신들도 지킬 수 없는 수많은 율법 조항으로 이스라엘 사람의 삶을 완전히 묶어놓아 꼼짝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천국 문을 닫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못하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도 가로막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전도한 사람을 “배나 지옥 자식으로 만든다”고 하셨습니다(마23:15,16). 즉 그들에 의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실족케 하는 문제는 그들만 아니라 제자들 사이에도 있었습니다.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제자들은 그 부모와 아이의 면전에서 그들을 책망하면서 쫓아내려 했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시기 질투하면서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 누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가? 누가 주님의 나라를 이룸에 있어서 더 큰 공로자인가?’ 하면서 견제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낮아지신 모습을 보여도, 심지어 예수님께서 종의 모습으로 자신들의 발을 씻겨도,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희생양이 되어 십자가에 죽기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 시간까지도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자신과 상대를 실족케 하는 것이며, 예수님까지도 실족케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는 실족의 문제가 없을까요? 2001년에 만들어진 <밥, 꽃, 양>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임인애 감독). 이 영화의 배경은 1998년 여름에 벌어진 울산 현대자동차의 노사분규입니다. 사측에서 대규모 정리해고를 발표하자 노조가 파업하고 투쟁을 벌였습니다. 오랫동안 진행된 파업은 2000년 겨울,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끝까지 싸우자던 노조위원장이 277명의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면서 끝이 났습니다. 

양측의 타협으로 노사는 정리해고 대상자로 남성 노동자 133명과 여성 노동자 144명을 뽑았는데, 그 144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밥을 하던 276명의 식당 아주머니들 가운데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로서, 데모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밥을 해 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해고 소식을 듣고 노조 집행부를 향해 “너희들이 이럴 수는 없다”고 항의했지만 끝내 해고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경기가 호전되고, 창업 이래 최대의 호황을 맞게 된 현대자동차는 해고되었던 133명의 남성 노동자들을 ‘약속대로’ 복직시켰습니다. 

그러나 144명의 밥 짓는 아주머니들은 복직 대신 하청업체 직원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들은 노조 측에 복직을 요구했지만 무시를 당했습니다. 그때서야 아주머니들은 자신들이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해고당하기 전에는 ‘밥’하는 아줌마들이라고 천대를 받았고, 데모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그 많은 노동자들의 밥을 지었고, 그러다가 결국 희생제물인 ‘양’이 된 것입니다. 그럴듯한 노사분규 현장에서 같은 편이라고 여겼던 사람들로부터 아직까지 아물지 않은 상처를 받은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우리”라고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한 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가족”, 또는 “동료”라고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실족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아니 여러분이 가까운 사람을 실족케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혹시 다른 성도나 직장의 동료를 시기하거나 흉보고 뒤에서 수군대지는 않았습니까? 

어느 교회, 어느 목회자에게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가장 빨리 퍼 나르는 사람은 네티즌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 교인이거나 동료 목회자들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교인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목회자가 동역자들로부터 가장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모습을 처음 교회에 온 사람이 본다면 ‘교회도 세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곳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나의 말 한 마디에 누군가 상처를 받습니다. 

내가 들고 다니는 명품 가방, 내가 입은 좋은 브랜드의 옷이 누군가를 실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동료 전도사님이 좋은 사모님을 만나 결혼을 하고 와서는 제게 이러는 겁니다. “야 진 전도사, 니가 입은 옷 빤스까지 다 합쳐도 내 넥타이 하나만 못하다, 아나?” 아버지 빤스인지 형님 빤스인지 이름도 적지 않고 막 입던 제게 그 말은 상처였습니다. 

그때부터 ‘빤스에 이름을 새기자’고 다짐을 했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좋아 보여 그 분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데, 그 분은 다른 분들과 친하여 내가 끼어들 틈이 없는 그것도 누군가에게는 실족의 원인이 됩니다. 실족에는 기준이 없습니다. ‘실족 지수 50을 넘어서면 실족이고 50 이하는 실족이 아니다.’ 이런 기준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혹 누군가에게는 웃음을 주지만, 혹 누군가를 실족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➁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더 강조되는 것은 내가 누군가를 실족케 하는 경우보다 내가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실족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의 문제가 뒤 이어지고 있지요.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 감리교회 최영식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다음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신학을 하기 전, 집사 시절에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그 뜻을 주변에 밝혔더니, 교회의 리더 위치에 있던 어떤 여 성도가 이 목사님 들으라고 한 마디 했습니다. 

“흥, 목회자는 아무나 되는 건 줄 알아!” 그 말에 이 목사님은 크게 실족했습니다.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민과 갈등을 했습니다. 수많은 기도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상담도 했었고, 친구들과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었는데 ….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여 성도는 그런 막말을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속에서 분노가 터져 나오는데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 분의 비웃고 조롱하는 듯 한 표정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데로 이사를 가도 밤마다 떠오르면서 괴롭혔습니다. 그러던 중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사모님이 목사님에게 ‘그 사람을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에 목사님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아십니까? 그 얘기를 두 분이 차 안에서 했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용서 해!”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문이 부서져라 쾅 닫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목사님의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되시죠? 

이 목사님의 경우처럼 신뢰하던 사람들로부터, 여러분과 가까운 사람이나, 혹은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이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경우를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동문 모임에 갔는데 연세는 저보다 많은데 신학교는 후배인 한 목사님이 거기 오셨습니다. 제가 그 모임의 총무와 같은 역할이라, 사람들 사이를 다니면서 웃고 웃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대뜸 제게 “진 목사, 나이 값 좀 해라”하더라고요. 순간, 그 말이 제게 상처가 되었습니다. ‘누군 좋아서 이러나?’ ‘누군 이런 모임을 만들려고 동분서주했고, 모였을 때 분위기 만든다며 이러고 있는데, 자기는 초대받듯이 와서 앉아서 먹기만 하는 주제에!’ 막 이런 생각이 들면서 실족의 연자 맷돌이 저를 눌러 깊은 상처의 바다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영화 <써니>에 보면, 고교 졸업 후 25년 만에 만난 친구들이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늙지 않은 친구에게 던진 말이 “야, 너 나이 값 좀 해라”였습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늙지 않았다는 반어법적인 칭찬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을 들은 그 순간 제가 가졌던 황당함은 정말 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쉽게 실족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요? 좋은 뜻으로 던진 말 한 마디에도 실족하는 것이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이 조심하라는 말은 ‘항해를 끝낸 배가 조심스럽게 부두에 기착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이 마치 배를 부두에 묶지 못하여 조류에 밀려 먼 바다로 밀려나가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삶을 안정되지 못하게 흔드는 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군가로부터, 그 어떤 일이든지, 그로 인하여 여러분이 실족당하지 않도록, 마음을 강하게, 항상 주님의 평강이 깃들도록, 그리고 성령님과 말씀으로 충만하기를 사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회개

오늘 본문의 두 번째 주제는 “회개”입니다. 3절,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절,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이 말씀에는 여러분을 실족시킨 자들에게 “경고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경고하라는 말은 ‘꾸짖다’는 의미이지만, 이 말에는 ‘존경하다, 경의를 표하다’는 뜻이 함께 있습니다. 즉 누군가 나를 실족시키면 그 사람을 불러 잘못을 일러주는데, 거기에 감정을 실어서, 흥분해서 한 마디 쏘아붙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겸손하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예, 그렇게 안 된다면 경고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 그 사람이 “회개하거든”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이 말은 ‘마음을 바꾸다, 회개하다’는 뜻과 함께, ‘후에 또는 나중에 알아차리다’는 의미, 그리고 때때로 ‘너무 늦게’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여러분을 실족시킨 사람이 나중에야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아차릴 때, 이미 여러분이 상처를 받아 그 쓴 뿌리로 많이 고생한 다음에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그를 불러 정중하게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일러주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통하여 주님이 하시려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➀ 먼저 성도는 자신을 잘 살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을 살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대문화의 특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볼 것이 너무 많고, 들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아니 구지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많으며,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들리는 말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이번 총회에 갔더니 우리 이웃 교회 일이 이미 전국적으로 소문이 다 나 있고, 또 1700개 넘는 전국 교회의 이야기들이 굳이 귀를 곤두세우지 않아도 다 들리더라고요. 

이렇게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 많으며,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들리는 것이 많아서 사람이 눈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눈과 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가 있었던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여, 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리이까? 말리이까?”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의 전통을 따라 그 여인을 죽이라고 하면 ‘하나님 아들이라는 자가 사랑 없이 사람을 죽이라느냐?’며 책잡을 것이고, 또 ‘여자를 놓아 주라’ 하면 ‘네가 하나님 아들이라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을 어기느냐?’면서 책잡을 것입니다. 흥분한 그들이 웅성거리면서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예수님은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에 그동안 다른 사람과 그들의 잘못만 보고 살던 사람들이 비로소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한 두 사람 모두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자신들도 부끄러움이 많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죠. 

미국 시티 그룹의 제이미 디몬 사장은 2003년,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 수 년 간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회사의 회장으로부터 회사를 떠나달라는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은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회사는 수많은 경쟁자들로 우글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말을 들은 제이미 디몬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습니다. 대책도 없는 자신을 낭떠러지로 내몬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해 샌드백을 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차차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신, 경영상의 실수, 자신의 부족한 점을 조목조목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정확히 6개월 만에 대형 은행인 ‘뱅크원’의 최고 경영자로 선임되었습니다. 뱅크원은 제이미 디몬의 주도하에 제이피 모건과 합병했고, 제이미 디몬은 그 회사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금융회사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자신을 살피는 것이 얼마나 큰 유익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인가?’ ‘내가 다른 사람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나의 신앙생활은 자랑할 만한가?’ ‘나는 미움, 시기, 질투, 정욕, 욕심을 온전히 버렸는가?’ 이렇게 자신을 살피지 않는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이고, 무익하고, 심지어 아주 무서운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➁ 두 번째로 이 “회개하거든”이라는 말씀 속에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소리괴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학교 가라’는 엄마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는 TV만 보고 있습니다. ‘앞을 잘 보고 걸어야 한다’는 아빠의 말에도 아이는 게임을 하면서 길을 걷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있었던 이야기들을 재잘대면서 엄마 뒤를 따르지만 저녁 준비에 바쁜 엄마는 건성으로 ‘나중에 하자’면서 들어주지 않습니다. 퇴근한 남편이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말하자 자신도 힘들었다며 아내는 ‘응 그랬어’ 라는 반응으로 무시해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무시하고 외면한 소리들이 나중에 괴물이 되어 우리를 괴롭힐 것이라는 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미국의 어느 전화 회사에 골치 아픈 고객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걸핏하면 고객 센터에 전화를 걸어 핏대를 올렸습니다. 상담원이 자세하게 설명할수록 그는 더 흥분했습니다. 결국 그는 각 신문의 독자란에 투고를 했고, 심지어 법원에 고소까지 했습니다. 회사는 어쩔 수 없이 상담 전문가 한사람을 고용해 그 고객을 만나게 했습니다. 그런데 효과가 금방 나타났습니다. 끝없이 트집을 잡던 그 고객의 항의 전화가 뜸해지더니 마침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은 그 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를 듣기로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그 지긋지긋한 골칫덩이를 조용하게 만들었습니까?’ “요령이요? 글쎄요. 고객이 끊임없이 불만을 말할 때, 전 그저 공손히 듣기만 했습니다. 세 시간동안이나요. 그리고 나는 연달아 그 고객을 네 번이나 찾아가 그의 말에 동정을 표시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여태껏 이런 태도를 보여준 회사 직원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며 차츰 우호적으로 변했습니다.” 그가 불평 투성이 고객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한 방법은 그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도는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면 곧바로 사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다보면 잘못할 때가 많습니다. 말로 실수할 때도 있고,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아마 누구나 이러한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에 대한 태도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잘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시간만 지나가면 모든 것이 잊혀지고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지금 한국교회는 몰매를 맞고 있습니다. 돈 잔치를 통해 단체의 장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온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났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잘못이 없다고 합니다. 그 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교회의 전도를 가로막아 그 어떤 이단보다 교회에 끼친 해악이 컸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우시는 교회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교회입니다. 거룩한 교회란 자신의 잘못을 알 때 즉시로 회개하여 거룩성을 회복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이러한 교회와 성도를 기뻐하시고 복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참된 믿음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3. 용서

오늘의 마지막 주제는 “용서”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형제가 자신을 실족케 하면, 즉 어떤 죄를 범하게 만들면, 그를 찾아가 경고하고, 그 경고를 들은 그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반드시 용서해 주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여러분, 도대체 몇 번, 그리고 얼마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뭐라고 합니까?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누군가 여러분에게 잘못을 범했습니다. 

여러분 가까이 있는 사람, 여러분이 잘 아는 사람인데, 그가 잘못을 범하면 그 실망감과 배신감으로 한 번도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한 번이 아니라 하루에 일곱 번이라고 말합니다. 평생 일곱 번도 아니고 하루에 일곱 번입니다! 더 웃기는 현실은 그가 같은 죄를, 나를 향한 잘못을 일곱 번 저지르고, 그때마다 쪼르르 달려와서는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면서 사과하는 것, 그것은 정말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돌아서자마자 곧바로 내게 잘못을 또 저지릅니다. 그러고 또 쪼르르 와서 사과합니다. 일곱 번이나 그 짓을 합니다. 

여러분,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한 사람이 내게 하루에 일곱 번 잘못을 범하는 것, 그리고 그때마다 용서를 구하는 이 일이 가능한 일일까요? 물론 본문에서 이 ‘일곱 번’이란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고 완전하게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란 완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또 다른 의미는 어느 한 사람이 동일한 대상에게 하루에 일곱 번이나 죄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고, 그때마다 와서 용서를 구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성도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이웃집에 갔습니다. 그 집 안으로 들어간 아내는 안방 화장대에 놓인 커다란 진주 반지를 보았습니다. ‘어머나 예뻐라.’ 하면서 자기 손가락에 끼어보았습니다.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딱 맞았습니다. 다음날 오후에야 그 주인아주머니는 반지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젊은 새댁이 범인이라고 생각한 아주머니는 새댁을 찾아와 다짜고짜 반지를 내놓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새댁은 아니라고 발뺌을 했지만, 아주머니는 더 거세게 몰아세웠습니다. “우리 집 안방에 들어온 사람은 우리 식구 외에 새댁밖에 없었는데도 거짓말이야?” 새댁은 끝까지 훔치지 않았다고 우겼고, 결국 아주머니는 경찰을 불렀습니다. 

경찰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동네 사람들은 무슨 큰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마침 퇴근하고 돌아오던 새댁의 남편이 그 상황을 보게 됐습니다. 남편은 구경꾼들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제 아내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왜 제 아내에게 그런 누명을 씌우는 겁니까? 나는 아내를 믿습니다. 그러니 모두 돌아가 주십시오.” 남편의 한마디 한마디는 강직하고 단호했습니다. 기가 죽은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났고, 경찰은 물론 이웃집 아주머니도 할 말을 잃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안정을 취하도록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잠이 들자 전날 밤 화장대 서랍에서 보았던 그 반지를 꺼내 들고 조용히 이웃집을 찾았습니다. 남편은 아주머니에게 반지를 건네며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제 아내가 한순간의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아내와 저는 한마음이고 한 몸입니다. 그러니 아내의 잘못은 제 잘못이기도 합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오.” 남편의 진실한 사랑에 깊이 감동한 아주머니는 말없이 남편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자기 남편의 행동을 모두 지켜본 새댁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편의 강한 믿음과 깊은 사랑에 가책을 느낀 새댁은 다음 날 아침 아주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깊이 사죄했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새댁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새댁이 부럽네요.” 남편의 진실한 사랑, 그 큰 사랑이 아주머니에게는 잘못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마음을, 자기 부인에게는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자세를 선물했던 것입니다. 용서란 참 힘든 것 같으면서도 이렇듯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한번 용서하면 여러 사람이 행복해지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용서입니다.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그 사람도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는 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용서, 당신은 그 길에 있습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 가지 주제를 던졌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실족케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러면 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가가 그의 잘못을, 여러분이 상처받았음을 일러주라는 것, 그리고 그가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어 실족케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용서의 길은 정말 어렵고 먼 길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또 당장 용서하는 것이 안 된다 할지라도, 말씀에 순종하여 가슴에 용서를 품고 살아다가보면 어느새 용서의 길 끝에 서서 모두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를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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