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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 (느 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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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느 13:1-14)   

 
몇 년 전 국민 일보에 이재문 ‘메리츠 증권’ 전무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났습니다.
그는 일산에 있는 ‘예수 사랑교회’ 장로이십니다.
국내 최상류 1%의 자신을 운영하는, P.B. 업계에서는 최고의 실적을 올리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성공한 금융인이라고 부른다. 또래 친구들이 대부분 은행에서 명퇴를 하거나 퇴직한 상태인데 나는 개인고객 200여명을 관리하며 약 3,000억 원의 자산을 운용하는P.B.로 열심히 뛰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영업비결을 묻는데, 나는 ‘고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새벽기도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새벽기도를 하면 갑자기 새 고객이 나타나 몇 십억 원을 예금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주신다. 그리고 자심감 넘치는 사람으로 바꿔주신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나를 신뢰하는 것이다.” 

그도 때로는 위축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때론 의기소침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좌절의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새벽기도는 그를 ‘회복’시켜주는 충전소였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 설교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느13장은 느헤미야의 결론입니다.
느헤미야는 결론으로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회복이란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을 말합니다.
느헤미야는 무엇을 회복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까?
아마 그 내용은 이스라엘의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1. 예배를 회복하라.

먼저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예배를 회복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8-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 놓았느니라.”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배경을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한 후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에게 보고하러 갔습니다. 
학자들은 대략 그 기간을 1년쯤으로 봅니다. 
문제는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1년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도대체 도비야가 누구입니까?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을 사주하여 성벽 재건을 방해하던 자가 아닙니까?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때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리라고 조롱하던 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런 자가 예루살렘 성전의 방을 차지할 수 있습니까? 
이방인 도비야가 예루살렘 성전의 방 하나를 차지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향력의 문제입니다. 
도비야가 있는 한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예배회복을 위하여 조치를 취합니다.

다음 세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3절에 “분리”, 9절에 “정결”, 그리고 11절에 “레위 사람들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입니다. 
결국 이 세 단어가 예배회복입니다.

① 먼저, 예배회복을 위해 ‘분리’되어야 합니다.

분리는 나누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1절에서 3절을 보면, 성벽 봉헌하던 날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에게 낭독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분리하라는 것입니다. 
모압과 암몬사람은 누구입니까? 
뿌리를 따져 올라가면 그들은 아버지 롯과 두 딸이 관계해서 낳은 아들들입니다. 
출생부터가 부정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들은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을 시시때때로 대적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래서 예배 회복을 위하여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을 분리하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모압과 암몬은 누구입니까?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지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게으름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일 욕심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잦은 갈등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쉽게 포기하는 연약한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아무튼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를 잘 아시잖아요?
그것들을 분리해야 합니다. 

② 예배 회복의 다음 단계는 ‘정결’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분리가 자신을 죄로부터 구별하는 일이라면, 정결은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리가 없애는 것이라면, 정결은 채우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도비야가 있었던 성전의 방은 원래 무슨 방이었습니까? 

5절을 보면,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배를 위한 방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방인 도비야가 이 예배를 위한 방을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배회복을 위해 그 방은 예배를 위한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음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우리교회는 제2회 성경통독성회를 갖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책 중의 책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지만 그 책을 대우하는 것을 보면 만화책보다도 더 가치 없게 여깁니다.
성경을 안 읽어요.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십시오.
그래야 참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③ 예배 회복을 위한 마지막 단계는 ‘레위 사람들을 다시 제자리에 세우는 것’입니다. 

11절 마지막의 말씀입니다.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회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시 제자리에 세우는 것입니다. 
레위 사람들을 다시 제자리에 세우십시오.
레위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오늘날 목회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목회자의 자리가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설교자를 향하여 “쟤는 나이도 나보다 어린 게........” 라는 태도로는 참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목회자를 하나님의 사자로 인정해야 그가 선포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포하는 말씀에 여러분의 인생을 걸 수 있습니다.
레위 사람들을 다시 제자리에 세우십시오.
그래야 예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2. 안식일을 회복하라.

그 다음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의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촉구한 것은 안식일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17절 “내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하나님도 안식일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두 말할 필요가 없어요.

창세가 2장 1-2절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안식일을 지켜 덕을 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만일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안타까우실 뿐이지만 사람은 거기에 따른 대가를 치릅니다. 
느헤미야는 그것을 ‘재앙’이라고 말합니다. 
18절을 보세요.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누가복음 13장 10-16절을 보면, 예수님이 18년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고 있던 여자를 안식일에 고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는 귀신 들려 오랫동안 꼬부라져 조금도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안수하실 때 그가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때 회당장이 그것을 보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가 시비를 건 것은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13:15-16)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라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주일은 푸는 날입니다.
귀신의 억압을 푸는 날입니다.
질병의 올무를 푸는 날입니다.
불안, 두려움, 걱정을 깨뜨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을 회복, 안식, 축복의 날’이라고 규정합니다.

찬송가 43장 즐겁게 안식할 날

3. 가정을 회복하라.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의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촉구한 것은 가정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25절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 많은 회복 중에서 느헤미야는 마지막으로 가정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정이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가정에서 살다 가정에서 죽습니다.

느헤미야는 가정회복을 위하여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국제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말로 하면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핵심은 신앙 문제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솔로몬 왕을 예로 듭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나니 너희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솔로몬 왕은 어떤 왕입니까? 
그는 지혜로운 재판장이요, 탁월한 행정가이며, 용감한 군사령관이요, 거기에다 감수성이 풍부한 위대한 작가이며 시인이었습니다. 
잠언, 전도서를 그가 썼으며, 모압과 에돔을 정복한 것도 그였으며, 국제무역을 통해 나라를 역사상 가장 부강하게 한 것도 그였으며, 무엇보다 다윗에 이어 예루살렘에 불멸의 성전을 건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언제부터입니까? 
그가 이방여인을 받아들인 때부터입니다. 
열왕기상 11장 1절입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그들이 결국 솔로몬을 어떻게 했습니까?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왕상 11:4).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대한 일입니까? 
7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중해를 통해 레바논으로부터 힘들게 백향목을 수입했습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보물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웅장한 성전을 지어 놓고 자신은 다른 신을 섬깁니다. 
믿어집니까?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방 여인 때문입니다. 

아합왕은 또 어떻습니까? 
믿음 좋은 아버지 오므리의 아들로 태어난 아합, 그의 이름 “아합”은 히브리어로 “사랑”이 아닙니까? 
역사문헌에 의하면 오므리나 아합은 처음에는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스라엘은 온통 우상 숭배와 반역과 살육의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한 때부터입니다. 
바알을 섬기는 여자 하나가 잘못 들어오자 이스라엘은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나쁜 여자와 좋은 남자가 결혼하면 그 남자는 어떻게 되는가? 나쁜 남자가 된다. 좋은 여자와 나쁜 남자가 결혼하면 그 남자는 어떻게 되는가? 좋은 남자가 된다.” 
여자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최고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가정의 꽃은 여성이며, 여성 중의 여성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성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장을 살펴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백성들을 촉구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배를 회복하라. 안식일을 회복하라. 가정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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