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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누구인가? (마 5:13-16) - 빛과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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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마 5:13-16)

성경 다음에 많이 팔리는 책이라 불리는 존 번연이 쓴「천로역정」을 읽으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존심’이란 나라에 사는‘무지’란 아이가 등장합니다. 이 아이도 천국을 향해 가는데 어떻게 가는가 하면 다른 착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주님의 뜻을 알고 착하게 살아왔고, 빚진 것도 없고,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내고, 구제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좁은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좁은 문과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는 나라의 사람들이 가는 방식대로 가겠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자신은 천국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그리고 율법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 번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따르지 않다가 천국 문 앞에서 증서가 없다는 이유로 지옥에 이르는 곳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 증거가 뭘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무지가 아닙니다. 자신은 잘 알고 바르게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잘못 가고 있는 것이 무지입니다. 대부분 이단이나 사이비를 보세요. 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잘 알고 바르게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 알아야 하고 바르게 가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신앙생활 한다면 그것은 정말 안타까운 성도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로 아는 것을 정체성 확립이라 합니다. 나는 누군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나는 누구며 어떻게 살아야 할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우리 주님은 우리 성도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시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에서 특별하게 우리 주님이 강조하는 말씀을 살펴보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1. “너희들만이”빛과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13절~14절을 보세요.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너희는”이라는 단어는 “너희들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원래 헬라어에서는 Be동사를 사용할 때는 주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굳이 주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너희가 소금이다”하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주어를 사용할 때는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 “바로 너희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두 번이나 반복해서 ‘너희들이’라는 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은 이 주어를 두 번이나 사용해서 말씀하실까요? 

예수님 앞에 나온 “그 사람들만이” 소금이요 빛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3절과 14절의 말씀을 예수님의 의도를 살려서 새로 번역한다면 “너희들만이 바로 이 땅의 소금이다”, “바로 너희들만이 이 세상의 빛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소금을 필요로 하고 세상은 빛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냐? 바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만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찾기 어려우나 성도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 성도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일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소금으로, 빛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치인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교육자들이 그런 사람 되길 원합니다. 아닙니다. 그들에게서는 그런 역할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소금과 빛이 아닌 것을 알고 후회하고 비난을 합니다.  

저 북한에는 김일성 김정일이 빛인 줄 압니다. 그래서 뭐라합니까? 모르십니까? 다들 반동분자들이시구만요! “민족의 태양”이라 하잖습니까? 그러나 그는 국민들은 죽든 말든 상관없이 권력만을 유지하려는 무서운 독재자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빛이고 소금인 줄 압니다. 
사실 옛날에는 소금으로 봉급을 주었다합니다. 그래서 ‘샐러리맨’이라는 말은 소금받는 사람이란 말에서 나온 단어라 하잖습니까? 

세상 그 무엇도 우리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복음이 빛이고 생명의 복음이 소금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 복음이 사람들 속에 들어가면 그 복음을 받은 사람은 소금이 되고 빛이 됩니다. 

우리 주님은 ‘너희들만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누굽니까? 복음이 심령 속에 들어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원하든 원치 안든 소금이고 빛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개인만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영국입니다. 
영국의 주 종족은 원주민 앵글로 색손 족입니다. 이 종족은 원래 야만족이었습니다.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싸움만 하고, 아주 사나운 야만 종족이었습니다. 그래서 해적질을 하면 살던 종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빛이 이 앵글로 색슨족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영국은 신사의 나라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정복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해가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쓰는 영어가 세계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 복음이 그 나라에서 떠났습니다. 그러니 소금도 아니고 빛도 아닌 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당은 노인들만 남았고 교회당이 모슬렘모스코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이 사라지니 국력도 약해집니다. 

우리나라도 보세요. 100여년 전만해도 미개하기 그지없던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젠 세상이 놀라는 민족으로 세워져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입니다. 복음이 들어와 우리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 성경을 잘 보세요. “너희는 소금이 되라”가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이 빛이 되라”가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노력하고 힘써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드신 분이 우리에게 소금이고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내가 소금이 못되고 내가 보기에 내가 빛이 못되어 보여도 주님이 우리를 소금이다, 빛이다 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그렇게 살라고 만들어 놓으셨고 그렇게 살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세상 사람들보다 못난 인간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 중에 세상 사람만도 못한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욕을 먹고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솔직히 불신자만도 못한 사람들이 기독교인 중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에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 되겠습니까? 
방법은 우리 주님을 닮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거하신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면 우리는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입니다. 


2. 성도는‘세상의’빛과 소금이라 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십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여기 ‘세상’이라는 단어를 "The earth" "The world"라고 구분해 놓았습니다. 

소금은 “너희는 이 지구에 소금이다” 이라 했고 빛은 “너희는 우 온세계에” 빛이라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는 그냥 “세상”이라 번역했습니다. 

영어 성경이 이것을 차별하여 놓은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지구의 사람들”에게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소금은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은 “온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구의 사람뿐만 아니라 온 세상 하나님이 만든 모든 피조세계에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소금이요, 이 세상에서 빛입니다. 교회에서의 소금, 교회에서의 빛이 아닙니다. 교회만이 아닌 온 세상 사람과 온 피조 세계 전체에 소금이고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문제가 많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고 부패하였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더 죄악이 가득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설고 있는 우리에게도 엄청난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우리 성도가 세상과 결별해서 살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되지만 이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할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너무 힘들고 어렵게만 볼 것이 아닙니다. 본래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는데 많은 양의 소금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적은 양으로 많은 양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은 그 성이 죄악이 가득하여 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성에 의인 열사람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그 성에 소금 역할을 할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은 3.5%의 염분 때문에 항상 신선합니다. 바닷물 1kg에 35g이 염분이라 합니다. 그래서 육지의 오염된 더러운 물을 아무리 흘러 보내도, 그것을 다 정화해 냅니다. 그래도 바닷물은 결코 썩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크리스천이 100명중 3.5명만 있으면 세상은 타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20%가 된다하는데 왜 이다지도 부패하고 타락했을까요? 소금이 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밝은 세상입니까? 밤이면 도회지의 거리는 네온사인으로 휘황찬란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왜 어둡다고 하나요? 지식이 발달했습니다.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죄악은 덜합니까? 더 많습니까? 더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어둡습니다. 죄악이 가득합니다. 온갖 악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왜죠? 가짜 빛에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빛인 줄 압니다. 경제 발전이 빛인 줄 압니다. 민주주의가 빛인 줄 압니다. 아닙니다. 가짜 빛입니다.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빛을 받은 우리 성도가 그 빛을 세상에 제대로 비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어둡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주님은 그 자신이 빛이셨습니다. 요1:9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빛이 누구입니까?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요 8:12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또 요9:5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했습니다. 

빛의 근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온전히 영접한 성도, 그들만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반사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발광체이고 우리는 반사체입니다. 그분은 참 빛이시고 우리는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엡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빛이신 예수님을 믿으니 이제는 빛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이 분명한 생의 전환점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자격이 있든 없든 그분을 영접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간 선교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의 거룩한 선교의 사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그 선교사님의 비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올 때에는 어두움이더니,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소금이고 빛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소금이고 빛이시기를 축원합니다. 


3. 성도는 '역할과 위치'가 중요한 존재입니다. 

15절을 보세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소금은 녹아야 그 역할을 합니다. 녹지 않고는 그 역할이 어렵습니다. 
녹아야 방부재가 되고 녹아야 조미료가 됩니다. 자신의 역할은 희생해야 그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빛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 “말 아래”란 말은 쌀을 담는 말을 말합니다. 큰 그릇을 말합니다. 등불이 그 그릇 속에 담겨져 있다면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있으나마나한 무가치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어디 있어야 합니까? 등경위입니다. 위치가 중요하단 말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 눈에 감추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눈에 뛰어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성도는 성도다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 역할과 위치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해야 합니다. 

소금은 원래 짠맛입니다. 그러나 음식물 속에 녹아 들어가면 음식의 맛을 내 줍니다. 맛이 없는 것에 맛있게 만들어 줍니다. 소금의 맛은 짠데 떡에 들어가면 떡 맛을 내고, 김치에 들어가면 김치 맛을 내고, 음식의 맛을 더 돋워 주는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가정에 들어가면 화목한 가정을 만듭니다. 직장에 들어가면 더욱 좋은 직장을 만듭니다. 성도는 어디에 있든지 환경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인은 살리는 사람입니다. 죄악으로 병들고 썩어져 가는 세상에서 신앙으로 가정을 살려 놓고, 남편을 살려 놓고, 자녀를 살려 놓고, 들어가는 곳마다 살려 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맛을 내는 사람들은 세상의 소금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쓴 책을 보니 교인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해당되는가 살펴보세요. 

1)“달구지 같은 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밀어 주어야만 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2)“연(鳶)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끈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언제 어디로 날아갔는지 날아가 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3)“고양이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줄곧 토닥거려줘야 만족하는 교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4)“럭비공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는 변화무쌍하고 예측불허의 교인을 말합니다. 

5)“풍선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잔뜩 부풀어 있어 누가 살짝만 건딜면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혈기 방자한 교인을 말합니다. 

전부 부정적인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우리 교회에 이런 교인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소금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들어가는 곳마다 맛을 내고 기쁨을 주는 사람입니다. 

2)“금반지에 다이아몬드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숙한 신앙인격으로 환란 시험을 이기는 교인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불평 한마디 없이 주안에서 묵묵히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할렐루야!  

성도는 자연인이 아닌 사명자입니다. 자연인도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자신과 가족이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만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명자는 다릅니다. 소금과 빛인 성도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이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녹아야 합니다. 그리고 타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역할을 하다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게 되고 그리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보통 사람처럼 살지 않고 한차원 다른 삶을 살기를 주님이 요구하십니다. 16절을 보세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주님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 착한 행실이 무엇일까요? 명심할 것은 단순한 선행이 아닙니다. 

디도서1:8절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하셨습니다. 여기서 나그네는 그저 단순한 여행객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말합니다. 

또 히13:2절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이 말씀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주님을 대접하는 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는 사역,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행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주님을 대접하는 일입니다. 선행 중에 최고의 선행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백성을 구원하여 빛 가운데로 오게 하는 것입니다. 죄악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여 의의 길로 걸어가도록 돕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이 소금처럼 녹아져야 하고 빛을 발하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우리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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