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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토기장이 하나님 (롬 9:19-33)

첨부 1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또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은 우리 찬송가 405장의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이다. 이 찬송은 노예상인이었다가 예수를 믿은 존 뉴튼 목사가 지었다. 그가 한번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하늘나라에서 세 가지의 놀라운 현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틀림없이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 놀랄 것이고, 둘째는 하늘나라의 문턱에도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고, 셋째는 나 같은 죄인이 하늘나라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고 놀랄 것입니다.” 

이 짧은 이야기는 구원이 무엇인가, 구원은 어떻게 얻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구원은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루어진다. 사람의 기준으로 보기에 천국에 들어갈 것 같은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구원받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존 뉴튼 목사의 이 고백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죄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고백이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죄인인 나에게는 은혜가 되어서 내가 구원받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앞의 1-18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의 예를 들어서 설명했다. 그들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약속의 자녀로 그리고 야곱을 약속의 성취자로 정하신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은 멸망 받을 죄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구원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알라고 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한 또 하나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준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사람을 택하시고 구원하신다고 인정해도, 그것이 은혜라고 받아들여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시는가? 누가 감히 그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마음속에 은근히 불평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선택하신다면 하나님 앞에서 죄와 죄인 됨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어떤 물건이 자기를 만든 사람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항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피조물인데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토기장이 즉 그릇을 만드는 사람으로 비유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설명한다.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진흙덩이를 둘로 나눠서 그중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다른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릇 만드는 사람이 결정할 일이다. 이에 대해서 그릇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레미야 18장에 기록된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직접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내셔서 거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대해 많은 의문을 가졌던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바벨론제국은 점점 강대해지고 애굽은 전쟁을 모르고 사는데,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은 왜 전쟁을 겪고 다른 나라에 포로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죄는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나라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도움을 구하러 애굽을 내려간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며 왜 이 백성이 이리도 완악하며 왜 악이 승리합니까?” 이런 예레미야의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은 그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보라고 하셨다. 가서 보니 토기장이가 흙을 가지고 마음대로 큰 그릇, 작은 그릇을 만들고 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그릇을 만드는데, 내가 이 백성의 역사를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겠느냐?” 예레미야 18:5,6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리 이해가 되지 않아도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분명한 목적이 있으니 불평하지 말고 믿음으로 겸손히 그 뜻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질그릇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폭군이 아니라 선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 듯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일하시지만 그렇다고 악을 행하시는 폭군은 아니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하시고 구원하신다고 해서 아무런 원칙과 기준도 없이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기준에 의해서 사람들을 택하시고 구원하신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말씀한다.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서 구원 받는다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여기서 ‘진노의 그릇’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 받을 죄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신다고 해도, 그렇게 멸망 받을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심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그릇’은 이방인을 가리킨다.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앞부분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가슴 아파 했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보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이 먼저 그리고 더 많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을 보고 또한 놀랐다. 

그런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 죄를 지어 진노의 그릇이 된 이방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그들이 유대인들보다 먼저 구원을 받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성경에 예언된 것이었다. “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크게 범죄할 때에 회개를 촉구하던 선지자였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자 하나님은 호세아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부정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고멜은 아이 둘을 낳고는 다른 남자에게로 가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고멜을 다시 데리고 오라고 하셨고 호세아는 그 말씀대로 부정한 아내를 다시 데려온다. 하나님은 고멜이 낳은 딸을 ‘로루하마’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뜻이다. 그 다음에 낳은 아들은 ‘루암미’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부정한 여인이 낳은 아들딸은 그 아버지의 자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시면서 고멜의 아들딸의 이름을 고쳐 부르신다. ‘로루하마’ 즉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부르셨던 딸을 ‘루하마’ 즉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시고, ‘루암미’ 즉 ‘내 백성이 아니라’고 부르셨던 아들을 ‘암미’ 즉 ‘내 백성’이라고 고쳐 부르셨다. 비록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겨서 하나님께 버림 받은 백성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사랑하시고 다시 받아주신다는 것을 호세아의 삶을 통해서 직접 보여주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던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듯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의롭고 선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소련의 스파이 로젠버그가 잡혀서 재판을 받았는데 카우프만 판사가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자 피고의 변호사는 “판사님, 공정을 기해 주십시오”라고 항의했다. 이때 카우프만 판사는 “정의와 공정은 이미 집행되었습니다. 당신이 구할 것이 있다면 다만 자비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공의와 공평을 따질 자격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의와 공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다. 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하라.

남은 자가 구원 받는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은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고, 여기서는 다시 유대인 즉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한다. “6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중의 일부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 ‘남은 자’가 구원을 받는다.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이사야 10:220-23의 인용이다. 하나님께 범죄해서 징계를 받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중의 일부만이 돌아와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 ‘남은 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어떤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와서 구원을 받는가? 이사야 10: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즉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남은 자’는 또한 하나님이 남겨두신 사람들이다.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이사야 1:9의 인용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해서 징계를 받아 망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 중의 일부를 남겨두셨다가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세우셨다는 것이다. 

이 ‘남은 자’를 이사야 6:13에서는 ‘그루터기’라고 했다.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나무가 뿌리째 뽑히지 않고 그루터기가 남아 있으면 다시 싹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들을 심판하실 때에 남겨두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겉으로 신앙인의 모습을 가졌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심으로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 부모가 교회를 다닌다고,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당연히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 것이다.

또 하나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이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이다. 세상이 죄악과 불의로 가득하더라도 죄악에 물들지 않고 끝까지 깨끗한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씨로 끝까지 남겨두셨다가 새 시대의 주인공으로 쓰신다. 마치 농부가 곡식을 거둔 후에 먹을 양식과 종자씨를 구분해 두는 것처럼,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내년 농사를 위해서 종자씨앗은 절대로 먹지 않고 끝까지 남겨두는 것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남겨두셨다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새 역사를 위해 귀하게 사용하신다.

누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사람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이다. 누가 이 시대의 남은 자인가? 누가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실 사람인가? 더러운 세상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이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음을 지킴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사용하시는 일군들이 되자.

믿는 자가 구원 받는다 
지금까지 바울은 진노의 그릇인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유대인들 중에도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사람들이 구원받는다고 했다. 그러면 이스라엘 중에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인가?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의’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기의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고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32절에는 유대인들이 돌에 부딪혀 넘어졌다고 했다. “32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그 돌은 어떤 사람에게는 부딪히는 돌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반석이 된다고 했다.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이 돌은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인데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된다.

이 돌이 무엇인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부딪히는 돌이 되어서 걸려 넘어지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반석이 되어서 구원을 받게 한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에게 부딪히는 돌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 반석이 되는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부딪혀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된다. “33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즉 예수님을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시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사람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신다고 했지만 아무런 원칙과 기준이 없이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열어 놓으신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되시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부딪혀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된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믿지 않은 때문이다.

밀턴의 실낙원에 보면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은혜로우시며 공의로우시다고 찬양하며 천국으로 가는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지옥으로 떨어진다. 또 지옥 편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느 마귀가 지옥이 너무 뜨겁고 견디기가 어려워서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예수나 믿을 걸”하면서 원망과 후회를 했는데, 이 때 마귀의 두목이 “이놈아, 이를 갈아라. 네가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야단을 쳤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하실 때에 믿지 않으면, 기회를 주실 때에 믿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에 지금 믿으라.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사람들이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를 믿을 때에 어떤 유익이 있는가?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믿는 사람은 날마다 감사와 감격으로 살아간다. 내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그 엄청난 죄와 끔찍한 멸망의 진노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하고 감격한다. 그리고 넘치는 감사와 감격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산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믿는 사람은 어떤 일을 이루고 난 다음에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한 자세로 서게 된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하신 것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일하셨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일했고 나는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믿는 사람은 어떤 고난이 와도 실망하지 않고 담대하다. 왜인가? 아무리 시험과 환난과 어려움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구원하셨으므로 끝까지 나를 지켜주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선하게 인도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나를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은 내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끝까지 지켜주신다.

종교개혁자인 존 녹스가 하루는 친구를 붙잡고 이렇게 고백했다. “나도 이단이 될 뻔 했네. 어제 저녁 문득 내가 교회와 진리를 위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일했으니 하나님도 조금은 이를 참작해 주시리라는 생각을 했네. 이때 내 머리를 스치는 성경말씀은 ‘네가 가진 것 중에 내가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는 말씀이었네. 여보게, 나와 함께 기도하세.” 이 말을 마친 존 녹스는 유명한 기도를 남겼다. “하나님, 내가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 같은 하나님이시다. 진흙덩이를 둘로 나눠서 하나는 귀하게 쓰는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쓰는 그릇을 만드실 권리가 하나님께 있다. 그 하나님께서 누구를 어떻게 구원하시든 우리가 무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멸망받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었는데(22절)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예비하신 은혜를 베푸셔서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시고(23절) 구원해 주셨다. 또한 천하게 쓰일 수밖에 없는 더러운 존재인데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해주셔서 귀하게 사용하신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을 보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셔서 끝까지 나를 지키시고 이 마지막 때에 나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라. 그 부르신 뜻을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열매를 맺어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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