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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사람 (마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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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사람 (마 5:1-4)

우리 사회에서 <울보>라는 말은 그리 좋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울보 같으니>라는 말은 꾸중이 섞인 말입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울지 않고 살아야 잘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우선 눈물이 있어야 안구가 건강합니다.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인공 눈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또 눈물은 육체에만 유용한 게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필요합니다. 

동아일보 기사를 보니, 한 사십 대 남자의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는 최근에 회사에서 해고당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내는 이해심 많고 사랑이 많은 참 좋은 아내였습니다. 바가지를 긁는 대신 남편을 위로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했으니, 당신은 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니 푹 쉬면서 천천히 생각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격지심에 시달렸고 우울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비참해 보여 날마다 술독에 빠져 살았고, 가족들에게 거친 말을 퍼부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아내가 이혼을 하든지, 문제를 치료하든지 선택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그는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를 치료하는 방법 중 하나는 실컷 울게 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억누르면서 삽니다. 특히 체면 문화가 강조되는 우리 사회에서는 대장부는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고 말해왔습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은 남자들을 낭떠러지로 몰아냈습니다. 때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눈물은 마음을 정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이 메말랐다는 것입니다. 본래 우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쉬운 일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얻어맞고 울고, 넘어져 울고, 배고파 울고, 꾸중 듣고 울고, 자다 깨서도 웁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감정이 격해지면 웁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이들에게 우는 법을 교육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본능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잘 울지 않게 되었습니다. 울고 나서도 후회합니다. 그러나 우는 것은 결코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운다는 것은 아직 그의 영혼이 순수한 면이 남아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울 수 없는 것이 비극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완전히 죽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울음이 메마른 사람들에게 울라고 하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애통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애통은 보통 슬픔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는 슬픔을 나타내는 단어가 대략 아홉 종류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본문에서 <애통>으로 번역된 단어는 가장 강도가 강한 단어입니다. 최고의 슬픔을 말합니다. 

진나라 <환혼>은 촉 나라를 치기 위해 양자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를 잡았는데, 그 어미가 백 리나 따라왔습니다. 그러다가 새끼 원숭이가 배에 타자, 더 이상 따라올 수 없게 된 어미 원숭이가 그 자리에서 죽었는데,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토막토막으로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모원단장,母猿斷腸>이란 고사성어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 그게 애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극심한 슬픔으로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법상, 상식상 맞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대로 바르게 말한다면 <기뻐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애통하는 사람에게 무슨 복이 있겠습니까? 어쩌면 이 말씀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애통해야 복을 받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애통하게 될까봐 겁을 냅니다. 애통하지 않고 사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로서 교우님들이 애통하지 않고 살길 바란다는 말씀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애통은 우리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애통은 진정한 복으로 나아가는 전 과정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운 반전입니다. 주님께는 절망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것은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한 사람, 더 잃을 것이 없을 정도로 다 잃은 사람, 그래서 탄식하고 슬퍼하는 사람에게도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선언입니다. 모든 복이 사라진 것 같은 바로 그 순간에 주님은 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의 복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애통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애통하는 사람이 받는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위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놀라운 사실을 여러 차례 보여 주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잔다>고 하셨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아무 희망도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잔다>는 것은 엄청난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자는 사람은 잠시 후면 깨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야이로의 딸은 살아 일어났고, 사람들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바울 사도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는 고린도교회에 생긴 분규와 여러 가지 문제로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디도를 통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다시 바른 믿음 위에 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도 감격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3-4절에서 그는 고백하기를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애통은 과정이고, 위로는 결론입니다. 우리는 무수한 인생의 문제로 인해 애통하지만, 주님 안에서 우리가 맞이하는 결론은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너희도 죽은 것을 보고 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다 끝난 상황에서 통곡을 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대해 애통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 자신에 대해 애통해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애통이란 단어는 가장 큰 슬픔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시신이 화장하는 곳으로 들어갈 때, 마지막 이별을 할 때, 사람들은 몸부림치며 무너져 내립니다. 울다 지쳐 기절하기도 합니다. 

본문의 애통이란 단어가 사용된 용례를 찾아보면 이 단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대목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결국 애통이란 죽음이 확인되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 애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죽음 앞에서 애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절은 우리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단어는 <죽었던>이란 단어입니다. 이것은 현재 분사형인데, 앞의 주동사가 과거이기 때문에 과거로 번역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상태는 이미 죽어 있는 시체 상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모든 사람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되던 그 때로부터 죄인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적 죽음이 왔을 뿐만 아니라, 영적 죽음도 왔습니다. 하나님과의 분리, 그것이 곧 영적 죽음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시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애통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죽음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한 장송곡을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흥에 겨워 즐거워합니다. 자신의 영혼이 이미 죄로 인해 죽은 것을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시체를 앞에 두고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죄 때문에 애통하십니까?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고백은 있으나, 회개는 없는 것입니다. 아픔을 느끼지 않는 공허한 고백이 너무도 많지만, 자신의 영적 죽음에 대한 애통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애통이 있길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위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놀라운 <사죄의 은총>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본래 법학도였지만, 자신의 죄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던 중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받은 위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용서의 기쁨이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형벌로 다스리시는 무서운 진노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며 떨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시편 22편 1절을 읽으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외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외치셨는가? 죄 때문인가? 아니다. 그 분은 죄가 없으시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인가?> 

그 때 예수님께서 외치신 이유가 바로 루터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 날 대신해서 외치셨다>고 생각하자 말할 수 없는 감동이 그에게 밀려왔습니다. 그 때까지는 우리를 벌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이라 생각했었는데,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루터 마음에 은혜의 빛이 환하게 비쳐들었습니다. 

그 후 로마서 1장 17절에서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그의 깨달음에 확신을 더해 주었습니다. 시편 32편 1절을 보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는데, 이런 위로를 우리 모두가 받게 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덧붙여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애통해야 합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살고 싶어도, 또 죄를 짓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완벽하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주 죄를 범합니다. 그 때마다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심상하게 또 죄를 짓고, 또 죄를 짓는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오늘도 범죄한 이 종을 용서하옵소서>라고 눈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애통은 우리로 하여금 죄악에 무방비상태가 되어 죄를 반복적으로 저지르지 않도록 막아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애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우는 것은 너무도 이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실 때 너무도 외로우셨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위해 운 유일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여인들뿐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3장 28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저는 이 대목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예수님을 위해 울어줄 사람이 없었구나. 그래도 몇 사람의 여인들이 울어 주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주님을 위해 울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 웁니다. 이기적인 눈물뿐입니다. 게다가 그 눈물도 우리 죄 때문에 우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눈물은 가지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고, 누리고 싶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데서 오는 한풀이 눈물입니다. 그래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는 <제발, 너를 위해서는 그만 울라. 그리고 나를 위해 울어 다오>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우십시오. 그런 눈물이 있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예수님을 위해 우는 것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우는 것입니다. 즉 남을 위해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위해 우는 눈물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 무덤에 들어간 나사로를 생각하면서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머지않아 로마의 말발굽 아래 멸망할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울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의 흘리신 피가 철저히 남을 위한 것이듯이, 눈물도 남을 위한 눈물, 즉 우리를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눈물은 개인적 눈물에서 사회적 눈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통 받는 이들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에서 양 같은 사람과 염소 같은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 차이는 <굶주리는 사람, 헐벗은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아픈 사람을 보았을 때 찾아가 보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이들을 찾아가 그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양 같은 사람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염소 같은 사람들입니다. 결국 양과 염소의 차이는 눈물의 차이입니다. 이웃의 고통 앞에서 울 수 있는 사람은 양 같은 사람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염소 같은 사람입니다.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고귀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눈물을 흘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15절에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우리들에게 이런 눈물이 풍성하길 원합니다. 창고교회 성도가 되려면 남을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의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은 하늘나라 보석이 되어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우리 주변의 힘든 사람들을 보면서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대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비쳐지는 것은 비극입니다. 

이번에 중국집에서 배달원으로 살면서도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살다가 떠난 <김우수>형제는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의 쪽방 책상에 놓은 성경책은 그의 영정 사진 앞에도 놓여 있었는데, 그가 가난한 생활 중에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살았던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날 위해 우셨으니, 이젠 제가 울겠습니다>, 이게 그의 신앙고백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남을 위한 눈물은 사회적 범죄에 대한 눈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에스겔서 9장 4-6절을 보면 사회적 범죄 때문에 탄식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하시고, 심판 때 그들은 살아남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는 대한민국 사회의 죄 때문에 애통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저지르는 죄 때문에 애통해야 합니다. 정치권의 범죄, 경제적 범죄, 학교의 범죄, 여러 사회구조적 범죄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울 줄 아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욕심 때문에 추하게 우는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찾으시고, 그들에게 위로라는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시편 56편 8절을 보면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 애통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그 날까지 이 눈물이 메마르지 않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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