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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잿더미 위에서 (삼상 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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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 위에서 (삼상 30:1-6)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한 주간의 강의를 잘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 저녁마다 기도로 함께하신 장로님들, 그리고 권사님들, 또 안수집사님들과 여러 교우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도 외국에 다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비행기를 타면 승무원들이 항상 하는 안내가 무엇입니까? 혹시라도 비행기가 사고를 만나면 비상 탈출을 하는 요령을 지도하지 않습니까? 저도 한 동안은 무덤덤하게 지나쳤는데 이번에 한국에 오기 전날 제가 머물던 곳에 엄청 태풍이 몰아쳤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탈 때 긴장이 되었습니다. 저도 여행 중에 내가 탄 비행기가 가다가 이상 기류를 만날 때 무척 당황을 하게 됩니다. 심할 때는 비행기가 제멋대로 흔들릴 때가 있는데 이 땐 꼭 추락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극한 두려움이 오게 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제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LA에서 여객기가 떠서 태평양을 건너 열 네 시간 만에 서울로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객기가 열 몇 시간 동안 날면서 지정된 항로대로 나는 경우는 전체 10%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나머지 90%는 항로를 벗어난다고 합니다. 본래 항로를 벗어났다가 제자리에 돌아오고, 벗어났다가 또 제자리에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나중에는 목적지 공항에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비행기는 우리 인류가 만들어낸 최첨단 과학 장비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을 겪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목표에서 벗어나고, 실패하고, 주저앉기도 합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맥그래스 교수가 쓴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책에서 인생을 묘사한 한 구절이 참으로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짧고 상쾌한 산책일 줄 알았던 것이 미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마라톤으로 바뀐다.” 어린 시절, 철이 없을 때는 인생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걷는 산책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좀 더 걷다 보면 미처 준비가 안 된 채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되어 버립니다. 이 마라톤을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쳐 쓰러지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탈락하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지는지요. 이것이 우리가 가는 인생길입니다. 

여기에는 끝까지 완주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원치 않는 자리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거나, 아예 다시는 재기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 요즘 누가 거들 떠나 봅니까? 갈대가 상해서 꺾이면 사람들은 아무도 그 갈대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무심코 꺾인 갈대를 밟고 지나갑니다. 우리는 40대에든 50대에든 아니면 30대에라도 상한 갈대처럼 꺾일 수 있습니다. 아마 그 순간에 세상이 얼마나 야박한 곳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꺾여 버린 자에게 쌀쌀맞게 등을 돌립니다. 비정하게 그를 밟고 지나갑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 결국 견디다 못해 원수의 나라 불레셋에게 망명을 하는 사건을 보게 됩니다. 너무나 힘든 도망자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라면 모르겠는데 딸린 사람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계속 참고 인내해왔는데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결국 그의 결단은 망명이라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인생에 최대의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과 또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순간 순간 무너질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 진 것입니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절망감이 다윗에게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집요스럽게 찾아와 죽이려하는 사울을 바라보는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도망을 칩니다. 특별히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인 블레셋으로 도망친 겁니다. 그때 그의 상태를 삼상27:1-2절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일어나 함께 있는 육백 인으로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이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은 분명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한 다윗의 미성숙한 신앙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한 겁니다. 당장은 사울이 추격을 그쳤고, 아기스 왕에게 시글락 땅을 얻어 평안하게 사니까 좋아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장 평화’요 ‘적과의 동침’이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자살 행위였습니다. 잠29:25 보면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 품 안이 그 어디든 안전지대입니다. 인간 생각으로는 이스라엘 국경 내는 위험하고 블레셋 땅은 안전할 것 같지만 착각입니다. 마침내 큰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불레셋에 망명을 하고 지내던 어느 날입니다. 블레셋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위해 원정을 떠나게 되었는데, 아기스 왕이 다윗의 참전을 요구했습니다. 큰일 날 일이 아닙니까?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 이스라엘의 적군으로 참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블레셋군대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자기 나라를 치러가는 이 어정쩡하게 끌려가는 다윗과 그 부하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다행히도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블레셋 군대의 결정적 협력자가 되지 못하도록 블레셋 장군들의 마음에 '혹시라도 다윗의 마음이 변심하여 자기들에게 칼을 들이대면 어떡하나'하는 의심을 심어준 결과, 3일 만에 다시 자기 망명지인 시글락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를 따르는 일행들이 다시 시글락으로 되돌아왔을 때 그들은 기막힌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시글락을 비운 사이에 아말렉이라는 또 다른 인근 나라가 블레셋과 다윗이 이스라엘을 침공키 위해 나라를 비웠다는 소문을 듣고, 시글락을 덮쳐서 모든 집들을 다 불태우고 재산과 가축 모든 여인들은 다 잡아간 것입니다. 남은 것은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자욱한 연기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얼마나 그 상황이 비참했던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잿더미 위에서 울 기력조차도 없을 정도로 소리 높여 통곡했다고 말합니다. 

3-4절에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여기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생각해 보세요. 살아 보려고 애를 썼는데 그래서 비겁한 일인 줄 알면서도 불레셋에 투항도 했는데, 지금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게 저 불길에 쌓여 타버린 재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6절 보시면 부하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이것도 다윗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요소가 됩니다.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여기 "다윗을 돌로 치자!"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 지금 자기에게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자기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한 자들입니다. 한때는 목숨마져도 바칠 각오가 된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 자제력을 잃고 돌로 다윗을 치려고 한 것입니다. 

목숨 걸고 충성을 약속했던 부하들까지도 돌 들고 덤비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엎친 데 덥친다'는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말한 것 같습니다. 다윗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가 먼저 칼을 빼서 자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부하들에게 맞아 죽는 것보다는 자기 손으로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당하면서 죽음을 생각해보신 분이 있는 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잿더미 앞에서 다윗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마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살려고 발버둥친 결과가 이거란 말인가?”라는 통증도 일어 났을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그래도 자신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했지만, 자신이 얼마나 세상을 붙잡으려고 했나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아기스 왕에게 붙어 있는 것도 다 그런 겁니다. 특히 그의 부하들 6백 명을 많이 의지했을 겁니다. 그에게 남은 든든한 줄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썩은 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줄은 든든한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다 썩은 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다윗은 잿더미 위에서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 지를 비로서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그 사면초가와 같은 자리에서 다윗은 정말 냉정하리만큼 자신을 잘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의 한 복판에서 6절의 말씀처럼 “크게 (군급)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여기 크게 군급했다는 말은 다급했다는 말로 우리 속담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런 심정을 표현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때 다윗이 정신이 번쩍 듭니다. 아차 싶었던 겁니다. 블레셋 땅으로 망명한 것부터 잘못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봐야 되는데 ... 그때서야 절실하게 깨달은 겁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섭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절망적인 때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 속에 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힘은, 실로 위대하고 신기합니다. 하수구에서 작은 생명의 씨앗이 날아와 싹을 트는 것을 보았습니까? 집채만한 바위 밑에 눌려서도, 생명의 싹이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한서리가 내리는 겨울 산꼭대기에서도, 소나무가 사철나무 되어 올곧게 그리고 싱싱하게 살아 숨 쉬는 것을 보았습니까?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하며 허리가 꺾이고, 형벌 같은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생명을 소유한 믿음이란,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 그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여유가 있습니다. 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일을 감당합니다. 

여기 보세요. 다윗은 그 잿더미 위에서 일어서서 하나님께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1) 이 상황을 벗어 날 힘을 주시옵소서 2) 헤쳐나 갈 용기를 주시옵소서. 이것이 절망 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두 가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첫째는 잃었던 가족과 재산을 다시 찾습니다.(18-20절) 다윗과 그의 백성들이 가족을 찾으러 죽을 힘을 다해 적진에 도착하니까 이게 왼 일입니까? 

아말렉 사람들은 큰 잔치를 벌인 채 먹고 마시고 춤추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보초도 세우지 않은 채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다윗과 400명 용사는 새벽부터 그 이튿날 저녁까지 아말렉을 쳐서 잃어버린 모든 것을 완벽하게 되찾았습니다. 한 사람의 아내도 아이도 잃지 않았습니다. 빼앗긴 물건을 그대로 되찾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아말렉 사람들이 다른 마을에서 약탈해온 많은 양떼와 소떼도 전리품으로 챙겼습니다. 

둘째는 사울의 죽음입니다.(31:6) 이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은 전사합니다.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고 괴롭히던 그 사울이 불레셋과 전투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 자 때문에 몇 년의 세월을 고통 속에 보내야 했습니까? 아마 한 순간도 잊지 못할 상처를 준 사울이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비참한 최를 맞습니다.그런데 만일 다윗이 불레셋의 군대에 편입해서 전쟁에 참여했다면 이것은 군사 쿠데타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원수의 나라 힘을 빌어서 사울을 죽였다는 소문이 들리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부터 정통성을 잃어버리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 앞에 전율을 일으켰을 겁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어 가시는 가를 절실하게 깨달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우리가 때로 원치 않는 잿더미 같은 절망의 자리에 빠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무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고 심지어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다윗이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신 주님은 이 시간 나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세상을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생을 끝마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렘29:11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가 형통함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고생고생하면서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렘 애3:32-33절에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보세요. 하나님은 내가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잠깐 선한 뜻이 있어서 허용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를 평안하고 형통한 자리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삶에 변화를 원하십니까? 이대로 내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가슴에 가득 합니까? 때로는 고난과 이유 없는 고통가운데서도 절망 하지 않고 소망을 노래하며 살아갈 힘을 얻고 싶습니까? 나아가서 나의 삶의 승리뿐만 아니라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현실의 한계를 이기도록 격려하며 용기를 주는 삶을 살고 싶습니까? 내 인생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느끼며 후회하지 않을 그 삶의 원리를 소유하기를 원하십니까? 

‘데이비드 브링클리’가 남긴 말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남들이 던진 벽돌로 견고한 기초를 쌓는 사람이다.” 짧은 말이지만 제게 감동을 준 까닭은 어쩌면 이 금언 속에 우리의 생애가 담겨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인생은 반응”입니다. 똑 같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남이 던진 벽돌에 분노로 반응할 수도 있고, 감사로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남이 던진 벽돌 때문에 쓰러질 수도 있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욱 견고히 설 수도 있습니다. 인생 승리의 비결은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응에 있습니다. 

동화작가 안델센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본래 구두고치는 가난한 아버지와 남의 집에서 빨래하는 어머니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느냐 하면 그가 태어났을 때 아기침대가 없어서 어느 부자가 장례식장에 갔다버린 평상을 개조해서 아기 침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안델센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이어서 매일 밤술에 취해 돌아와 아들의 뺨을 때리곤 했습니다. 그는 단 한 시간의 문학수업도 받지 못한 초등학교 중퇴생 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나며 어떻게 그리도 아름다운 동화를 쓸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후일 이런 대답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베풀어진 축복을 붙들기로 했습니다. 나는 비록 아버지가 무서운 때도 많았지만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를 즐거워했고, 나의 가난한 다락방에 누워 상상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여전히 좋은 분이라고 믿었고 나의 가난한 집을 나의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의 역경은 나의 축복이었지요. 나는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수 있었고, 내가 못생겼다고 놀림 받았기에 '미운 오리새끼'를 쓸 수가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숱한 문제 앞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삶의 차이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사 49:16절의 말씀처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살맛나지 않습니까?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하신 그 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 어려움이 있고, 또 뜻하지 않는 문제가 있을찌라도 그 문제에 눌리지 말고 그 문제를 타고 오늘 수 있는 강한 믿음의 날개를 달고 올라야합니다. 믿음의 날개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천국의 생활을 맛 볼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날개의 힘이 없어서 높이 날으지 못하는 것이 탈입니다. 우리가 강한 믿음의 날개만 달면 그래서 높이 솟을 줄만 안다면 언제나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볼 수 있고, 바위에서 샘이 터지는 응답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능력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풍성함을 맛보는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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