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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요일 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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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요일 3:16-19)


제가 미국에 있을 때 'Scrub'(스크럽)이라는 제목의 시트콤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보았습니다.
그 연속극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병원에서 레지던트 의사로 근무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인데, 그 중에 한 명이 연말 어느 저녁에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다가 큰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날따라 유독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병들고 해서 병원에 실려 오는 비참한 모습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만약 신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고통을 인간에게 줄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다시는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자기 친구들 앞에서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 레지던트 의사는 성탄절 전야에도 병원 옥상에 올라가서 그런 고민에 빠져 망연자실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멀리 보이는 거리 모퉁이에서 무슨 별처럼 아주 밝은 광채를 하나 보게 되었고, 그 순간 즉시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곧 병원을 떠나 그 빛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게 됩니다.
가까이 가보니 그 빛은 어떤 커다란 나무에 아주 화려하게 장식된 성탄절 전등이었는데, 바로 그 나무 둥치 밑에는 이제 막 해산이 임박한 어떤 소녀가 진통을 하면서 땅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그 레지던트 의사는 즉시 그 소녀의 해산을 도와주었고 결국 그 나무 밑에서 아기가 하나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여자 친구 간호원을 위시하여 그의 친구 레지던트 의사들도 소식을 듣고 찾아와 그 나무 밑에 함께 모여서 그 새로 태어난 아기를 보면서 흐뭇해합니다.
그리고 그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에 가면, 그 드라마의 주인공인 레지던트 의사의 눈에 그 나무 밑의 장면이 마치 첫 성탄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 장소의 모습처럼 천천히 오버랩됩니다.
즉 그 사생아를 낳은 소녀가 성모 마리아처럼 보이고 그 아이는 물론 아기 예수님이 되고 그 곁에 둘러 서 있는 자기 친구 레지던트 의사들이 바로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무에 달려 있던 '성탄절 전등'은 바로 '베들레헴으로 박사들을 인도한 별'이 되는 셈이었습니다.

정말 '전형적인' 성탄절 스토리였습니다.
아마 그 시트콤을 본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성탄의 참된 의미란 바로 이런 데에 있다.'라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비단 그 드라마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끼리 서로 자비와 인정을 베풀어 줌으로써 인생의 고통들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 이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물론이요 무신론자들까지도 동의하는 '최고의 도덕'이요 누구나 다 공감할 수밖에 없어 보이는 대표적인 '사랑의 복음'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겠습니까?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약한 사람을 돕는 이것이 '부동의 제1계명'이며 곧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 구현하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말은 그 누구도 감히 반박할 수 없는 '절대 진리'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은 진정 '진리에 속한 기독신자'에게는 그런 '이웃 사랑'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랑이 있다고 명백히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신자가 참된 '이웃 사랑'을 행하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사랑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는 '이웃 사랑'보다 먼저 '하나님 사랑'부터 알아야 합니다.

본문 16절 상반절에 "16a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라고 기록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써" 즉 그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온갖 사랑을 외치고들 있지만 진짜 최고의 사랑은 이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신 이 사랑을 알아야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사랑의 종류도 세세히 따져 보면 참 많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만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진짜 넘버원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웃 사랑' 역시 고귀한 사랑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 수준에서만 말할 때에 그러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바로 그 '이웃 사랑'이 최고 수준의 사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주위의 모든 이웃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온 인류 그 누구에게나 베풀어 주는 사랑이란 자기의 애인, 가족, 친구에게만 베풀어 주는 편협한 사랑이나 자기 민족과 나라만 사랑하는 제한된 사랑보다는 훨씬 더 차원 높은 사랑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사랑'이 아무리 고귀하고 감동스럽게 여겨진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과 동일시해 버리는 것은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사이의 박애'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독특하고 특별한 사랑'을 슬그머니 덮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아까 처음에 말씀 드린 예화에 보면, 그 레지던트 의사가 처음에 가졌던 '신에 대한 불신앙'은 그가 나중에 '사람에게 베푼 사랑의 선행'에 의하여 철저히 덮여 버리고 더 이상 아무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 것처럼 종결되지 않았습니까? 
그 의사는 그 불쌍한 소녀를 도와준 그 한 가지만으로써 '최고의 사랑'을 체험한 것이며, 바로 그런 사랑의 행위 자체가 바로 그에게는 '진정한 종교'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이웃 사랑'을 가지고서 '하나님 사랑'을 완전히 '대체'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사랑'은 결코 '이웃 사랑'으로 대체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실상 이 둘은 '서로 비교될 수 있는 동급의 사랑'도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17절의 말씀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는데, 기록하기를 "17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재물로써 형제의 궁핍함을 도와주는 마음'이란 간단히 말해서 '구제사업을 통해서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박애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성경 구절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구절은 '구제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로 동격화시키지 않습니다.

본문이 그 둘 중에서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라고 말할 때 더 큰 쪽은 분명히 '하나님 사랑'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큰 것이 작은 것을 포함하며 종속시키며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형제를 사랑한다.'라는 말은 분명히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어물쩍 포장해 버리는 '인본주의 사랑'이 오늘날 모든 종교계를 비롯하여 일부 기독교계 안에까지 판을 치고 있는 형편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을 주는 것은 정말 요긴하고도 흐뭇하기 짝이 없는 선행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존재 목적이 이 세상에서 빵이나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착각입니다.
결코 오해하지 말고 똑바로 듣고 이해해야 할 것은, 교회가 물론 자선을 베풀어야 하지만 교회가 자선단체 그 자체는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 중에도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지 않고 예배당만 크게 짓고 있다.'는 따위의 졸속한 비판을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영생 구원을 빵 한쪽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천당 자체를 믿지 않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본인이 천당을 확실히 믿고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먹고도 죽을 떡 한 덩어리'를 주는 것이 '영생하게 하는 생명의 양식'을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초대교회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자'는 대 목표를 세울 때, '온 세상에 박애를 베풀고 정의를 구현하자'는 따위의 구호는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대속의 사랑을 온 세상 끝까지 전파함으로써 죄인들로 하여금 그 예수님을 믿어 '영생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일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국수를 먹여 준다고 해도 예수님의 이름 한마디도 전하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전도 행위'나 '선교 사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기독신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고 사형시키고 있는 그 최악의 공산독재자 좋으라고 쌀과 달러를 보내 주는 것이 어떻게 교회에 헌금을 바치는 것보다 더 뜻 깊은 일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냥 정치적으로만 생각해도 백번 어리석은 짓이지만 영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배교적인 일이 없는데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적 행위가 소위 '기독교적 사랑'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미명 아래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격하시켜도 이렇게 격하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착각에 빠져 있으며 이런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혹 제3세계의 불쌍한 미개인들을 다 먹여 살리는 구제사업을 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을 천당으로 구원해 주시는 이 사랑이 정말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진짜 사랑'으로부터는 까맣게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제아무리 이웃을 사랑한다 해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신 이 구속의 사랑을 모르면 아직 '최고의 사랑'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분명이 귀한 것이지만 그것을 바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오리지널'인 '하나님의 사랑', 바로 이 첫째 사랑부터 먼저 필수적으로 믿어야 함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신자는 '이웃 사랑'보다 먼저 '형제 사랑'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16절 하반절에 "16b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아까 보았던 17절에도 '형제의 궁핍함을 돕는 구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이 본문의 문단이 시작되는 13절에서도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구절들에서 '형제'로 불리고 있는 대상은 '세상의 불신자들이 미워하는 자'라고 했으니 초대교회의 '기독신자'들을 가리킴에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즉 본문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제', 우리가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해야 마땅할 형제'란 광범위한 의미의 '이웃 사람'이 결코 아니라 오직 '신앙의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 '형제 사랑'을 '이웃 사랑'과 완전히 혼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주신 유명한 말씀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명령이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과 똑같은 것이라면 '새 계명'이 될 리가 없습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은 예수님 훨씬 이전에 이미 구약에서부터 선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넓은 의미의 이웃 사랑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좀 더 친밀한 관계의 특별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요한복음 13장 34절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의 대상을 더욱 분명하게 일러주시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 '새 계명의 사랑'이란 '예수님의 제자 된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자들끼리 나누는 사랑'인 것입니다.

본문 23절도 바로 그런 새 계명을 똑같이 재차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보면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도 보면, '서로 사랑하는 형제'들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신자'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신자는 '이웃 사랑'과 '인류 박애'에 있어서도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앞장서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즉 우리가 그런 '사람 사랑' 자체를 무시하거나 폄하시키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온 인류에 대한 '이웃 사랑'보다는 신자들 사이의 '형제 사랑'이 분명히 더 고귀한 것이며 더 진한 것임을 반드시 깨닫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진짜 제자된 자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생겨나게 되어 있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최근에 '페이스북'(Facebook)에서 우리 교회의 어느 청년회원이 '오늘 아주 기분 나쁜 일을 당했다.'라는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 청년은 그날 무슨 인터넷 대화방에서 '교회가 사회사업에 제일 앞장서고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네티즌을 만나 토론을 하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토론에 소위 '교회의 사회참여의 의무'를 주장하는 상대편에만 계속 찬성자들이 늘어나면서 나중에는 이 청년이 '1대 9'의 외로운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완전히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몰리게 된 우리 교회의 청년은 온갖 비판과 비난의 공격들에 휩싸여 견디다 못해 인터넷 대화방을 씁쓸히 물러난 후에 분을 삭이지 못해서 그처럼 '씩씩거리는(?)' 호소의 글을 페이스북을 통해 교회의 청년회 친구들에게 올렸던 것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당한 일은 실로 '빙산의 일각'이 아니겠습니까?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신자들끼리의 형제 사랑'을 무슨 죄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저희들끼리만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 주지 않는다.'라는 따위의 비난을 그처럼 거침없이 퍼붓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정신을 좀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모든 것이 지극히 오도되어 있고, 무엇에 홀려도 정말 아주 크게 홀려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판단력이 완전히 상실되어 있으며 다들 지독하게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불신자들의 비위에 맞추어 주는 것'이 더 차원 높은 사랑이라는 말입니까?
교회가 성경 말씀의 원리를 따르고 지키는 대신에 그저 세상 사회의 비판에 맞추어 자신을 스스로 뜯어 고쳐야 옳다는 말입니까? 
정말이지 신앙인으로서의 연대감이나 동지애란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 아니 참된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본 신앙도 줏대도 전혀 없는 사람들의 소리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구제사업을 보면 항상 자기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또는 멀리 있는 다른 약한 교회의 성도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들이 예루살렘의 주민이나 자기네들이 살고 있던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 구제사업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진짜 신자가 진짜 신자를 보고 만날 때 절로 넘쳐 흘러날 수밖에 없는 이 진한 형제 사랑이 적어도 거지를 구제하는 사랑보다 약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똑같은 예수님을 똑같이 사랑하고 믿고 있는 신자들 사이에서만 맺어질 수 있는 영적 의리와 유대감이 막연한 인류 박애보다도 더 못한 것이 되어서야 말이나 되겠습니까?
기독신자들이 '같은 예수님 십자가의 보혈로 통하는 신앙의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정도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말이지 지극히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그처럼 '교회가 사회사업에 전력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나 형제보다도 이웃 사람을 먼저 도와줍니까?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저희들끼리만 사랑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기 아내와 자식들보다도 생판 모르는 다른 사람들을 더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혈연에 대한 사랑'이 '사회와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먼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상식이요 도리요 인륜이라면, 하물며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한 피 받아 한 몸 된 형제자매' 사이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이웃 사랑'도 분명히 귀한 사랑이며 신자로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랑인 것은 두말할 필요 없지만, 참된 기독신자에게는 적어도 그 '이웃 사랑'보다는 더 진해야 할, 그 '이웃 사랑'보다는 더 뜨겁게 와 닿아야 할 사랑이 바로 '형제 사랑'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18절과 19절은 결론적으로 강조하기를 "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형제 사랑의 계명'은 교리적으로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행동으로 지켜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것은 그저 "행함과 진실함"으로 실천하기만 하면 되는, 지극히 윤리적인 계명인 것입니다.
하지만 '형제 사랑'이 신자의 행동 윤리라고 해서 세상의 윤리들처럼 그냥 윤리 자체로 동떨어져 있는 것은 또한 아닙니다.
기독신자의 모든 '바른 윤리'는 오직 '참된 신앙'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19절 상반절은 "이로써" 즉 그렇게 형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 '진리'는 물론 신앙 교리를 말합니다.
즉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는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증명해 주게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19절 하반절에서 이어서 말하기를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라고 했는데, 이 '굳세게 하다'라는 말은 '확신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바로 앞의 19절 상반절의 문맥에서와 똑같이, 성도의 형제 사랑이라는 '행실'은 그 '마음'을 주님 앞에서 확신하게 만드는 것, 간단히 말해서 '믿음'을 더욱 굳게 만드는 일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신자는 어떤 윤리적 행위를 논할 때에 반드시 신앙과 연결시켜서 판단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윤리 그 자체로는 꽤 선해 보이고 좋은 일처럼 보여도 그것이 신앙 진리와 연결되지 않고 윤리 그 자체로만 이루어진다면 오직 헛일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냥 자기 양심상 혈육을 사랑하고 친구와 우애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적어도 성경에서 가르치는 윤리,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선행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지상에는 그저 윤리만 공감된다고 해서 종교일치 운동, 교파연합 운동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사실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 서로 해치지 말고 친절하게 선하게 의롭게 살아 보자.'라는 윤리 정도는 뭐 꼭 종교를 가지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기본 양식만 있으면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천주교나 자유주의 기독교는 바로 그런 지극히 '상식적인 윤리와 도덕'을 무슨 종교의 최고 가치나 되는 것처럼 추켜세우면서 윤리와 도덕 위에 있는 '진리와 신앙'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제나 박애라는 것은 기독신자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떠들고 내세울 것도 없는, 그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항상 실천하게 되어 있는 '기본기'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더 큰 사랑'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일의 사랑, 최고의 사랑, 궁극적인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깨닫고 실제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 세상은 바로 이 사랑을 모르는 까닭에 그저 '이웃 사랑'만이 최고인 줄로 착각하고 '사랑이 곧 하나님'이라고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높고 거룩하신 성자께서 낮고 천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이 사상 최대의 사건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무슨 사생아가 태어나는 장면과 오버랩된다는 것은 결코 안 될 일입니다.
죽어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들을 십자가로 대속하여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이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그 크신 하나님 사랑'이 레지던트 의사가 소녀의 해산을 자진해서 도와주는 정도의 인정(人情)과 동일시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해 증거해 주신 '참 사랑',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듯이 성도 역시 형제를 내 몸 같이 서로 사랑할 줄 아는 이 '진한 사랑'을 먼저 알고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진리에서 떠난 윤리'를 내세우고 '진리가 없는 신앙'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우상종교와 이단에게 현혹당하지 말고, 하나님과 형제 성도들과 이웃에게까지 베푸는 모든 사랑을 '진리에 속한 자'답게 '참된 신앙과 일치되도록'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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