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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창 19:27-29, 마 16: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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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창 19:27-29, 마 16:21-24)


어느 유태계 미국 기독교인이 딸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성지순례 중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의 총을 머리에 맞아 관통하여 현장에서 즉사하였습니다. 수사는 미궁에 빠졌고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딸은 귀국하여 아버지의 원수에게 복수할 마음으로 생활 히브리어와 현지 아랍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후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의 기자가 되어 이스라엘 파견 근무를 자청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 가서 법원의 기록을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12년에 걸쳐 밤낮으로 노력한 결과 아버지를 살해한 테러범 ‘오마르 하티브’가 수감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마침내 원수를 갚을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범인의 가족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마음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진정한 복수는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다. 물리적 복수는 동물적 본능일 뿐이다.” 음성을 들은 그녀는 결국 테러범과 가족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복수의 칼을 갈았던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범인의 가석방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복수하는 것 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로라 블루멘펠트입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복수라는 사람의 생각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용서라는 하나님의 생각이 그녀를 잠시 혼란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래 하나님의 생각이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남을 죽여 내가 사는 것입니다. 
  
중국 ‘사기’(史記)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해내존지기 천애약비린)이란 말입니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그가 이 세상 끝에 있다 할지라도 그는 내 영원한 벗이다’는 말입니다. 또 ‘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사위지기자사 여위열기자용)란 말이 있습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여자는 자기를 예뻐해 주는 사람을 위하여 화장을 고친다’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의 극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무엘상 16:7에는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깊은 생각과 뜻을 미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애초부터 사람의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락’(amusement)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말하면 생각 없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a’란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없다는 뜻입니다. ‘muse’란 말은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생각 없는 활동은 결국 무질서한 상태에 빠지게 합니다. 삶에 오락이 필요하지만 삶은 오락이 아닙니다. 생각 없이 살아도 되는 것이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야 참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베드로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그 후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잡히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말리며 “절대로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일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신령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생각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생각은 살리려고 하는 생각이다. 

마태복음 16:21에는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세 번 더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얼마 후에 죽을 것이고 그리고 다시 살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하셨는데 후에 예언대로 올라가셨습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그렇게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오신 가장 핵심적 사역의 내용은 인류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시는 것입니다. ‘제 삼일에’라고 하셨는데 제 삼일에 부활하셔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을 살리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지난 번 중국에 갔을 때에 청해성에서 양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양의 다리를 묶어 놓은 다음 칼로 목을 찔러서 피를 내고 어느 정도 피가 흐르고 나니 아예 목을 잘라버립니다. 다음에 각을 뜨고, 가죽을 벗기고, 다리를 꺾고 나무에 매달아 놓습니다. 양을 잡기 전에 나무에 묶여 있다가 잡는 곳에 끌고 오는데 안 끌려오려고 온 몸을 버텨 바닥에 끌린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습니다. 마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듯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는 자리로 가실 때에 피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피하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입으로 수난을 예고하실 때 정말 말하고 싶지 않은 피하고 싶은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일 때문에 오셨고 말하고 싶지 않은 그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려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은 마태복음 20:28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예수님을 보내실 때 처음부터 목숨을 주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사람들이 조롱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40에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대제사장들이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조롱은 조롱이 아니라 사실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십자가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십자가에서 내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만일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구원자는 아닙니다. 
  
지난 주간에 애플의 창설자요 CEO인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위대한 IT 발명가입니다. 아마 근래에 가장 뛰어난 혁명적인 발명가라고 해도 과찬이 아닐 것입니다. 며칠 째 온 세계가 추모물결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는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나 전화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에 비견될 만큼 획기적인 일을 하였습니다. 그가 죽고 나니 ‘애플의 장래가 어떻게 될까?’ 세계가 걱정하고 주시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잡스지,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나 죽으셨을 때나 위대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죽으심으로 살게 하셨기에 더욱 우리에게는 고귀한 분이십니다. 
  
찬송가 168장은 참 좋은 부활찬송입니다. 후렴을 보세요. “살아서 사랑, 죽어서 구원, 묻혀서 내 죄를 담당하사 부활로 우리를 구하신 예수 다시 오시리 영광의 그날”. 예수님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다시 오셔서나 영원히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죽으려 오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며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요한복음 3:17에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예수님의 오심에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구원받아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신의 아들딸을 구하기 위하여 불난 집에서 겨우 빠져 나왔다가 다시 불구덩이에 다시 들어가는 부모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들딸을 구해놓고 자신은 죽은 부모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어리석은 일이라고 합니까? 그런데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이런 생각을 하시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이며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생각은 인생을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늘 품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닮은 인생을 삽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닮은 인생을 만듭니다.  
  
  
둘째, 사람의 생각은 살려고 하는 생각이다. 

마태복음 16:22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죽지 않으려는 생각입니다. 죽지 말라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하든 살려고 하는 생각입니다. 베드로는 제자들 가운데 제법 괜찮은 편이었는데도 하나님의 생각보다 인간의 생각만 하였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보다 못한 사람이기에 말할 것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말했다고 합니다. ‘붙들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스라보메노스’인데 ‘프로스’라는 단어는 ‘옆으로’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람바노’라는 ‘손에 취하다, 사로잡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는 중간태 분사인데 중간태란 자기가 자기를 위한 행동을 의미할 때 쓰는 시제입니다. 마치 베드로는 자기 혼자만 할 수 있는 자기 일처럼 강압적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강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베드로의 적극성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했습니다. ‘항변하여’란 단어는 헬라어로 ‘에피티마오’인데 ‘꾸짖다, 책망하다(rebuke)’라는 뜻입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는 말은 ‘결코’(never)라는 강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일 당신과는 전혀 관계없을 것입니다’라는 강한 어조로 예수님께 말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려는 생각보다 예수님께서 수난현장에 가시면 안 된다는 인간적 생각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왜 그렇게 말렸을까요? 인간적 생각이란 이기적 생각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강하게 말린 것이 예수님을 위한 일이었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안 된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는데 예수님이 죽으시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시면 안 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왕권을 잡으셔야 제자들도 한 자리씩 할 것이 아닙니까? 이런 이기적인 마음에서 예수님께서 절대 죽으시면 안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오래 전 김형석 교수의 ‘영원과 사랑의 대화’라는 책에서 사람의 사랑은 모두가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어느 부인이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나는 어찌 살꼬?”라고 하더랍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모성애도 온전한 사랑은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모든 사랑을 다 쏟았는데 자녀가 배반하거나 말을 거역하면서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이기주의는 팽배하지만 동물 가운데는 이타주의가 아주 발달한 동물도 있습니다. 흡혈박쥐는 40시간 이상 피를 공급받지 않으면 죽는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동료를 위하여 흡혈박쥐는 자기 피를 토해 준다고 합니다. 줄무늬 다람쥐는 안전을 위하여 교대로 집단서식지 주변을 경계합니다. 그러다가 포식자가 나타날 경우에는 경보발령 소리를 내어 동료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한다고 합니다. 암사자는 집단의 생존을 위해 협동 사냥을 합니다. 사냥을 한 다음에는 자신이 가장 나중에 허기를 달랜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동물이 사람보다 낫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아프리카에 의료선교사로 가 있는 해리 크라우스는 ‘비밀은 몸에 있다’(The Cure)라는 책에서 암은 가장 이기적인 병이라고 합니다. 암은 언제나 사랑과 반대로 행동합니다. 암세포는 주변 세포들에게 유익을 전혀 끼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한테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나를 먹여줘요”라고 부르짖는답니다. 그래서 자기만 살려고 하고 다른 모든 것을 죽이니 결국 사람의 생명까지 빼앗습니다. 
  
김구선생께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에 한 청년이 권총으로 김구선생을 죽이려고 중국에 까지 와서 활동하다가 독립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를 체포한 독립군이 김구에게 와서 “선생님을 죽이러 온 한국 동포를 잡아 데리고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김구선생은 맨발로 그를 얼싸안고 “객지에서 조국의 동포를 만났군요. 반갑습니다. 이 부족한 김구를 만나러 왔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너무도 감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심으로 반갑게 뺨을 비비는 김구선생을 미워할 수 없어 그는 총을 거두고 김구선생의 충성스런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김구선생을 위해 목숨을 내 놓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김구선생의 어머니는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자기를 죽이러 온 원수까지 용서하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죽기 싫어하고 살려고 애를 쓰지만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삽니다. 이순신장군은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라 하였습니다. 살기를 청하는 사람은 죽고, 죽기를 청하는 사람은 산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의 원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늘나라의 원리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하나님의 생각이 지배해야 좋은 기도입니다. 
  
사도행전 21장에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가이샤라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도자 빌립에게 네 딸이 있었는데 예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딸이 띠로 수족을 묶고 이 띠의 임자가 결박을 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체포와 고난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 바울은 사도행전 21:13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인간의 생각은 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죽지 말게 말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하나님의 생각,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말리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생각이란 결국 사탄의 생각입니다. 사탄의 일입니다. 사탄이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에게 이용당하여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는 일 없어야 할 것이니다. 

  
결론 

‘창끝’이란 영화를 통하여 잘 알려진 인물이 있습니다. 짐 엘리엇이란 젊은이입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다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에콰도르 아마존 유역의 아우카 인디언을 전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955년 5명의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선교에 힘을 모으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1956년 1월 소형비행기를 타고 아마존 강을 따라가던 이들은 아우카 인디언을 발견하고 비행기를 착륙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착륙 즉시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2년 후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다른 미망인들이 다시 아우카 전도를 결단하고 이곳으로 갔습니다. 남편과 젊은 선교사들이 죽은 이곳에 가서 전도한 결과 많은 결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본국의 많은 청년들이 선교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짐 엘리엇은 인디언과 생명을 맞바꾼 것입니다. 그는 이런 훌륭한 글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나는 아우카 족의 구원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장수하는 삶이 아니라 주 예수님처럼 충만한 삶을 원합니다.” 그는 29세에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숭고한 정신과 신앙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 사로잡힌 자이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코니시가 쓴 ‘기독교 역사 100장면’이란 책에는 짐 엘리엇의 사건을 기독교 전 역사의 100장면 중의 하나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놀라운 기독교의 역사를 창조합니다.  
  
요한복음 12:24에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불합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으로 보면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시기 위한 삶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희생의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죽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죽을 줄 아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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