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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세계의 갈등 (시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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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의 갈등 (시 14:1-7)
  

이 세상에는 항상 두 세계가 공존합니다. 빛과 어둠, 진리와 비진리, 높음과 낮음, 하늘과 땅이 바로 그 예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과 악,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천국과 지옥, 이생과 내생, 남과 여, 젊은이와 노인도 서로 공존합니다. 이 두 세계는 서로 대치하기도 하고 서로 견제하고 갈등하며 때로는 조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든 이 두 세계 중 하나에 속하게 됩니다. “나는 중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중간은 없습니다. 

자세히 보면 어느 쪽인가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더 기울어진 사람이 있고 덜 기울어진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종교에도 해당됩니다. 이 세상에는 종교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종교들도 크게 두 세계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유신론적 종교이고 또 하나는 무신론적 종교입니다. 유신론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사람은 모두 이 두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중간 위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세상은 이 두 세계가 존재하며 서로 갈등하기도 하고 대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도 이런 두 세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무신론적 세계관과 유신론적 세계관입니다.

무신론적 세계관

무신론적 세계관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세계관입니다. 1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신론적 세계관입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히브리말로 “나발”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외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한 내적으로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이 “나발”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펴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하신 즉 ...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노아의 홍수 때와 소돔과 고모라의 당시 세상의 부패상을 상기하여 지은 말씀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무신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무신론적 세계관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과 자신의 생각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자연과 오늘의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 영적 세계, 내세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 세계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4절 끝을 보면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관을 닫힌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유신론적 세계관 

유신론은 무신론과 반대의 개념입니다. 이 세상에 무신론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이 있으면 밝음이 있고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고 불의가 있으면 진리가 있듯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골똘히 찾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5절을 보면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계에 계심이라”고 하였고 6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유신론적 세계관입니다. 이 유신론적 세계관은 현재의 자연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넘어 천상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현실의 세계를 넘어 영적인 세계를 보고 오늘의 역사를 넘어 다음의 세계를 믿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관을 열린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닫힌 세계관은 하나님께서 오늘의 세계와 역사를 향하여 간섭하고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닫힌 역사관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닫힌 역사관에서는 인생의 엄숙함이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역사관의 인생관이 무섭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 닫힌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권세를 가지게 되면 무서운 독재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히틀러, 무솔리니, 김일성, 일본 군국주의가 바로 이러한 인생관의 사람들입니다. 

캄보디아에는 폴포트 정권 때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해골이 오늘날 전쟁기념관에 수북하게 쌓여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신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두려운 대상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집안에 무서운 존재가 없으면 아이들이 버릇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신론적 열린 역사관을 가지게 되면 오늘의 세계와 역사뿐 아니고 오늘과 내세와 초월세계를 인정하게 됩니다. 또한 그 세계가운데 계속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섭리하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관을 열린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삶에 엄숙함이 있고 하늘을 두려워하고 언제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을 해도 정도를 넘지 않고 크게 타락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지어도 정도를 넘지 않고 흉악한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또한 넘어져도 아주 넘어지지 않고 금방 일어서게 됩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이 두 세계관이 서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 두 세계관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시편 14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지만 모두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모습을 보면서 통탄하여 이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통해 “너희들이 바로 무신론자들이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껍데기와 모양만 하나님 백성이지만 그 안은 무신론자들보다 더 타락하고 부패하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로 에베소서 4장 17절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오직 너희는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무신론자 보다 하나님을 어렴풋이 아는 무신론자들이 더 무섭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설명하고 전하면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렴풋이 아는 사람들이 타락하고 부패하면 더 무서운 사람이 됩니다. 심지어는 적그리스도가 됩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타락한 경우입니다. 사탄도 천사가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타락함으로 사탄이 된 것(사 14:12-15)입니다. 오늘 안티 기독교인들도 기독교를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전에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거나 신자들한테 혐오감을 느끼고 상처받아 떠나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잘 알기 때문에 기독교를 비판하고 스스로 안티가 되고 무신론자가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시를 통해서 자신은 하나님 백성이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지만 다윗이 볼 때는 무신론자들과 같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을 보고 책망한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지적입니다. 이 지적은 오늘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의 옷만 입었을 뿐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다윗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인생의 3때 

사람의 일생에는 3때가 있습니다. 한때는 “태어나는 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태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이 태어나는 시간은 인생을 출발하는 시작의 시간입니다. 모든 일에 출발이 좋아야 하듯 사람의 출생도 모든 가족들이 기다리고 축복하는 가운데 시작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출발이 좋아야 결과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육상대회에 나왔던 우사인 볼트라는 선수를 보십시오. 출발이 좋지 않으니까 결과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결혼도, 부부됨도, 첫아이를 낳음도 엄숙함 속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특히 어린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시간은 더 엄숙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하고 아이가 물으면 “어떻게 하다 보니 실수해서 네가 태어났단다.”하고 대답하는 것은 부모로서의 대답이 아닙니다. “너는 온가족이 기도하고 기다리는 중에 태어났단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출발이 좋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는 인생의 시작의 때 즉 태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 때는 “죽음의 때”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28절에는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모든 가족들의 기다림과 축복 속에서 행복하게 태어나야 하고 또 나의 생명이 다하는 날 그 시간도 엄숙하게 맞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 자체가 엄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마지막 순간을 참 멋있게 장식하고 아주 부드럽게 운명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노년의 인생을 멋있게 살고 또 멋있게 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세 번째 때는 “하나님 앞에 서는 때”입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을 보면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시간이요 그 다음은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대목이 우리의 삶을 더욱 엄숙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오늘의 본문 1절을 보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 생각이 참으로 무서운 생각입니다. 

그 결과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자세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으며 4절을 보면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인생관입니까. 

우리는 장차 두 가지 엄숙한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는 죽음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엄숙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의 장소에서는 말도 줄이고 웃음도 줄입니다. 그만큼 죽음은 엄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한 시간은 우리들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간 대로 심판을 받는 시간입니다. 장차 우리는 모두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간 때문에 이 세상을 함부로 살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두 시간을 학수고대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 죽음의 시간은 쉼의 시간이었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은 면류관을 받고 공로를 인정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평생을 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전도하고 예수를 전하는 삶을 살았기에 그는 마지막 그 시간을 마음 놓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신론자들은 그 시간을 억지로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의 개념 속에는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 따위는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장차 있을 심판이나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 따위는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정말 무신론자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종말의 순간이 다가와도 “나는 무신론자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솔직해야 합니다. 

히브리인의 격언에는 사탄도 중병에 걸리면 천사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포악한 사형수들도 사형당할 시간이 다가오면 모두 천사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악한 사람이 선해졌는데 굳이 사형시킬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 삶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그동안 논란을 일으켰던 임신한 아내를 살해한 어느 의사가 20년 형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아내는 한 달 후면 아이를 해산할 임산부였습니다. 그런데 산모와 아이가 함께 죽었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했지만 재판부는 남편이 죽였다며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여기서 남편이 죽였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이것의 진위여부는 오직 남편인 의사 자신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언제까지 그 마음의 비밀을 영원히 감출 수 있겠습니까. 장인이 연락받고 딸의 집에 가서 제일 먼저 사위를 만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하며 사위를 안으려 했더니 사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에 상처가 나 있었는데 장인은 사위가 범인이라고 직감했다고 합니다. 아내 뱃속에는 한 달 후면 태어날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 아내와 아이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위의 태도가 그렇게 냉정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장인이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용서하고 다 잊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는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능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 

그러면 하나님의 이 세상을 향한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요?. 본문 7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였도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회복이고 구원입니다. 이 세상은 타락으로 손상되고 훼파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상의 타락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을 보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7절에서 고백하기를 “그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는 이 세상의 회복이고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구속의 절차를 밟으셨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구속을 통해서 이 세상을 회복하셨습니다. 

오늘 이 세상의 성도들은 모두 이 구속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회복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구속에 참여한 성도들은 본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드신 목적을 충실히 준행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먼저 믿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책임이 참 큽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교회 내에서도 무신론자들이 발생하고 안티 기독교인들이 많이 발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심하면 어느 때인가는 내가 무신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이 이 시를 쓰게 된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내 주위를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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