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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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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11-14)
 

요즘 사람들은 정체성이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육체적으로 완전한 남자인데도 여자처럼 꾸미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性) 정체성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법적으로는 미국 국민이지 한국 국민이 아닙니다. 그러나 생김새나 관습이나 사고방식 등은 여전히 한국인입니다. 이럴 경우에, 그 사람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에 적응하면서 살아갑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미국인으로, 한국인들끼리 만나면 한국인으로 행동합니다. 이런 사람은 두 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두 정체성 간에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동되지 아니하는 확고한 자아 정체성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매사에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정체성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를 영적인 정체성이라고 이름 붙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영적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셨으므로 언제든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셨으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할 때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또는 “천부”라고 호칭하셨으며,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심으로 믿는 자들의 자아 정체성을 명확하게 해 주셨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성도들의 영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다양한 호칭이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였고, 로마서 8장 17절에 보면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녀 곧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정체성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호칭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너, 하나님의 사람아!” 라고 불렀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사람이란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아봅시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의 사신(使臣)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호칭은 아무에게나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만큼 ‘하나님의 사람’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호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자로서 일하는 디모데에게 ‘너,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복음 전도자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부여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신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 사역자들만 ‘하나님의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에베소서 2장 19절에 이르기를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한 가족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자손보다 더 큰 특권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람’ 외에도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써 사서 자기 소유로 삼으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받은 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이지, 우리에게는 이 같은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우리의 구원 받기 이전과 이후의 실상을 이같이 말씀합니다.

“1)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이 말씀과 같이,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한 사람도 구원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삼으시기 위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너희” 속에는 사도들 뿐 아니라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힘입어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시험과 역경을 겁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롬 8:28). 

두 번째로, 하나님의 사람이 피할 것과 추구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요즘 ‘도가니’라는 영화가 우리 사회에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도가니’는 몇 년 전에 광주에 있는 모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일어났던 성폭력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이 사건이 사회 문제가 된 것은 청각장애인 학생들을 성폭행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그 학교의 교장 선생님, 행정실장, 보육교사였기 때문입니다. 그 성폭행 사건이 불량배나 강도에 의해서 저질러졌다면 이번처럼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얼마든지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번 사건은 모든 폭력으로부터 어린 장애인 학생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진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입니다. 교육자로서 피해야 할 것이 있고 추구할 것이 있는데,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이와 같은 비극적인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피할 것이 있고 추구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피할 것이 무엇일까요?  디모데전서 6장 1-10절에 근거해서 알아봅시다.

첫째로,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 무례한 언동을 피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주 안에서 한 형제들입니다. 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깁니다. 몸인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서로 사랑으로 하나 되고 서로를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무례한 언동이 어울리지 않으므로 피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단적인 교훈을 피해야 합니다.

이단은 사도 시대 뿐 아니라 어느 시대나 있습니다. 그러나 말세가 가까운 지금, 이단은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불신자들이 아닌 믿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아서 끈질기게 미혹합니다. 흔히 친분 관계를 이용해서 다가옵니다. 거절하지 못하도록 부득이한 사정을 말하고 ‘자기 낯을 보아서 한번만 그들의 모임이나 성경공부에 참석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허용이 치명적인 파멸을 불러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이단에 넘어간 사람은 아무리 친분이 좋더라도 냉정하게 대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혹 이단에 속한 사람과 접촉한 일이 있으면 곧바로 담임 목사인 저에게 와서 그 사실을 말하고 처방을 받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단에 대한 적절한 예방 조치는 우리 영혼을 파멸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교만을 피하고, 변론과 언쟁, 투기, 분쟁, 다툼, 비방, 악한 생각, 

마음의 부패 등을 피해야 합니다.

성경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교만이 자리 잡으면 곧 이어서 변론과 언쟁, 투기, 분쟁, 다툼, 비방, 악한 생각, 마음의 부패 등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천사장 루시퍼가 교만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마귀가 된 사실과, 또한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한 생각을 품었을 때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였던 사실을 기억하고 교만을 멀리해야 합니다. 

넷째로,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과 돈에 대한 애착을 피해야 합니다.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은 곧 정욕을 말합니다.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피해야 합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눈의 쾌락을 추구하는 안목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재산을 자랑하는 것 곧 이생의 자랑을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활하는데 돈이 필요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돈이 만능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리하면 믿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에 대한 욕심, 돈을 사랑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피해야 할 악덕들을 이같이 언급했습니다.

“1)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에 언급한 19가지 악덕은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것이 아니고 보편적인 것이 된 지 오랩니다. 이 세상은 점점 더 개선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악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선량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악해져 갑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 언급한 19가지 악덕이 더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같은 악덕들을 가까이 하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이 석탄더미를 멀리 피해서 지나가듯, 우리는 사도가 열거한 모든 악한 것들을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세속의 더러움과 죄악에 물들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전혀 깨끗한 삶을 사노라고 자부한다면 그 편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신 대로, 다시금 정결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첫째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취해야 합니다.

세상은 불의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불경건하고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지만, 성도는 경건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해야 합니다. 세상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인 성도는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세상은 서로 미워하지만, 성도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세상은 조급하지만, 성도는 오래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사납지만, 성도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는 우리 주 예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운동경기에 비유합니다. 히브리서 12장에 이르기를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선수는 할 수 있는 대로 가벼운 복장을 하고 달립니다. 그뿐 아니라, 선수는 결승점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달립니다. 중도에 그만 두면 실격하고 맙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 믿음의 경주에 출전한 선수들이므로 승리의 면류관을 받기까지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울 때 영생을 취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영생을 얻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요 3:16)고 했습니다. 

셋째로, 성도들은 앞에서 명한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지켜야 합니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이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날 때가 올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그 날이 바로 그 때입니다. 

그 날에, 세상 나라들은 주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고, 주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주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 있던 성도들은 홀연히 그 몸이 변화하여 공중으로 끌어올려져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며, 그 때부터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지구가 영원할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의 시작이 있었듯이 끝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말세의 징조들이 하나씩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빈발하고,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 가뭄과 기근이 확산되어 가는 것, 물질만능주의 사조가 번져나가는 것, 사람들의 심성이 점점 더 사악해져 가는 것,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 사람들의 지식과 기술의 발달, 세계 종교의 출현을 위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것. 등이 다 종말의 징조들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이 같은 현상들을 보면서 주님의 강림이 임박했음을 감지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같이 권면합니다.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

이 권면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귀가 아프게 되풀이해서 말해 줄지라도 마이동풍(馬耳東風) 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는 그저 입으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을 줄로 아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받지만, 구원을 받으려면 주님께 대한 믿음을 변치 말고 지켜나가야 합니다. 언제까지 지켜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믿음을 지켜야 생명의 면류관 곧 영생을 얻습니다. 이는 믿음의 길에서 중도에 탈락하는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경기에 출전한 선수가 상을 타려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듯이, 성도들도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변치 않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믿음을 훼손시키려는 방해 거리가 많습니다. 이 시대는 참된 믿음을 지켜나가기가 무척 어려운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핍박이 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너무나 핍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핍박이 없다보니 신자들의 신앙이 온실에서 자란 화초처럼 유약해서 작은 시험에도 겁을 먹고 넘어지고 물러갑니다. 

그뿐 아니라, 세속의 물결이 홍수처럼 밀려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세속에 물들어 믿음 생활을 등한히 하기 쉽습니다. 단단히 결심하지 않으면 믿음을 지켜나가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하나님도 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둘 가운데 한 편을 택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는 우리를 보고 “너, 하나님의 사람아” 라고 호칭했습니다. 이 거룩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이름은 우리의 의로움이나 공로로 받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저와 성도님들은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파격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구원 받는 믿음이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의 정체성을 갖고 오늘 본문이 명한 바와 같이, 피할 것들을 피하고, 취할 것들을 힘써 추구함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서 영생을 취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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