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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 20: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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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 20:29-34)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2006년 12월 30일자 조선일보 제1면 톱뉴스에는 매우 특이한 기사 하나가 소개되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슈가 아닌, 전남 담양군에 살던 한 평범한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제목은 “27년 만에 본 아름답고 이상한 세상”이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41세가 된 농부가 각막 이식 수술로 시력을 되찾는 순간의 감동을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그 농부는 7살에 눈을 다쳐 14살에 완전 실명을 했었는데, 수술로 27년 만에 눈을 다시 뜨게 되었습니다. 수술 직후 한줄기 빛이 오른 쪽 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의 시야에 처음으로 포착된 것은 그의 아내와 세 아들들의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보는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과 피부 빛이 얼마나 아름답고 곱게 느껴졌던지, 그는 연신 ‘고와, 고와’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는 밖으로 나와 석양으로 물든 빨간 하늘빛이 얼마나 예쁜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날아가는 새,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리고 서서히 깊어가는 어둠의 신비, 마침내 밤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 그 어느 것 하나 황홀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27년 만에 눈을 뜬 사람의 감격적인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오랫동안 앞을 보지 못했던 맹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된 감격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9-30절에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맹인 두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병행구절인 막 10:46절이나 눅 18:35절을 보면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 한 사람을 고쳐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마태는 비교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반면, 마가와 누가는 당시에 이 사건으로 유명해진 바디매오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소경과 죄인을 아주 밀접하게 관련을 시켜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경이나 죄인에게는 공통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둘 다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맹인이요 거지인 바디매오’란 말대로 맹인들의 특징은 가난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일할 적당한 직장이 없습니다. 혹 있다 할지라도 몸이 건강한 사람과 경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맹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은 사람들 다니는 큰길에서 동냥하는 것이 이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국가에서 시각 장애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기술을 가르칩니다. 안마사 자격증도 그 일부입니다. 그러나 인권도 사회적인 복지 정책도 없었던 2천 년 전의 맹인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맹인들은 물질적으로 빈곤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빈곤했습니다. 왜냐하면 보지 못하니까 글을 읽을 수가 없고, 따라서 책 속에 있는 심오한 진리를 터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당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경배할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맹인들은 부정을 탄다고 해서 죄인 시 하고 격리 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소외되고 불쌍한 맹인들에게도 어느 날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놀라운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두 눈을 멀쩡하게 뜬 사람들도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해서 어떤 이는 세례 요한, 어떤 이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 어떤 이는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았으나 맹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타나리라는 언약을 주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부를 때에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맹인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에 보통 사람들처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능력이 있다는 단순한 신앙을 넘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의 주인공,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은 두 맹인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를 지르며 외치자 ‘잠잠 하라’고 하면서 꾸짖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들지 말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시끄럽다고 야단쳤습니다.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누가 그렇게 비난하고 꾸짖으면 창피해서 가만히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맹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일생에 있어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는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두 소경이 사용한 마지막 무기는 예수님께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 지른 것이 아니라 기도를 뜻합니다. 예수님께 울부짖으며 드리는 기도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어려운 일, 괴로운 일, 힘든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을 해주실 줄로 믿고 부르짖으십시오. 새벽마다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꼭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인들의 그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가시던 걸음을 멈추고 머물러 서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많은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고, 또 예루살렘에 서둘러 올라가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구하는 이 절박한 사람들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우고 본받아야 할 주님의 영혼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시급하고 우선되는 것이 영혼들을 살리는 일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며, 이 사실을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맹인들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실 때 즉시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거지들이 구하는걸 보면, 대개 같은 내용의 말들입니다. 밥 한술 달라던 지, 한 푼 적선하십시오! 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이 맹인들은 밥도, 돈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실 때,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이 맹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밥이나 돈보다도 그이 눈을 뜨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맹인에게 있어서는 눈을 뜨고 보게 되는 일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주님께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맹인들의 애절한 소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불쌍히 여기사’ 라는 단어는, 빚 때문에 근심하는 종을 불쌍히 여긴 주인과, 탕자를 불쌍히 여긴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오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들을 마치 목자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심정을 표현할 때 사용된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임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 그분의 자비와 긍휼을 구할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맹인들의 눈을 만지셨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불구자를 부정한 자로 여겼기 때문에, 이 시각 장애인들의 눈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누구의 손으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맹인들의 눈은 육체적인 장애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와 외로움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만 가지고도 그들의 눈을 보게 하실 수 있었지만, 그들의 눈을 직접 만져주심으로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전달해 주어, 육체의 장애뿐만 아니라, 마음의 장애도 어루만져 고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그들의 눈을 어루만지자, 드디어 맹인들은 눈을 떠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기쁨, 그들의 감격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인 것입니다. 맹인들이 고침을 받은 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은혜 받고 고침 받은 후에는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맹인들은 가던 방향이 바뀌어졌습니다. 그들은 여리고에서 왔습니다. 다시 여리고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리고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가시는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삶의 방향전환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삶의 방향을 바꿔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교훈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기회를 잘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 여리고를 마지막으로 지나가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얼 마 되지 않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맹인들이 만일 그 때에 기회를 놓쳤더라면, 그들에겐 두 번 다시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맹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천재일우의 기회를 바로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때에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 때에 기회를 놓쳤더라면 그들은 평생을 맹인으로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기회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공부할 때가 있습니다. 효도할 때가 있습니다. 젊을 때가 있고, 건강할 때가 있고, 일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건강할 때에 몸으로 충성하고, 물질 주실 때에 하늘나라에 보물을 많이 쌓고, 직분 맡겨주실 때에 감사하며 충성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습니다. 회개해야 할 때, 은혜 받을 만한 때가 항상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기회를 놓쳐버리지 말고, 잘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응용물리학 박사이며 원자력연구원이고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냈던 정근모 장로에게는 아주 후회스러운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고등학교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인 김재익 박사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당시에 김재익 박사는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꼭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었던 정근모 장로는 몇 번씩 자리를 만들었지만, 그때마다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곤 했습니다. 김재익 박사가 대통령을 수행해서 동남아로 떠나기 전에 그들은 또 한 번의 만남을 가졌지만, 망설이다가 결국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다음 기회로 미룬 채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정근모 장로는 중국으로 회의차 출국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있던 정근모 장로에게 ‘아웅산 폭발사건’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김재익 박사는 그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정근모 장로는 가장 절친했던 한 친구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중국의 한 호텔 방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해야만 했습니다. 이렇듯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하는 귀중한 일이라면 절대로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속히 주님께로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2. 영안이 밝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맹인이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있습니다. 또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문맹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맹인 중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영맹이라고 부르는 영적인 맹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물질세계와, 영적 세계를 주셨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눈을 ‘아인’이라고 합니다. 이 ‘아인’이라고 하는 말은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샘’이라는 말이요 ‘원천’이라고 하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다시 말하면 눈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 모든 경험, 또는 지혜의 샘이요, 지혜의 원천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우리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히브리인들은 눈을 가리켜 원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식물학자가 한 그루의 나무를 보는 것과, 보통 사람이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보통 사람은 깊은 관심이 없이 봅니다. 나무가 크다, 작다, 무슨 나무냐, 멋이 있다, 그런 정도로 봅니다. 그러나 식물학자가 볼 때는 무슨 과에 속하는 어떤 나무인가, 몇 년 되었을까, 영양상태가 어떤가, 이 나무는 이 토양에 잘 맞지 않는다, 이런 지식과 전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봅니다. 보는 눈이 벌써 다릅니다. 

그래서 관(觀)하면 보통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샅샅이 보고, 주의 깊게 보고, 의도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인생관이라 하고,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역사관이라 하고, 가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가치관이라 하고, 국가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국가관이라 하고,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람은 죽음 다음으로 암 또는 실명을 무서워한다고 합니다. 눈으로 생활 정보의 85%를 감지하는데, 실명하면 그것을 다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보는 것의 중요성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선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본다고 하면서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자신이 맹인인줄 아는 맹인은 더 이상 맹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맹인이면서 맹인인줄 모르는 인생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의 인생을 산 헬렌 켈러 여사에게 누군가가 물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헬렌 켈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처음에 눈이 멀어 볼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성장하여 깨달은 것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는 보면서도 숲은 보지를 못하는 사람이 있고, 새는 보면서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는 보면서 그 우주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 역사는 보는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보지를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을 가지고도 하나님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참 모습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도 영원한 세계도 보지 못하는 인생, 이런 사람들을 성경은 바로 영적 맹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눈 뜬 소경이요 당달봉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마음눈 곧 영안이 열려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기업의 영광, 그 기업의 풍성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왜 우리가 그 기업의 영광이 풍성함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까? 그것이 가져오는 말할 수 없는 위안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고난을 이길 수 있으며, 죄를 버릴 용기와, 또한 육체를 죽이고, 성결한 생활을 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시선을 돌리십니까? 

우리들이 영적인 사람들이면 사람일수록, 하늘나라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가 주님께 진정으로 간구할 것은 맹인들처럼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혼의 햇빛 예수님 가까이 비춰주시고 이 세상 구름 일어나 가리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돈에 눈이 멀고, 쾌락에 눈이 멀고, 탐욕에 눈이 먼 당달봉사가 아니라, 항상 밝은 영안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천성을 바라보며 살게 되시기를, 영혼의 햇빛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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