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울며 씨를 뿌리는 자 (시 126:5-6)

첨부 1


울며 씨를 뿌리는 자 (시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5-6)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울음과 눈물입니다. 그 후 일생동안 수많은 울음과 눈물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기뻐서 우는 눈물, 슬퍼서 우는 눈물, 때로는 억울해서 우는 눈물, 때로는 외로워서 우는 눈물 등 수많은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의 눈물 속에서 떠나가게 됩니다. 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세상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살다가, 눈물 속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러한 눈물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각기 의미가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우는 울음은 살아 있음을 알리는 생명의 신호입니다. 살아가면서 흘리는 눈물은 인간다움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끔 사악한 사람을 향해“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하며 증오하게 됩니다. 인간다움의 요소는 사랑인데, 눈물이 없다는 것은 인정이 메마른 증거로 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떠난 뒤 그 사람의 죽음을 두고 주위의 사람들이 슬퍼하는 정도에 따라 그가 살아온 삶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장부는 평생 동안 세 번 박에 울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물은 나약한 자의 모습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말 같습니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신의 힘만 믿고 살아가는 불신 세계에서의 강인한 모습을 나타낸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에“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눈물을 흘리라”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어떤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1. 통회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2절 말씀에“애통하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크게 힘입은 사람들은 깊은 통회의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날 자신의 부끄러웠던 죄악 된 삶을 뉘우치며 깊이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바르게 살지 못한 지난날의 삶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고 죄송하여 참회하며 흘리는 눈물입니다. 고귀한 시간들을 헛되게 보낸 것이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나 같은 죄인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입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통회의 눈물을 흘린 대표적인 사람은 구약성경의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참회하며 뉘우치는 모습에 대해 시편 6편 6절에 기록하기를“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뉘우치며 흘린 눈물이 침상을 띄웠고 요를 적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을 정결케 하시고 넘치는 복을 주셔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더 없이 귀한 인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신약성경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를 들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날 밤, 재판 받으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정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새벽닭 울음소리에“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태복음 26:34) 하신 말씀과“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태복음 26:35)라고 말한 자신의 약속에 양심이 찔려 심한 통곡을 했습니다(마태복음 26:75). 이러한 베드로의 통회의 눈물을 보신 예수님은 그의 죄를 정결케 하시고 대사도로서의 사명을 다하도록 하셨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일평생동안 새벽닭 울음소리만 들으면 잠에서 깨어나 그때 일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흐르는 빗물이 더러운 것들을 씻듯, 뉘우치는 마음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죄악을 씻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시편 51편 17절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34편18절에는“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시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는 복된 시간입니다.

2. 간구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답답하고 괴로운 나머지 한숨과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눈물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 하소연하는 눈물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날 우리들이 눈물을 흘려야할 때와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입니다. 본문에“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간구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의 씨를 뿌리면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의 열매로 기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열왕기하 29장에는 히스기야 왕의 투병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건강했던 왕의 몸에 무서운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소생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향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열왕기하 20장 5절~6절에 말씀하시기를“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15년을 더할 것이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히스기야의 건강은 회복되어 15년의 생명을 연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계시는 동안 통곡의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5장 7절에 예수님의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하셨습니다.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힘이 있습니다. 빗물이 모이면 강물이 되어 농사를 짓게 합니다. 공장의 기계를 가동시킵니다. 각 가정에 생활용수를 공급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늘로서 내리는 빗물이 삶의 원천이 되는 것같이, 성도가 하나님을 향해 간구하며 흘리는 눈물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1940년 5월 13일 독일의 공격을 받은 영국은 중대한 국가적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때에 윈스턴 처칠은 전시내각을 구성하면서 영국 국민들에게 호소하기를 “내가 바칠 수 있는 것은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밖에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호소를 들은 영국 국민들은 모두 조국애로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영국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눈물은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는 전기와 같습니다. 전기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만 스위치를 누르지 않는다면 어둠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도 전기와 같이 항상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러나“주여”하고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기도가 없다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광명한 삶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두운 방에서 스위치를 켤 생각은 하지 않고 어둡다고 불평만 하고, 내가 있는 방만 왜 이렇게 어두우냐고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전기는 아주 가까운 데까지 와 있어서 스위치만 누르면 밝은 빛이 방안 가득히 비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내 삶속에 나타나시도록 하기 위해“기도”라고 하는 스위치를 켜야 합니다. 기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문을 열게 합니다. 기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내 생활 속에 이끌어 오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만이 우리 삶의 허다한 문제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의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서 전기 스위치를 켜듯, 기도의 스위치를 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4장 6절~7절에“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말씀하셨습니다.

3. 방탕한 세상을 향한 탄식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멸망당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에 대해 누가복음 19장 41절-44절에 기록하기를“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실 때에 많은 여인들이 슬피 울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알지 못하는 이 불쌍한 무리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28)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견하신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루살렘은 주 후 70년 로마에 의해 처절한 멸망을 당했고 그 후 2천 년 간 나라 없는 민족으로 세계를 방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도 부패한 세상을 향해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며“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편 119:136)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타락한 세상을 향해 안타까워하며 흘리는 눈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범죄를 일삼는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한없는 탄식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레미야애가 1장 1절에 기록하기를“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라고 했으며, 예레미야애가 2장 11절에도“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멸망이 예견된 나라와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거리를 뛰어다니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멸시와 천대와 모진 핍박뿐이었습니다.“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예레미야 20:8)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신도 인간인지라“이제 나도 입을 다물고 좀 편히 살자.”라고 하면서 회개의 복음 전함을 중단했습니다. 몇 날이 못 되어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20장 9절에 말하기를“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의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문명이 점점 더 발달해가고 있습니다. 경제는 날로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넉넉한 세상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입니다. 넓은 지구 구석구석을 어디든 마음대로 왕래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지구촌이라고 합니다. 2~30년 전에 비하면 꿈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살맛나는 세상입니다. 영영토록 이 세상에 머물러 살고 싶은 세상입니다. 이 좋은 세상에 하루라도 더 머물러 살며, 즐기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건강관리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과연 이 세상이 그토록 살기 좋은 곳일까요? 그것은 겉모습뿐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한 자락을 제치고 살펴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악해져 가는 세상입니다. 요즘 매일 2~30대 젊은이들이 하루 평균 30여 명씩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성을 매매하는 퇴폐문화가 세계 2위라고 합니다. 음성적인 것을 다 합한다면 단연 세계1위를 넘은지가 오래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죄악은 하나님의 진노의 검불을 쌓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세상을 향해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 26절~30절에 말씀하시기를“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하셨습니다. 

또한 세상종말에 대하여 베드로후서 3장 10절~13절에 말씀하시기를“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타락해 가는 이 세대를 향해 애 타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방탕한 세대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빛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캄캄한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에게 안전한 항구의 위치를 알려주는 등대의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또한 진리의 파수꾼의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탕한 세대를 가슴에 안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며 권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디모데후서 4장 1절~2절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증거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충성된 신하와 백성은 왕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복음 증거는 십자가 군병의 총 사령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군인이 사령관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상상을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입니다. 모든 몸의 지체는 뇌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뇌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병들었을 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현재 건강상태는 어떻습니까? 

고 옥한흠 목사는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랑스럽게 기쁨으로 실천해야할 삶 그 자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이야기하여 다른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만큼 귀하고 아름다운 일은 없다. 전도하는 생활은 우리의 신앙상태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전도를 기쁨으로 할 때는 신앙이 매우 좋다고 말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신앙이 병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습니다.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증거는 건강한 영혼의 증거입니다. 복음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된 성도의 증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복음을 들고 이 곳 저곳 다니는 전도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충성은 복음을 전하므로 죽어가는 영혼을 건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이사야 52장 7절에 말씀하시기를“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하셨습니다. 

몇 해 전 제주도에 있는 신라호텔에 실습을 나온 한 대학생이, 호텔 앞 해수욕장에서 물에 빠져 죽어가는 어린이를 건져 주었습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도 아닌데 생명을 살리려는 일념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어린 생명을 건졌습니다. 이일로 인해 호텔로부터 표창패를 받았고, 후에 그 호텔에 입사원서를 냈는데, 많은 지원자 가운데 이 사람을 뽑았다고 했습니다. 생명을 살린 결과였습니다.

사람들도 생명을 살린 사람에게 이렇게 예우를 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33절에“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겨 구원 얻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시기바랍니다. 영혼구원은 하나님의 애절하신 소원입니다. 영혼구원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는 예수님의 한 맺힌 소원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는 성령님의 애타는 소원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님이 오셔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을 전하여 죽어가는 영혼을 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삼위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자 힘쓰는 성도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어린 심령을 원하십니다. 
죄악 된 자기의 심령을 살펴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해 간구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썩어져 가는 세대를 향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눈물 흘리며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소유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시며, 기도에 응답하셔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귀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 위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