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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채워줌 (요 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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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줌 (요 4:10-15) 
 
 
❚목마른 여인

지난 주간 세계 언론은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죽음을 앞 다투어 다루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온 세계가 애도하며 그의 크나큰 공적을 기렸습니다. 그는 최초로 개인용 컴퓨터인 PC를 개발했고, IT산업과 과학과 인류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이런 말도 있습니다. “세상을 바꾼 세 개의 사과가 있다. 아담과 이브의 사과는 인류를 바꾼 사과이고, 뉴턴의 사과는 과학을 바꾼 사과이고, 스티븐 잡스의 사과는 문화를 바꾼 사과다.”

스티브 잡스의 사망 이후 또 한 번 화제가 된 것은 그가 남기고 간 어마어마한 재산입니다. 그가 남긴 재산은 70억 달러(한화 약 8조 2900억)로 추산됩니다. 우리가 이럴 때 꼭 하는 말이 있지요? “그 돈 중에 나 한 1억만 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일단 꿈은 깨시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1억만 있어도 엄청난데 재산이 8조가 넘습니다. 엄청난 부를 모으고, 명예를 얻고, 세상의 모든 인정을 다 받은 사람입니다. 겉으로 볼 때 그의 삶은 이렇게 위대하고도 화려해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스티브 잡스의 일생은 이렇게 화려해 보여도 실상은 너무나 불행합니다. 췌장암으로 56세의 짧은 생애를 산 것도 그렇지만 그의 삶이 마냥 화려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자기기 창립한 회사에서 해고되고, 수많은 실패와 절망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특히 그의 가정사는 너무나 불행합니다. 미국인 어머니와 시리아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미혼모였던 그의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1주일 만에 다른 집에 입양시킵니다. 

그 자신이 사생아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일까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거하던 여자 친구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지만 자기 딸이 아니라며 끝까지 부인하다가 결국 친자확인 소송 끝에 자신의 딸로 인정했습니다. 그의 친아버지가 뒤늦게 아들을 만나기 원했지만 죽을 때까지 끝내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56세를 일기로 엄청난 재산을 아내와 자녀들에게 남기고 갔지만 유언장조차 남기지 않아 이 8조원의 재산을 가지고 어마어마한 재산상속 문제가 일어날 것이 뻔합니다. 보세요. 화려하고 행복한 삶입니까? 아니면 불행하고 안타까운 삶입니까? 아무리 출세하고 성공하면 뭐합니까? 아무리 세상에서 인정받으면 뭐합니까? 아무리 많은 돈을 벌면 뭐합니까? 가정이 불행하면 그의 삶 전체가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사는 곳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고 하는 동네입니다. 성경은 그녀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그녀의 가정사가 대단히 불행했다는 사실입니다.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글쎄요. 이 여인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지금 살고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랍니다. 이 여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지만 남편과 사별을 했는지, 아니면 이혼을 했는지 몰라도 다 헤어지고 지금은 정식 남편도 아닌 남자와 동거하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을 생각할 때 마다 세기의 여배우인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 생각이 납니다. 젊었을 때 그녀는 정말 예뻤습니다. 

제가 봐도 너무 예뻐요. 여배우로도 크게 성공해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고 특히 일곱 명의 남자와 여덟 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듭하며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과연 행복했을까요? 8조원이 넘는 재산을 남긴 스티브 잡스가 과연 행복했을까요? 그야 모르지요. 우리는 절대 가질 수 없는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으니 행복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행복한 사람, 만족한 사람이 여덟 번 결혼하고 또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자기 혈육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그 사람에게 세상 그 무엇도 만족을 주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 안에 돈으로도, 명예로도 채울 수 없는 엄청난 공허와 갈증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 공허와 갈증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해보고, 더 나은 행복을 찾겠다고 이혼도 하고, 성공을 향해 그토록 집착도 해보았지만 결국 그 무엇으로도 이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공허와 갈증을 채울 수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다섯 번을 결혼하고도, 또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지만 그녀의 가슴 속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가 가득했습니다. 그 어떤 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갈증이 있었습니다. 남의 속도 모르는 채 수가 성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손가락질 했겠지요. “저 화냥년 같으니라고...” 세상에 이렇게 불행한 여인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이렇게 공허하고 갈급한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야곱의 우물가에서

그런데 이렇게 목마른 인생을 살던 여인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바로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야곱이 판 우물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이 우물은 당시 수가 동네 모든 여인들이 나와서 물을 긷던 장소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만 빨래터나 우물가는 동네 여인들이 다 모이는 장소입니다. 거기 모여서 빨래를 하고 물을 길으며 여인들은 온갖 수다를 다 떱니다. 누구네 집에 무슨 일이 있고, 뉘 집 아들이 연애를 하고, 그 집 딸은 왜 그 나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가는지 말입니다. 말하자면 동네 사랑방이요 여인들이 모이는 친목의 장소인 셈이지요. 동네 여인들에게는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장소요 만남의 장소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가를 두려워합니다. 동네에 우물이라고는 유일하게 이 야곱의 우물뿐이니 가기는 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물가에 가면 틀림없이 사람들을 만날 것 아닙니까? 뻔하지요. 이 여인을 보고 동네 여자들은 수군거리겠지요. “저 화냥년이 여긴 왜 왔어? 재수 없게시리” 하지 않았겠습니까? 상냥하게 “어서 오세요. 얼마나 살기가 힘들고 외로우세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여인은 이 우물가를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여인이 우물가에 물을 뜨러 온 시간이 여섯 시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시간은 유대식 계산법과 로마식 계산법이 다르기 때문에 이 여섯 시가 과연 오늘날의 몇 시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여섯 시를 로마식으로 계산하면 그대로 오후 6시입니다. 당시 여인들이 무더운 낮이 아닌 해가 지는 선선한 시간인 오후 6시쯤을 택해 물을 길러 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유대식으로 계산하면 이 여섯 시는 낮 12시가 됩니다. 

제정신이라면 살인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대낮 12시에 물을 길으러 갈 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예외였다는 것입니다. 즉 남들의 손가락질과 비난을 피해 일부러 아무도 물 길으러 나오지 않는 대낮 12시에 혼자 물을 길으러 왔다는 것이지요. 길을 지나던 예수님이 지치고 목말라 우물가에 앉으신 바로 그 시간에 우물가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이 물을 뜨러 온 사마리아 여인 혼자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여섯 시가 남들이 아무도 물 뜨러 오지 않는 대낮 12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마리아 여인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여인입니다. 당시 사람 숫자를 세면 숫자에 들어가지도 않던 여자입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에게 사람 취급도 못 받고 개만도 못하게 여기던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게다가 다섯 명을 넘어 여섯 명 째의 남자와 살고 있는 풍기 문란한 여인, 동네 사람들에게도 손가락질 받던 여인입니다. 그러니 남들의 눈을 피해 대낮에 홀로 물을 뜨러 우물가에 와야 했던 것이지요. 

이 여인의 공허와 갈증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이 여인이 져야 할 인생의 무게는 또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지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오늘도 햇볕 쨍쨍한 우물가로 물을 뜨러 가면서 이 여인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도 남들 눈을 피해 물을 뜨러 간다만, 이 물은 아무리 마셔도 마셔도 내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구나. 우물가에서 이 물을 떠다가 마셔도 곧 다시 목마르겠지? 도대체 누가? 어떻게 이 영원한 목마름을, 이 깊은 공허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 그런다가 바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본문 4장 3~4절에 보면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다가 일부러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갈 때 베뢰아를 통과해서 갔습니다. 사마리아 지방으로 가면 지름길이지만 일부러 빙 돌아 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피하려는 것입니다. 혼혈아요 개만도 못한 사마리아 사람을 안 만나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남들이 다 안 가는 사마리아 지방으로 통과하셨을까요? 그것은 틀림없이 목적이 있어서 일 것입니다. 일부러 사마리아 지방에 가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이지요. 그 누군가가 바로 이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수가 성의 야곱의 우물가에 가신 것도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함이고, 그래서 여인을 만났을 때 먼저 말을 거십니다.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인데 말입니다. 뭐라고 먼저 말을 거십니까? 7절입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물을 좀 달라.” 무슨 뜻일까요? 물론 예수님이 먼 길에 지치고 목말라서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또 다른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물을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9절에 보니 여인조차 유대인 남자가 자기 같은 여자에게 먼저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다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십니다. 10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렇습니다. 지금 주님은 그냥 물이 아닌 생수 이야기를 하려고 물을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선물, 즉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고, 또 지금 자기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면 오히려 그 분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고 그 분은 그냥 물이 아닌 생수를 주셨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인의 눈앞에서 물 좀 달라고 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시고 나면 곧 다시 목이 마른 그런 물이 아니라,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 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어떤 물로도, 그 어떤 남자나 돈이나 명예나 세상의 것으로도 풀 수 없는 인생의 목마름을, 그 깊은 공허를 해결해 줄 생수를 주시는 분 말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이 깊은데(유대의 우물은 실제로 아주 깊습니다) 어디서 당신이 물을 떠서 내게 그런 신기한 생수를 줄 수 있습니까? 그럼 당신이 이 우물을 판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큰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우리 조상 야곱도 겨우 이 우물 파고 만날 물 길어 마셨는데 당신은 특별한 생수를 줄 수 있다니 말입니다.”(11~12절)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주님이 하신 말씀이 13절부터 나옵니다. 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인생의 모든 갈증과 공허를 영원히 해결할 영생의 물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인은 그런 물이 있다면 자기에게도 달라고 합니다. 여전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고 그저 다시 물 안 길어도 되니 그런 신기한 물 있으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16절부터 나오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아니, 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웬 남편 얘기입니까? 여전히 생수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여인을 깨닫게 하시려고 꺼낸 이야기입니다. 처음 만난 여인의 깊은 갈증과 인생의 문제를 이미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안다. 너의 인생의 깊은 갈증과 공허를 내가 이미 안다. 그래서 너를 만나려고 일부러 여기 온 것이다. 나를 만나야 그 갈증이 해결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순간 여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절을 보세요.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게 된 것이지요.

❚공허와 갈증

보세요. 꽤나 긴 본문입니다. 이혼하고 가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여인에 관한 말씀치고는 이례적으로 아주 깁니다. 그만큼 아주 중요한 비중을 가진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공허, 영원한 목마름 때문입니다.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하고,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와 갈증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이 공허와 목마름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이 좀 더 잘 살게 되었지만, 과학도 발달하고 의학도 발달했지만 이 공허와 갈증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특히 가정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정문제, 부부의 불화와 이혼문제, 자녀 문제 등 삶의 무게와 짐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고, 그러다가 끝내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지금 너무나 많습니다. 전에는 이런 사람들이 교회 밖에 주로 많았습니다. 그래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좀 낫다고 했습니다. 가정적으로도 좀 안정된 삶을 산다고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교회 안이라고 해서 안전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목사가 강단에서 이혼 이야기하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가정 이야기도 잘 했습니다. 이혼하면 안 된다고, 가정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혼에 대한 설교를 하면 성도들 중 3분의 1은 가슴이 아픕니다. 아프다 못해 찢어집니다. 바로 자기 이야기거나 자녀들, 혹은 주위 사람들 중에 틀림없이 이 문제에 걸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문제를 이야기 하면 또 그 중의 3분의 1은 가슴이 찢어집니다. 가정의 경제문제나 가족의 건강문제를 이야기하면 나머지 3분의 1이 아픕니다. 그러니 가정문제를 이야기하면 온 성도가 다 걸립니다. 교회의 장로님이나 중직자들도, 심지어 설교하는 목사 자신도 걸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정문제나 이혼문제를 교회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인생의 가장 무거운 이 짐을 교회에서 뭐라고 말해주어야 합니까? 기억하세요. 정죄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원칙은 말해줘야 합니다. “성경은 이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왕 그렇게 된 사람은 정죄하면 안 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는데 어떻게 합니까? 원칙과 긍휼은 다릅니다. 이왕 그렇게 된 사람이라면 정죄가 아닌 위로와 치유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그들 속에 있는 엄청난 목마름과 공허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교회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교회는 그들의 마지막 보루요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수가 동네 여인들이 수군거립니다. “저 여자, 여긴 왜 왔어?” 하지만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정말 “오서 오세요. 얼마나 삶이 외롭고 힘드셨어요. 

이제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저희 교회가 마지막 안식처요 피난처가 되어 드릴게요”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이 겪는 이 아픈 문제, 이혼문제, 자녀문제, 가정문제 등을 교회에서 해결해 줘야지 누가 해주겠습니까? 무슨 상담소가 하겠습니까? 가정단체가 하겠습니까? 교회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왜요? 교회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시고, 인생의 깊은 공허와 영원한 목마름을 해결해줄 생수는 오직 그분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교회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채워주심

오늘 이 사마리아 여인은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 받습니다. 인생의 깊은 공허를 채움 받습니다. 어떻게요? 첫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가능했습니다. 둘째로는, 그분에게서 나오는 생수(生水), 영원한 생명의 물을 마심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바로 예배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인과 주님은 생수 이야기를 하다가 20절부터 갑자기 예배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여인은 궁금했습니다. “우리 조상인 사마리아인들은 이 산, 즉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고, 당신네 유대인들은 아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해라 이렇게 말하는데 어디서 예배하는 것이 맞습니까?” 여인은 예배의 장소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그리심 산에서 열심히 예배했건만 공허와 갈증이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주님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산, 그리심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아라.” 23절 보세요.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장소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다.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아버지가 받으시는 예배요. 그렇게 되어야 내 문제가 해결되고, 갈증과 공허가 채워지는 참 예배가 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다면, 특히 이 여인처럼 가정문제나 감당하기 어려운 인생의 무거운 짐이 있다면, 꼭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 바랍니다. 꼭 그분을 통해 영원한 생수를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예배가 아니라, 어떤 능력도 안 일어나는 무기력한 예배가 아니라 그야말로 영과 진리의 예배, 살아있는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 문제를 꼭 해결받기 바랍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문제를 해결받자 곧바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28절). 교회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병원입니다. 멋진 사람, 완벽한 사람만 모인 도서관이 아니라 환자들이 모인 병원입니다. 병원은 아프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만 찾아옵니다. 아무리 아파도, 죽어가도 안 아프다고 생각하면 병원 안 옵니다. 교회도 뭔가 문제가 있어 찾아옵니다. 자기가 문제가 있다고 인정해서 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 이런 환자들을 맞아 치유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환자가 건강한 자가 되고, 죄인이 증인이 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최후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갈 곳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누구도 찾아가지 않는 사마리아까지 찾아가 모두가 비난하던 여인을 만나주고 그를 채워주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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