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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초대식탁 (고전 11: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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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초대식탁 (고전 11:20-29)


예수님은 30년 동안 요셉의 집에서 평범한 자연인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30세에서 33세까지는 가출하셨습니다. 그 삶을 공생애라고 표현합니다. 집을 떠나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적 생활을 하셨습니다. 제일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 매일 13명이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이요 잠을 자는 일이었습니다. 어디를 가시느냐고 묻는 질문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그 말씀 속에 예수님 생활의 곤고함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스러울 만큼 도움을 입으셨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 1장에 보면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열두 제자와 예수님 이렇게 13명은 매우 건강한 젊은이들입니다. 이들을 돌보는 도우미 공동체 하나가 생겨서 선교 활동을 할 수가 있었는데 2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사도 공동체와 그들을 섬기는 봉사 공동체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은 식사 초대를 즐거워하신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삭개오의 집에서,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서,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서 많은 식사 기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두 번 자신이 식탁을 준비하시고 손님을 초대하셨는데 한번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 해변에서 불을 피워놓고 생선을 구워 시장한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으라고 부르셨습니다. 또 한 번은 오늘 성경말씀인 잡히시기 전날 밤 다락방 만찬 장소였습니다. 

두 번 모두 초대 손님은 열두 제자들입니다. 여기 특이한 사실들이 나타나는데 이 식탁은 육신의 배를 불리려는 식탁이 아니라 신비한 생명력과 영적 능력이 있으면서 영원히 계승되는 진리의 전달이 담긴 식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성찬의 식탁을 똑같이 의미화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영원한 의식 선포를 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우리가 지금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찬 예식이 주는 영적 의미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영적 생명의 연결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 보존의 절대적 진리가 보존합니다. 다른 생명체를 먹음으로 내 생명체가 보존되는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오늘도 이렇게 건강한 생명체로 살아있다는 것은 다른 생명체를 죽여서 우리가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맛있게 했습니다. 식탁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 생명체 보존을 위해 생명을 잃어버린 각종 음식물이 마련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만약 쇠고기를 먹었다면 소가 자기 생명체를 소멸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먹고 내 생명체가 보존되는 것이요 물고기 반찬을 먹었다면 그 생선 한 마리는 자기 일생의 삶이 결국 나에게 한 끼 식사의 보탬이 되려고 살아온 것입니다. 배추도 생명체요 나물도 생명체입니다. 생명을 먹어야 생명이 사는 절대적 진리를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동물의 왕국’같은 TV프로그램을 보십시오.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죽이셨는가? 그 생명이 버려짐으로 모든 생명을 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 빵을 떼어주시면서 “받아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떼는 내 살이니라.” 포도주 한 잔을 주실 때 “포도주 한 잔 마시라.”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마시라. 이는 내 피니라. 생명체이다. 내 생명체를 먹고 너희 생명이 살아라.” 영생의 생명체와의 연결을 그렇게 의미화 하여서 이렇게 예식을 거행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성찬은 똑같은 의미로 우리가 참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말씀에 이해하기 힘든 줄거리 하나가 나왔습니다. 20절에서 22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은 성찬 예식의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성찬에 쓸 빵과 포도주를 자신이 준비해 옵니다. 또, 매주일 성찬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그랬는데 간단한 의미적 음식을 준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배불리 먹는 음식 중심의 성찬이 되었고 술은 취할 정도로 많았다는 것입니다. “또 너희가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그런 말이 나왔는데 가난한 성도들은 성찬을 너무나 빈약하게 준비했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내놓고 먹지도 못하는 그런 경우가 생기고 또 매주일 하니까 이것도 굉장히 번거로운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이 성찬식이 실컷 먹고 마시는 파티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생기게 되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의미적, 영적 내용을 잊어버리고 먹고 마시는데 집중하는 성찬 예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유교 문화에도 비슷한 순서 하나가 있습니다. 조상들의 제삿날이 되면 온 가족이 다함께 모여서 조상을 그리는 제사 의식을 행하는데 마지막 순서에 ‘음복’이라고 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 제사에서 사용했던 술을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한 모금씩 다 일제히 마시는 순서를 말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조상의 은혜를 내 몸에 기념한다는 뜻으로 나누었습니다. 지금 가톨릭교회는 신학적으로 분명합니다. 성찬에서 사용한 포도주는 미사를 드린 후 주님의 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에 사용한 모든 포도주는 주님의 피가 되었으므로 한 방울도 버리지 않고 신부님들이 그 자리에서 다 마시는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영적 의미의 기념입니다. 이것을 받음으로 영적인 의미가 내게 주어진다는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는 지키는 것입니다. ‘아, 나는 주님의 살과 피를 내 생명체에 연결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나와 주님은 하나이다.’ 위대한 생명의 영적 결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피는 모든 사람의 성분의 기초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피와 나의 피의 결합은 내가 이제 주님의 성분이 되었다는 영적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식탁에 참여하는 자는 초대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면서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문화는 많은 사람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때를 따라 초대를 하며 초대를 받습니다. 그런 문화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초대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초대자가 누구인가?” 또,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 입니다. 초대 손님과 초대자에 따라서 그 모임의 권위는 다르게 평가가 됩니다. 만일 친한 친구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초대했다면 응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다른 약속이 있으니까 내일 하자.”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을 대통령이 초대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휴! 그거 참 귀찮게 구네! 바빠서 못 간다고 해.” 그렇게 하실 겁니까? 저는 공식적으로 두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서 백악관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클린턴의 초대로 백악관에 갔던 일이 있고 공화당 대통령 부시의 초대로 갔다 온 일이 있습니다. FBI에서 조사해서 ‘소수 민족 지도자’로 평가했다고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초대를 받고 사실 고민했습니다. LA에서 워싱턴까지 가려면 비행기타고 6시간 가야 합니다. 번거롭지요? 그 다음에 비행기 값, 호텔비 자부담입니다. ‘가야되나, 말아야 되나?’ 그런데도 그날 가보니까 초대받은 사람 한 사람도 결석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초대자의 권위 때문입니다. 가서 보면 대통령과 마주보고 악수 한번 하고 격려해주는 말 한마디 듣고 사진 한번 같이 찍고 다 같이 식사 한번 하고 대통령의 국정 연설을 듣습니다. “우리 지금 미국의 가는 길은 이렇게 정책을 잡고 있으니까 지도자 여러분들이 이 일에 협조를 해주십시오.” 하는 연설을 듣습니다. 만약 그 날 대통령이 선물을 주었다면 평생 보관할 것입니다. 

오늘 이 초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입니다. 선물이 있습니다. 영생과 구원입니다. 사실 이 성찬의 의미를 기억하는 성도는 절대 성찬에 빠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일보다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일 년에 몇 번 있는 이 성찬에 나는 절대 빠지지 말아야지.’ 모든 자기의 계획들을 취소해 버리고 성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 초대는 어떤 것보다도 귀하다는 믿음의 고백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옛날 임금님들은 자신이 신뢰하는 신하를 격려하기 위해서 궁중으로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려간 그 신하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인격 대우를 해주는 순서가 하나 있습니다. 

임금님이 술 주전자를 들고 신하에게 술을 한잔 따라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주’라고 했습니다. 이 때 술잔을 든 신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너무나도 황송하여서 두 손으로 받들고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전하!” 그리고 임금님이 주는 그 술 한 잔을 먹는 것으로 영광을 삼았습니다. 성찬은 주님의 은혜를 주님이 직접 주시며 “이것은 나의 피니라. 마시라. 이것은 내 살이니라. 먹으라.” 이런 의미이기 때문에 이 성찬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주님을 위하여 어느 때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겠나이다.” 그 각오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살면서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저는 주님에게 쓰임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주님에게 쓰임을 받는 중에 가장 거룩한 쓰임이 무엇인가? 저는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죽음과 똑같은 방법의 사역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영적 축복이 있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에 나타난 성령 충만의 사건을 보면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 때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이라고 하는 집사님 한분이 기독교 역사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는데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너무나도 잔인합니다. 사람을 가운데 세워놓고 사람들이 돌을 집어던져서 피를 터뜨려 죽이는 방법입니다. 신경조직이 정상인 사람이 그렇게 죽는다는 것은 고통의 극치가 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 시간에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주님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고 견딜 수 없는 참혹한 고통이 성령 충만으로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충만한 성도는 주님을 위한 어떤 일도 사양하지 않고 행하게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기회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특별한 축복이라고 믿는 신앙 고백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역사에 보면 어떤 때는 사실적 이야기로, 어떤 때는 하나의 전설로 전해지는 그런 기록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대신 죽음을 선택하는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친구가 죽을죄를 지었는데 다른 친구가 “너는 어머니도 계시고 집안 사정이 있는데 네가 죽으면 안 된다. 내가 대신 죽을 테니 너는 살아라.” 하고 임금님에게 탄원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고, 우리나라 심청전에 나오는 이야기같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인당수 깊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다 전설이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다만 돌발적 사건이 터졌을 때 순간적 판단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던지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순간적으로 뛰어들어서 그를 구하고 대신 자기가 물에 빠져 죽는 일이라든가 강재구 소령과 같이 순간적 폭발 위험이 생긴 그 현장에서 다른 동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던져 희생된 일들 말입니다. 사실 그런 일들도 너무나도 거룩한 희생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온 세상에 홍보하고 알려서 그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는 모습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은 인류적인 행사입니다. “인류의 영원한 구원을 이루게 하신 주님의 생명 희생 십자가 사역을 잊지 말고 이것을 영원히 기념하라. 그리고 너희도 그런 기회가 올 때 그렇게 살아라.” 

스티브 잡스가 죽는 날 저는 미국에 있었습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아버지가 죽은 것보다도 더 슬퍼합니다. 토인비 박사의 역사관 “세상은 창조적인 소수가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당신 때문에 행복했어.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느라고 일찍 죽은 거야.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을 거야. I Love Steven. Thank you Steven. Good Bye Steven.” 전부 촛불들을 들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던 청년들이 그렇게 애도하며 하루 종일 스티브에 대해서 방송합니다. 

그가 가지고 살던 다섯 가지 삶의 철학 중에서 첫 번째와 다섯 번째가 기독교 정신입니다. 첫째가 뭐냐? “당신은 위대한 일이라고 판단되는 것에 몸을 던지라.” 다섯 번째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면 당신은 잃을 것이 없다.” 그가 조금 일찍 갔지만 신념에 사는 사람들은 일찍 가는 것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은 가장 위대한 일에 몸을 바치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구원을 위한 위대한 사역에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 신념에 가득 찬 열정의 삶을 정신없이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조용히 영원의 세계로 본연의 삶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영생을 선물해준 주님의 희생을 오늘 이 성찬으로 영원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찬과 함께 영적 충만이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은 주님의 식탁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 초대가 영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기억하면서 성찬에 참여하고, 모두가 성찬이 주는 영적 의미대로 이 세상을 이겨나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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