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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기도 (창 18: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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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기도 (창 18:22-33) 

  
아브람은 높은 자, 고귀한 자라는 뜻이다. (창17장)에, 아브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그 이름이 아브라함(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바뀐다. 혼자 복을 받아 위대해 짐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복이 되게 하는, 존재가 되라는 뜻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복 받은 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18장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만나서, 접대하고, 그분과 함께 식사하며, 영광스런 교제를 나눈다.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본문이다. 한 마디로 중재기도를 하는 모습이다. 
복 받은 사람은 '내 나라, 내 교회, 내 이웃'의 고통들과, 문제들을 구경만 하지 않는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책임지고 살아간다. 따라서 이 세상에, 어려움과 고통이 많을수록, 복을 받은 사람들이 할 일이 많이 요청되어진다. 

사탄이 커다란 유혹의 불길로, 우리를 유혹할 때, 우리는 성령을 통해, 기도의 맞불을 지펴야 승리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는, 사탄의 불화살을 막을 힘이 없어서, 피 흘리며 쓰러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인생의 짐에 짓눌려, 신음 조차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도 기도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람들, 영혼이 병든 사람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지금 우리시대, 우리교회, 우리가정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의 능력을 회복해야만 한다. 부흥의 높이는, 기도의 깊이만큼 더해진다. 부흥의 불길은, 기도의 불길만큼 커진다. 

한 시대, 한 교회, 한 지역의 커다란 부흥 뒤에는, 언제나 기도의 불길이 있었다. 이것을 기독교 역사는 증언한다. 우리가 영적 부흥과, 새로운 축복의 전기를 마련하기 원할 때마다, 기도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기도의 방법은 다양하다. 

그 방법들 중에,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함을, "도고, 중재기도"라 한다. 중보기도는 주님이 하시는 기도이다(딤전2:5). 우리의 기도가, 나의 한계를 벗어나,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번져감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른다. 

1.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다. 

기도하려면,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가 되어야 한다. 폭발직전의 소돔 성 앞에서, 한 손은 하늘을 향해 들고, 다른 손으로는 인간의 아픈 사연을 붙들고, 중재기도를 드리는, 한 폭의 그림을 그려보자. 

민족의 시련과 고통이 있을 때마다, 나라가 흥망성쇠의 기로에 설 때마다, 교회비전이 선포될 때마다, 이웃의 신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중재기도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함은, 의무가 아니라, 성도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특권이다. 

대통령과 매일 매일, 혼자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나라의 대통령과 만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온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님과 단독적으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그러므로 기도할 기회를 상실한다면, 최고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다. 기도의 능력을 잃음은, 인생 최고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들, 기도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우리가 기도 제목들을 끌어안고 기도할 때, 성령의 불을 체험할 수 있다. 그렇게되면 우리 가정은 변화되고, 사회는 변화되고, 한국교회를 다시 부흥할 것이다. 이 민족과 교회는, 기도의 불을 타고, 크게 성장할 것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항상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했다. 

그렇기에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풀무불에서 살아났고,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기도는 나와 너를 살리고, 교회와 나라 민족을 살린다. (22下)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하나님 앞에 섰다는, 예배했다는 말이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종으로, 서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 말씀만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러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서는 것이, 바로 예배다. (23上)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하였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서는 그 곳이, 기도의 자리이다. 하나님 앞에 서려면, 우리 죄를 고백해야 한다. 

(사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하였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틈을 만들어, 우리의 기도를 방해한다. 

하늘축복의 통로를, 보이지 않는 벽이 막아버린다. 우리가 붙들고 살았던 죄를 놓을 때, 하나님의 복을 붙들 수 있다. 내 입술이 죄를 고백한 다음에, 비로소 거룩한 입술을 열을 때,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다. 
(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나아가, 우리 죄를 먼저 고백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2. 아버지와 함께 할 때 행복하다. 

기도는 거룩한 하나님과,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 일이고, 함께 나누는 대화이다. 하나님은 나를 바라보고,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한 함께 나누는 대화다. 
갖가지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를 낳았던, 타이타닉호가 부셔졌을 때의 일이다. 수천의 탑승객들은 이미 죽었다. 구명보트에 탄 노약자들은 다 구조되어, 구조대마저 철수된 상황이었다. 이때 영국의 한 문인이, 큰 풍선을 끌어안고, 파도와 싸우고, 며칠을 버텨내고 있었다. 

이제는 손가락 끝마디의, 마지막 힘마저 사라져, 풍선을 붙들 힘이 없었다. 그래서 생명을 아버지 앞에 맡길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그때에, 하늘에 1인승 비행기 하나가,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그와 눈을 마주치고 사라졌다. 누군가 나를 보았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생겼다. 

그는 포기하기 하지 않고, 날 생선을 잡아먹으며, 며칠동안 버텨냈다. 마침내 해안경찰 구조선이 달려와 건져주었다. 인생을 살다가,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때, 사람들이 배신하고 떠났을 때, 나를 지켜보는 분이 있다. 그것도 전능한 하나님이, 나의 모든 형편을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 얼마나 놀라운 담력과 용기를 줄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행복, 하나님과 눈 마주치며 사는, 행복을 아는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했다. (막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제자를 선택하신 우선되는 목적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능력을 나눠주신 다음, 전도도 하게 하기 위함이라 말씀한다. (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땅에 살면서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복이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백두산 호랑이를 생포해서, 도요토미 히데오시( 臣秀吉)에게 선물로 보냈다.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개 3마리를 잡아먹고 잘 도착하라고, 큰 우리 안에 넣어서, 보내주었다. 일본에 도착하고 보니, 호랑이가 죽어있고, 3마리 개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그 개가 바로 일본이 몰랐던, 한국의 용맹한 개 풍산개다. 가정에 위기가 있을 때, 온 가족이 함께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능히 그 문제와 싸워 이기고, 위기를 넘어갈 수 있다. 지금 나라를 위하여 온 성도가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일이 필요하다. 

※ 기도의 태도(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먼저 티끌이나 재와 같은 나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섰을 때, 나는 참으로 티끌 같은 존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겸손 없이는, 그 누구도 기도의 자리에 이를 수 없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교만함이 있기에, 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교만한 사람이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하나님 없어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불신앙이요 교만이다. 

'주여 저는 죄인이다.' 이 고백 없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흉악한 죄인이기에, 기도의 입술을 닫아야 하는가? 아니다.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가 필요하다. (31) 역시, '감히'라는 말이 다시 나온다.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죄인이기에, 용서가 필요한 존재다. 나는 연약하기에, 강한 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티끌처럼 무력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존재다. 나는 할 수 없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래서 티끌 같은 나라도, 감히 하나님께 입술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한다. "의인들을 위하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감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이다. 우리는 감히 어떤 문제든지, 기도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기도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에게 이 소돔성은,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소돔 성을 간섭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없었고, 소돔 성을 변화시킬, 어떤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 여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이 있는데, 이 성을 사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도했다. 오늘날 신앙인의 문제는, 무감각의 질병이다. 죄로 인하여 쓰러지고, 넘어지는 세상을 보고 있으면서도, 안타까워함이 없다. 무너져 가는 이 현실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감각이 없다. 

영적 위기의식이 없다. 사단의 불화살에 맞아 신음하는, 우리 이웃들을 보면서도 아파하지 않는다. 인생의 짐이 무거워 쓰러져, 허우적거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적 감각이 없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질병이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 가족의 문제를 가슴에 품고, 함께 기도해야 한다. 

3. 중재 기도로 얻은 복 

조카 롯은 환경적으로 풍요로운,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갔다가, 큰 위기를 만났다. 이런 롯을 위해 기도할 때, 롯을 나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나를 무시하고, 좋은 길만 찾아가더니, 꼴 좋다. 좋은 환경을 욕심부리고, 차지했으면 잘 살기나 하지, 이게 무슨 꼴이냐?" 성경 그 어디에도, 조카 롯을 비난하거나, 섭섭해하거나, 꾸중한 적이 없다. 자신의 의를 드러낸 적도 없다. 이것이 바로 중재 기도자의 자세다.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만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8)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처럼 온 성을 위하여 간구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게 상처를 준 사람, 내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 내게 결정적인 손해를 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용서를 선포할 수 있고, 그를 위하여 중재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을 닮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역사 가운데, 욥만큼 고난을 당한 사람도 없다. 얼마나 쓰리고 아픈 고통을 겪는지 모른다. 열 아들이 모두 죽는다. 모든 재산이 바람에 날아가듯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내는 그를 원망하고 저주한다. 친구들이 위로한다고, 욥을 찾아왔지만, 욥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온몸은 질병으로, 몸은 지금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너무 고통스럽고 아파서, 기왓장으로 가려운 데를 벅벅 긁으며, 피를 흘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42: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그에게 상처 준, 결정적인 아픔을 주었던 친구들을, 용서하기 시작한다. 그의 친구들을 위해 중재 기도했다. 그러자 여호와는 곤경에서 돌이키신다. 욥의 고난이 떠나갔다. 환난이 깨끗이 없어져 가고 있었다. 그 친구들을 용서하고, 그 친구들을 위하여 중재 기도를 시작했을 때, 고통이 사라졌다. 
질병이 떠나갔다. 그 다음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을 주셨다. 우리는 욥이, 갑절의 복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선행적 중재기도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다. 친구를 용서했다. 친구들을 위하여 중재기도 했다. 그때 질병이 떠나갔다. 갑절의 복이, 욥에게 부어주셨다. 

이것이 중재기도가, 가져다 주는 복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기도할 수 있는, 의인 열 사람을 찾고 있다. 나라의 문제, 민족의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할 수 있는, 의인들이, 쓰러져가고 무너져 가는, 나라와 사회와 가정을 살릴 수 있다. 한국교회에 의인 열 사람을, 주님은 지금도 찾고 있다. 

"사람을 찾습니다!" 이것은 어느 기업체의 구인광고가 아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잃어버린 아담을 찾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노아 홍수직전에 울려 퍼진, 하나님의 음성이다. 

"오늘 불붙은 소돔과 고모라 성 앞에서, 의인 열 사람을 내가 찾는다. 누가 이 교회를 위해, 사명을 갖고 기도하겠느냐? 누가 한국교회와 가정과 사회를 위해, 울며 기도하겠느냐?"며 찾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50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하나님은 그 의인을 통하여, 온 지경을 용서할 뜻을 가지고 계셨다. 소돔의 군인들은, 그들의 군사전력이, 국가의 안보를 지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내가 이 성에 유황불을 내리지 않음은, 기도하는 의인 열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열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성을 용서해 주겠다."고 분명히 성경은 말한다. 야곱 때문에, 라반의 집에 축복이 임했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과, 모든 소유에 복이 임했다. 

사도 바울 때문에, 유라굴라 광풍에서, 276명의 승객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엄숙히 자각을 해야 한다. 나로 말미암아, 내 가정이 망해갈 수도 있고, 새로운 부흥을 체험할 수도 있다. 나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가 큰 부흥을 체험할 수도 있고, 침체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로 말미암아, 이 도시에 가득 찬, 사단의 견고한 진을, 파할 수도 있고, 이 도시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다. 이 민족이 새로워질 수도 있다. 개미는 열심히 일하는 곤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20%에 불과하다고 한다. 

20%의 개미들만이 열심히 땀흘려서, 나머지 80%를 먹여 살린다고 한다. 이것이 경영학의 20대 80 법칙이라고 한다. 우리 국민의 총 생산량의 20%에 의해 생산이 된다고 한다. 신음하며, 피 흘리고 쓰러진 80%의 사람들을 건져낼, 20%의 역군들을 있을 때, 우리교회는 미래가 있다.  

오늘 본문을 읽을 때, 한가지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아브라함과 천사와의 씨름이 계속되는데,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의인 사십 오인이 있으면, 사십 명이 있으면, 삼십 명이 있으면, 의인 이십 명이 있으면, 열 명이 있으면, 그리고 거기서 끝난다. 

그 이유는, 10명이 공동체의 최소 숫자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10명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회당을 세우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다. 마지막 오 명, 아니 한 명만 있으면, 이 성을 사해주지 않겠는가? 
기도하는 한 사람, 저로 인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용서해 주실 수 없나요? 하나님은 사랑이 너무나도 크고 많으신 분인데, 한 명의 몸부림으로 인하여, 이 성을 주님 용서하실 수는 없나요? 이런 아쉬움이 남는다. 

(렘5:1) 하나님은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했다. 따라서 기도는, 마지막 한 명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기도를 쉬는 죄가, 무서운 죄임을 알아야 한다. 

내 가정을 위해 기도하기를 쉴 때, 내 자녀들이 방황하게 된다. 내가 내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게 될 때, 친구들이 주께로 돌아온다. 내가 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가 무서운 죄악이다. 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멈추는 것이, 무서운 죄악이다. 

아브라함의 기도의 종말, 그것은 소돔성의 종말이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멈출 때, 그것은 하늘축복의 종말이었다. 우리가 정치가를 위해 기도하면,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면, 우리는 청와대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각료가 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6.25때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렸다. 풍전등화 같은 한국에, 파병을 결정할 때다. 거부권을 행사하기로 했던, 소련대표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함으로, 한국에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다. 누구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이 역사 하셨는지, UN 안전보장이사회에 회원이 되었다. 

북한이 최근 자강도에, 생물무기 공장을 만들어, 가동을 시작한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군 당국은 북한이 천연두, 탄저균, 페스트, 콜레라, 보틀리늄 등, 5가지 생물무기 개발에 성공했다. 혈액과 수포작용 등, 60Kg 정도로, 서울을 마비시킬 수 있다. 땅굴도 파놓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중재기도로,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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