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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 받는 자의 노래 (아 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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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받는 자의 노래 (아 2:10-14) 


1. 시월의 노래

성도 여러분, 10월하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지요? 즉 시월하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 혹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누군가 10월하면 가장 먼저 “天高馬肥”라는 말이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을만 되면 살이 찌니 이번 10월에는 살 조심하자, 다이어트를 꼭 하자”고 했습니다. 가을은 풍성한 과일과 햇곡식 때문에 입맛이 절로 돌아서 살이 찔 수밖에 없다는 말인데요, 저로서는 정말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天高馬肥라는 말의 유래를 아십니까?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인 이 말은 얼핏 듣기에는 가을을 가장 잘 표현한 좋은 뜻의 四字成語인 것 같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대 중국의 은나라 초기에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흉노족은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등 세 왕조를 거치면서 2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국경 지역의 농경 지대를 끊임없이 침략해 방화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군주들은 흉노족의 침략과 약탈을 막기 위해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따라서 ‘말이 살찐다’는 말은 ‘말은 주로 가을철에 살이 찐다’는 뜻이 아니라, 흉노족이 추수기에 중국과의 국경 지역을 침략하기 위해 말에게 먹이를 잔뜩 먹여 살을 찌운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하늘이 점점 푸르고 높아가는 것을 보니 곡식 뺏으러 갈 때가 되었구나, 얼른 말부터 살찌우자!’ 뭐 그런 말이라는 것이죠. 

또 누군가는 말하기를 “10월하면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좋은 노래지요?

그리고 누군가는 “10월하면 丹楓이나 落葉이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요즘 TV 광고 문구에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오더라고요. “단풍 구경 놓치면 가을을 놓치는 거라든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여러분도 이 가을을 그냥 보내지 마시고 친구들과 가까운 산이라도 가셔서 단풍 구경 한 번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제게 “시월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노래가 생각난다고 할 것입니다. 바리톤 김동규가 불렀던 노래 기억하시죠?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 그런데 여러분, 이 노래가 원래 봄 노래였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 곡은 노르웨이 출신 Secret Garden의 1995년 제1집 “Song From A Secret Garden”에 수록된 “Serenade to spring”이라는 원곡에 우리나라 시인 이정하와 한혜경이 가사를 붙인 것입니다. “세레나데”란 小夜曲, 즉 ‘저녁 음악’이라는 뜻으로, 밤에 연인의 집 창가에서 부르거나 연주하던 사랑의 노래를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왜 이 노래를 이렇게 설명하는 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원래 봄노래인 이 노래가, 그것도 사랑하는 연인을 위하여 저녁에 창가에서 불렀던 이 노래가 시월을 대표하는 노래로 자리 잡은 것을 알면서 제 마음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도 이런 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그의 신부인 우리를 향하여 부른 사랑의 노래가 성경에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의 아가서이고 오늘 본문입니다!

2. 사랑의 노래

1) 아가서

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노래인 아가서의 히브리어 성경에서의 이름은 ‘쉬르 하쉬림’으로서, ‘노래 중의 노래’ 또는 ‘가장 좋은 노래’라는 뜻입니다. 이 제목처럼 아가서에 기록된 노래야말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의 내용은 우선 남자와 여자 사이에 주고받는 사랑의 노래 내지는 결혼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이나 <표준 새번역>에서는 아가서를 신부가 부르는 노래, 신랑이 부르는 노래, 그리고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 등으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노래를 주고 받는 것이 그 내용인 아가서의 기록 목적은 사랑이나 결혼이 참으로 고귀하고 순수한 것임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즉 아가서는 참된 사랑과 결혼의 순결함과 고귀함을 가르치려는 목적을 가진 성경이라는 말이죠.

그러나 여러분, 아가서가 단순히 이런 사랑과 결혼 案內書 내지는 結婚 祝歌라면 성경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가서가 성경에 있는 이유는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을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아가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냐를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가서의 내용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사이를 夫婦 관계로 보는 구약의 여러 본문들에 근거합니다(호1-3장: 렘2:2-3,20-25; 3:1-10; 겔16장, 23장; 사54:5-8; 61:10). 

그리고 이러한 결혼 이미지는 신약성경에 와서, 특히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혹은 성도 사이의 관계를 부부로 표현한 것으로 더욱 구체화되었고,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는 표현을 통하여 최고조에 달했습니다(계19:7; 21:2). 다시 말해서 아가서에 기록된 남녀의 사랑 노래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노래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시월의 노래”는 어떤 것이 있을까, 시월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다가, 오늘 본문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은 신부인 술람미 여인이 부른 노래입니다.

2) 신부가 기억하는 신랑의 노래

➀ 아직은 고난의 땅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불러준 노래인데요.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프러포즈’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지금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면서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노래합니다. 이것을 보면,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자기 왕궁으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오늘 본문에서 비로소 “함께 가자”라고 함으로서 솔로몬이 이제야 술람미 여인을 “데리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 말씀에서 우리는 아가서의 영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가서가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단순한 사랑이야기라면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곧바로 왕궁으로 데리고 가서 살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인을 데리고 가서 같이 살지, 왜 이렇게 이별하여 서로 떨어져 살았겠습니까? 아무튼 그 이유와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떨어져 있던 솔로몬이 드디어 술람미 여인을 데리러 와서는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권하는 것이 오늘 본문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술람미 여인이 비록 왕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즉시로 소위 ‘팔자’가 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거기다가 1장 5, 6절을 보십시오. 왕의 사랑과 간택을 받아 왕이 데리고 갈 날을 기다리는 술람미 여인의 삶이 어떻습니까? 예루살렘 여인들이 술람미 여인을 괴롭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술람미 여인을 향해 ‘피부가 검다’고 손가락질을 했고, 그녀가 왕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로 눈을 흘겨보면서 비난을 했습니다. ‘어떻게 저런 여자가 왕의 사랑을 받을 수 있냐?’ ‘ 촌뜨기에다 새까만 것이 예쁘지도 않은데 말이야!’ 하면서 온갖 입방아를 찧었을 것입니다.  그 뿐 아닙니다. 

1장 6절에 보면,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이 술람미 여인을 포도원지기로 만들어 땡볕에서 하루 종일 일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빠들조차 술람미 여인을 무시 혹은 왕의 사랑을 받은 자로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렇게 포도원에 나가 일하다보니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했구나”라고 합니다. 이 말은 포도원에 나가 일하다보니 정작 자신을 가꿀 시간조차 없었다는 말입니다. 왕의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그녀의 삶에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왕의 사랑을 입은 것 때문에 더 힘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라고 말합니다. 겨울이란 ‘시련기’를 말하고, 비란 ‘괴롭고 슬픈 일들’을 말합니다. 그만큼 그녀의 삶이 힘들고 괴로웠다는 말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와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술람미 여인의 이러한 고난과 걱정과 염려를 한방에 날려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술람미 여인의 고난과 걱정과 근심을 날려버린 것은 솔로몬이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는 “말”, 즉 “약속”이었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오늘 본문은 솔로몬의 말이지만, 실제로는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반드시 데리러 올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머잖아 이루어지겠지만, 아직은 그 때가 아니었습니다. 즉 술람미 여인의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의 핍박, 오빠들로부터의 고난! 이것이 술람미 여인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 여자들이 자신을 핍박을 하면 할수록, 오빠들이 힘들게 하면 할수록 자신을 데리러 오겠다고 한 솔로몬의 약속을 더 굳게 새기고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그녀가 살아가는 모습이었지요.

성도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조롱과 비웃음보다 왕후 대접을 받았다면, 만약 오빠들이 장차 왕후가 될 자기 여동생을 진작에 왕후로 인정하여 편하게 살게 해 주었더라면, 아마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그렇게까지 기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없어도 편한데 무엇 때문에 기다립니까? 설사 기다린다고 해도 애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면 좋지만, 안와도 대접받고 잘 사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왕궁에 가봐야 거기에는 자기보다 훨씬 예쁘고 집안 좋은 妃嬪들이 천지인데요! 그러나 핍박과 고난이 심하기 때문에 술람미 여인은 더욱 더 솔로몬을 오매불망 기다렸습니다. ‘언제쯤이나 오시려나? 왜, 빨리 안 오실까?’ 

여러분, 술람미 여인의 이러한 모습은 바로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남편이나 아내나 아이들이나 가족들이 밤늦은 시간인데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든가요?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으면 온갖 생각이 다 듭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길래 이렇게 소식이 없을까! 혹 사고라도 당한 것이 아닐까! 혹시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등등 온갖 불안한 상상을 다 합니다. 

걱정으로 땅이 꺼지듯 한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고,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해 합니다. 일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고, 글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온통 그 사람 생각뿐입니다. 그러다가 전화라도 와서 그 목소리를 들으면 그 동안의 불안과 염려와 근심이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듭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 藥이 됩니다. 그동안 쌓였던 온갖 시름을 잊고 마음에 평강이 넘치게 만들지요. 오늘 본문의 술람미 여인의 모습이 바로 이러합니다. 신랑이 오기 전까지 그는 고난 가운데 있었고 마치 혹독하게 추운 겨울 한복판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신랑의 약속을 떠올렸습니다. ‘아! 신랑이 온다고 했지! 신랑이 나를 데리러 온다고 약속했으니까 머잖아 그가 오겠구나!’ 그러면서 그녀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생기를 회복하여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상황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가셨다가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겠다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솔로몬이 떠난 것은 술람미 여인이 살 곳을 예비하러 떠난 것과 같고 그는 다시 돌아와 “함께 가자”고 권하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이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상황과 너무나도 일치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데리러 올 것이라는 말은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은 떠나야 할 곳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아가서의 내용은 성경이 성도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나그네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뒤를 따라 오직 믿음으로 사는 모든 성도 역시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골로새서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장차 신랑 되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여러분을 영원한 주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술람미 여인이 보여준 것은 바로 여러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약속을 기억한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때까지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 그렇지만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날에 여러분을 영원한 주님의 나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➁ 꽃 피고 새 울고 열매가 맺히는 날이 온다!

두 번째로 신랑 되신 주님이 다시 오시면 여러분의 삶은 어떻게 됩니까?  12절,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신랑의 소리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랑이 온다는 소리로 인하여 갑자기 계절이 바뀌는 등 자연의 신비한 조화가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술람미 여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를 말한 것입니다. 지면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마음이 너무도 기뻐서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즐거우면 자연스럽게 노래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새가 노래하고 비둘기가 운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신랑이 온다는 소리는 그녀를 한 마리의 새로 만들어 찬송이 터져 나오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성도의 심령은 천국이 됩니다. 그 속에 기쁨이 넘치면서, 마음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살아가는 모습이나 행동이 달라지게 되지요. 반대로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없고, 그 중심에 주님의 말씀이 없으면 정말 쌀쌀 맞습니다. 그렇지요? 아내고, 남편이고, 부모고, 자식이고, 모두에게 냉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이, 주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으면 얼굴에선 빛이 나고 입술에서는 찬송이 나오게 됩니다. 
 
이어서 13절은,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합니다. 

㉠ 여러분, “무화과나무”는 꽃이 없는 나무라고 해서 ‘無花果나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꽃이 안에서 피지 않습니까? 술람미 여인이 무화과나무 열매가 맺혔다고 노래하는 것은 자신의 심령에 꽃이 활짝 피었다는 말입니다. 아직 사랑하는 솔로몬은 오지 않았지만, 그래서 혹독하게 추운 겨울 한복판에 있는 것 같지만, 솔로몬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그녀의 마음에는 꽃이 만발하게 된 것이죠. 

㉡ 이어서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랑받는 성도의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이미 열매가 맺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은 후에 그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포도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이미 그 나무에 열매가 맺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술람미 여인의 지금 현실의 삶이 어렵고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사랑하는 이의 약속이 그녀로 하여금 인생의 봄처럼 꽃피고 새 울고 열매 맺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아직 신랑은 오지 않았으나, 단지 그의 약속만으로도 술람미 여인의 삶은 이렇게 놀라운 변화를 갖게 된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 불렀습니다만, “사랑을 하며는 예뻐져요! 아무리 못생긴 아가씨도 사랑을 하며는 예뻐져요!”라는 노래 아시죠? 여러분, 술람미 여인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직은 시골에서, 그리고 뙤약볕 아래서 포도원이나 돌보고 있으며, 머잖은 날 솔로몬을 따라 왕궁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공식적인 왕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왕후의 마음을 가지고 왕후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왕궁에 들어가야 왕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왕후로 사는 것, 그것이 자신이 왕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여인의 진정한 모습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이런 술람미 여인을 보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정말 당신은 나의 신부답구려!’ ‘당신은 나의 왕후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사람이요!’ 

여러분, 이런 술람미 여인과는 달리 사랑받지 못한 여자들, 영적으로 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약속을 잊고 사는 성도들은 어떨 것 같습니까? 사랑 받지 못하는 여인은 우선 까칠합니다.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눈빛은 날카롭고, 마음에는 여유가 없고, 말을 해도 그 말이 비수 같습니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가 되어 신경질과 짜증만 터져 나오지요. 혹시 여러분의 얼굴이, 여러분의 언어가 그렇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술람미 여인처럼 되시기 바랍니다. 장차 여러분도 주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그와 더불어 영원히 왕노릇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자처럼 ‘나 비록 지금은 험하고 힘든 세상에서 이런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살지만 그때 가면 달라질 것이다’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속에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다면, 그것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만들고, 여러분을 멋있고 예쁘게 만들며,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답게, 장차 주님을 영접할 자답게 사는 것, 이것이 술람미 여인이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성도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사랑 받는 자의 삶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솔로몬의 신부였던 술람미 여인으로부터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것은 왕의 사랑을 받는 신부는, 비록 지금은 힘든 땅에 살고 있을지라도, 또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가까이와 멀리에 많이 있을지라도 왕후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후처럼 사는 첫 번째 모습은 왕의 약속을 늘 기억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즉 장차 오실 왕의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할 뿐 아니라, 그것을 노래로 항상 읊조리는 성도가 이 땅을 왕후처럼 사는 성도입니다. 

두 번째는 왕이 오시면 이뤄질 삶의 봄날, 꽃피고 새 울고 열매 풍성한 그 날을 상상하고 소망할 뿐 아니라, 현실에서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내 생애 최고의 시절은 갔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제 생애에서 최고의 시절은 처음으로 담임목사가 되었던 서른일곱, 그때였습니다. 이제 내년이면 제 나이도 ‘쉰’인데, 저는 그 나이와 50이라는 숫자가 정말 싫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이런 저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날, 화려한 봄날은 지난 때가 아니라, 아직 남았다는 것입니다. 

신랑 되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그 날이 우리 생애의 최고의 날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날을 사모하는 사람에게는 매일이 생애 최고의 날이 된다는 것을 오늘 술람미 여인이 보여 주었습니다. 소망은 단순히 미래의 것이 아니라 오늘의 행복을 낳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런 술람미 여인의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시월에 부를 노래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가을은 더 풍성해질 것이고, 이 시월은 여러분에게 가장 특별한 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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