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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욕심을 버리면 길이 보인다 (롬 6:23, 약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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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을 버리면 길이 보인다 (롬 6:23, 약 1:15) 


옛날 동양의 선조들은 도(道)를 닦았습니다. 삶에 길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을 따라 아무렇게나 살지 않고 삶의 원칙을 정하고 그 원칙으로 길을 삼아 사람답게 살아보려는 마음에 도를 닦는 자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가 세계 최빈국 중에 하나였다가 이만큼 경제적으로 발전하게된 여러 이유 중 하나 아니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을 꼽겠습니다. 우리나라를 길을 뚫으면서부터 무섭게 성장하였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제패할 때도 제일 먼저 그리고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길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길은 다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생겨난 것일 겁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과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길입니다. 좋은 길을 내는 것입니다. 좋은 길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편 119:105절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말씀이 생명입니다. 우리의 성공과 승리와 구원과 생명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말씀은 같은 의미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말씀으로 풉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헬라인들에게 소개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설명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고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과 예수님이 곧 길이고 생명입니다.

여러 번 설교 중에 말씀을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어려서 교회 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학교 수위 이셔서 학교에서 살았는데 달도 없는 그뭄 밤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날은 참으로 무서웠습니다. 사실 무섭기는 보름밤도 무섭기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큰 운동장을 지나 무서운 커다란 학교 화장실을 지나서 집으로 가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서움을 잊기 위하여 찬송을 큰 소리로 부르며 다니곤 하였습니다. 그때 열심히 불렀던 찬송이 어린 아이하고는 잘 맞지 않아 보이는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였습니다. 저는 참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인생이 잘 풀린 케이스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제가 바라고 욕심내는 삶을 뛰어넘어 그 보다 더 잘 풀린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삶의 후회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을 좋아하면서도 제가 젊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젊어지는 것보다 나이 먹는 것을 더 좋아하고 나이 먹는 것에 기대가 더 많은 까닭은 제 삶이 잘 풀렸고 지금도 잘 풀리고 있기 때문에 앞이 궁금해서 인생의 뒤를 돌아 볼 마음이 안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가 무서워서 캄캄한 운동장에서 거의 악을 쓰다시피 불렀던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라는 찬송을 기도로 받아 주시고 정말로 저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나의 길이 되어 주셨고 나의 길을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제 평생의 길은 주와 함께 걷는 길이었습니다. 저도 사람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주와 함께 걷는 길이 처음부터 편하고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나이가 들고 세월이 지나면서 주와 함께 걷는 길이 참 복되고 형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길이 즐거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중요한 일이면 일일 수록 말씀 속에서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이해가 되든 이해가 되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그 길이 옳은 길이라고 믿고 가려고 부족하지만 노력하였습니다.

주와 함께 걷는 길은 언제나 옳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길을 찾아 걷는 것이 언제나 저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승리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구원의 삶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 삶의 원칙이 되고, 철학이 되고, 교훈이 되었습니다. 저는 시편 119편 105절의 말씀을 제 몸과 삶으로 압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아멘.

말씀 속에서 발견한 중요한 삶의 원칙 즉 길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의 말씀로마서 6장 23절과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리라”는 야고보서 1장 15절의 말씀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저는 그 말씀이 믿어졌습니다. 그래도 쉽지는 않아서 죄 안 짓고 살지는 못했지만 알기는 언제나 알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 지으면 죽는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확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는 길을 막는 특성이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길이 막히듯 죄가 인생에 사고를 치면 길이 막힙니다. 죄로 사고치는 것이 없으면 길이 뚫립니다. 

길은 사고가 나도 막히지만 차가 너무 많아도 막힙니다. 옛날에는 세탁기가 없었습니다. 빨래를 하려면 동네 빨래터까지 가서 빨래를 해 오곤 하였습니다. 지금은 집집마다 세탁기가 있어서 빨래를 세탁기가 다 해 줍니다. 제가 퀴즈를 낼테니 한 번 맞추어 보세요.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던 우리 어머니가 더 힘드셨을까요 아니면 전자동 세탁기에서 세탁을 하며 사는 우리 아내가 더 힘들까요? 답은 제 아내입니다. 왜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시던 우리 어머니보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하며 사는 아내가 더 힘들까요?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답은 옷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옛날엔 세탁기도 없었지만 빨 옷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세탁기는 있지만 옷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빨기는 세탁기가 빨지만 그것을 털어서 널고 그것을 걷어서 개는 일이 너무 힘듭니다.

저희 아파트는 45평입니다. 그런데도 좁습니다. 왜 좁은지 아십니까? 식구가 많아서요? 아닙니다. 물건이 많아서입니다. 옷장에 옷이 넘쳐납니다. 이제는 걸 때가 없습니다. 신발장에 신발이 넘쳐납니다. 더 이상 신발장에 신발을 넣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발은 자꾸 늘어납니다. 최근에도 제 신발만 네 켤레가 늘었습니다.

옷과 신발 뿐만이 아닙니다. 찬장엔 그릇이 하나 가득, 냉장고와 김치 냉장고에도 음식과 김치가 차고 넘쳐 빈자리가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온 집안이 포화 상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버려야 합니다.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다 쓸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다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버릴 수 없다면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면 됩니다. 그런데 다 쓰지도 못하면서 남 주기는 아까워서 붙들고 있는 것이 온 집안을 정복하고 있습니다.

넉넉하게 살려면, 깨끗하게 살려면 버려야 하고 덜 사야합니다. 그러면 우리 45평 아파트는 60평 아파트처럼 될 겁니다. 그런데 버리지 못하고 자꾸 사기만 하니까 45평 아파트가 30평 아파트처럼 되고 말았습니다.저는 우리의 마음과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욕심이 우리의 삶에 가득차서 우리의 삶을 답답하게, 복잡하게, 골치 아프게 그리고 둔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신나게, 기분 좋게 그리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욕심을 채워도 불행하고 욕심을 채우지 못해도 불행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불행은 욕심만큼 살지 못해서입니다. 현실보다 욕심이 늘 앞서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평생 욕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끝없는 욕심에 사로잡히면 정말 우리는 욕심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욕심의 노예가 되어 욕심을 정복하여 욕심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늘 불만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늘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뛰어넘는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심을 채우려고 하다가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죄가 비수가 되어 자신을 찌릅니다. 

욕심은 세상을 나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욕심은 자신만 못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못살게 합니다. 저는 동물들을 좋아해서 동물농장 같은 프로그램을 잘 봅니다. 그리고 동물의 세계도 잘 봅니다. 그러나 저는 동물의 세계보다는 동물농장이 더 좋습니다. 제가 동물농장을 더 좋아하는 까닭은 동물의 세계에는 사자나 호랑이 같은 놈들이 약한 동물들을 사냥하여 잡아먹는 그림이 늘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자와 호랑이에게 잡혀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약한 동물을 보는 것이 싫어서 잘 보다가 그 장면이 나오면 저는 화면을 돌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자와 호랑이와 같은 놈들이 약한 동물들을 잡아먹는데도 약한 동물들이 멸종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강한 동물에게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자나 호랑이가 사냥을 하는 것은 부를 축적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자기의 힘과 부를 과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짐승에게는 그와 같은 욕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먹기 위해서만 사냥을 합니다. 사냥을 하여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약한 동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동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먹고 쓰기 위하여 사냥하지 않습니다. 쌓아놓기 위하여 사냥하고 그 쌓아 놓은 자랑하과 과시하기 위하여 사냥을 합니다.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씨를 말릴 때까지 사냥을 합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에게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약한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는 겁니다. 저희 집 냉장고에는 음식이 넘쳐나고 있는데 북한에서는, 아프리카에서는, 가난한 동남아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겁니다.

다행히도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동물에게는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과 같은 욕심이 없기 때문에 자연계는 강한 동물도 살고 약한 동물도 삽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욕심이 있어서 강한 사람만 살고 약한 사람은 살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강한 사람도 못삽니다. 그렇게 욕심 사납게 차지한 것들이 결국에는 다 쓰레기가 되고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욕심 때문에 죄라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추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만 삶이 깨끗해지고 풍족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욕심을 버리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벼개하고 누워 지내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통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틀림없이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벼개하고 누워있는 것을 우리 기독교는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게으름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없음은 게으름으로 연결되기가 쉽습니다. 게으름은 욕심과 똑같이 죄가 됩니다. 게으름과 욕심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나만 좋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벼개하고 누워 지내는 사람들 아주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남을 돌 볼 생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폐를 안 끼친다는 점에서는 좋은 면이 있지만 폐만 안 끼칠 뿐이지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런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돈 벌고 성공하는 일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벌고 성공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공부해서 남주냐? 돈 벌어서 남주냐? 출세해서 남주냐? 하며 살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공부해서 남주자. 돈 벌어서 남주자. 출세해서 남주자는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제 텔레비전을 보니 성주 인터네셔널의 김성주 회장이 소개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비즈니스우먼이 되었습니다. 성공도 했고 돈도 많이 벌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김 회장은 그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부와 성공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관리하고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참 감사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저는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통하여 부족하지만 욕심을 버리는 훈련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버리는 훈련을 더 잘하기 위하여 버리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수입과 지출을 10년간 장부에 기록하면서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매달 하나님과 남을 위하여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듯하여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조금 부담이 될 만큼의 헌금을 하려고 힘들지만 노력합니다. 작년에 북한에 쌀을 보내기 위하여 모금을 할 때 처음 목표가 3억 원이었습니다. 모금을 하면서 그 목표의 십일조는 내가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도 인도에 3만 불짜리 차를 사보내려고 제 회갑 때 모금을 할 때도 차 한 대 분 3만 불을 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조금씩 욕심을 버리고 삶을 비우는 실력이 느는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은 있으면서도 욕심을 다 비우지 못해 망설이고 있었던 일을 올해 안에 하기로 결정하고 가족들에게 동의를 얻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제일 큰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그 동안은 그것의 절반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프리카 말라위 그물리라 사역을 시작하면서 그 돈을 내가 쓰는 것보다 그물리라 사람들과 그와 같은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는 것이 훨씬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씨앗학교 건립을 위해서도 헌금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이 되어 제가 드리려고 하는 것의 둘은 씨앗학교 건립을 위해 나머지 여덟은 열매나눔재단에 드리려고 합니다.

욕심부리면 그 돈으로 세 아이에게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정도의 아파트 한 채씩은 사줄 수 있습니다. 아이들도 그걸 알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해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 놈이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좀 많기는 하다. 우리로서는. 그래도 아버지 멋져요”

그 재산은 제게 큰 것이었지만 써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입지도 않고 옷장을 차지하고 있던 옷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드린다고 입을 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 먹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신을 신발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없어도 저는 여전히 지금처럼 먹고 입고 쓰고 살 겁니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먹고 입고 쓰고 사는 것과 아무 상관없이 그냥 제 재산으로만 묶여 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을 팔아 쓸 수도 있지만 그래보았자 제 삶이 더 아름다워지고 만족하여 질 것도 아닙니다. 그냥 포기하기로 하였습니다. 비우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을 버리고 비움으로 제가 얻는 유익이 많을겁니다. 그와 같은 것을 욕심내어 얻기 위하여 추해지지 않게 되고 죄짓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에도 영향을 미처 쓸데 없는 욕심 부리지 않게 되어 곱게 늙어갈 수 있게 할 겁니다. 욕심을 버리면 내 삶은 더 넓어지고, 깨끗하여지고 밝아지게 될 겁니다. 우리 말에 욕심에 눈이 먼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욕심의 문제를 조금씩이라도 버릴 수 있게 되면 그만큼 삶의 눈이 밝아져 지혜로워지지 않겠습니까? 길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 길을 통하여 길 되시는 예수님이 보이고 예수님과 더 가까워지지 않겠습니까?

욕심을 채우려고하면 인생의 집이 좁아지고 지저분해집니다. 욕심을 버리려고 하면 인생의 집이 오히려 더 넓어지고 깨끗하여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고 게을러지지 말고 욕심 있는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돈 벌어서 그것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섬김으로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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