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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정의 (히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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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정의 (히 11:1-3)


어느 직물 공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공장에서는 여공들이 실을 풀거나 감다가 얽히게 되면 무조건 공장장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여공이 작업을 하는 도중에 그만 실이 얽혀버렸습니다. 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여공은 즉시 공장장에게 보고를 하지 않고 자기가 해결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또 저렇게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실이 더 복잡하게 얽혀버렸습니다. 

그제야 여공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어 공장장에게 가서 실이 얽힌 것을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공장장은 복잡하게 얽힌 실을 보고 노발대발하며 물었습니다. “실이 얽힌 즉시 와서 보고를 해야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어요?” 여공은 겁먹은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공장장님, 저는 사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렇게 실이 얽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공장장은 그 소리를 듣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바로 공장장인 내게 보고하는 것이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게 하시오!” 그러면서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뜻하지 않게 삶이 얽힐 때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푸는 것이 최선의 길이겠습니까? 그때 내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문제가 더 복잡해집니다. 하나님께 보고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바른 태도입니다. 

기독교인이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하기에 사회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세상에 동화되어 조롱을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바른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살아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만이 변화와 개혁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라고 할 때 역사는 헬라어로 ‘에르곤’ 입니다. ‘행동’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하는 믿음이란 행동하는 믿음, 움직이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Working faith’ 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고로 믿음은 살아서 움직여야 합니다.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반드시 삶의 추진력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구절이 신약에 세 번 나옵니다. 로마서 1 장 17절, 갈라디아서 3장 11절, 히브리서 10장 38절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히브리서 기자는 실제적으로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생애를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인물들의 전시장’ 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삶과 행위와 인격 속에서 나타난 믿음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믿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합니다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목사는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백인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언제나 소외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렇게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워싱턴 대행진에서 루터 킹 목사는 유명한 ‘나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이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나는 오늘 나의 친구 되는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어렵고 좌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인의 꿈에 깊이 뿌리박힌 또 하나의 꿈입니다. 때가 오면 어느 날 이 나라가 일어서서, 우리는 이러한 진리가 자명한 것을 믿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독립선언문에 있는 선조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 내게 있습니다.” 그는 꿈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는 힘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여기의 실상이란 말은 히랍어로 ‘휘포스타시스’ 인데 ‘아래로부터 받혀준다’ 라는 뜻입니다. 건물의 기초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기초입니다. 믿음은 희망의 기초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서 믿음을 통하여 바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미지의 땅으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그 땅에 관하여 아는 바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므로 떠납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고 하였습니다. 이 무모하리만큼 담대한 아브라함의 행동이 바로 믿음입니다. 29절에 보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갑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바라고 건너갑니다. 30절에는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도는 행진을 합니다. 이것도 바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성을 돈다고 무너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돕니다.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는 힘입니다. 
 
둘째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1914년 8월 영국 탐험가 어니스트 새클턴 (Ernest Shackleton)은 27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최초의 남극탐험에 도전합니다. 탐험대는 한달만에 큰 빙산에 포위당하여 배가 난파됩니다. 필사적으로 탈출한 탐험대는 구조되기까지 634일 동안 상상을 초월한 상황과의 싸움을 합니다. 1년 9개월 동안 빙산에 갇혀 있으면서, 살기 위하여 고생한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살을 에는 혹독한 추위, 수 개월간 계속되는 칠흑 같은 어둠, 바다표범에게 물려 죽을 뻔한 위험, 장갑이 다 떨어져서 맨손으로 그 차가운 물속에 손을 넣기도 하였고, 동상에 걸려 발이 썩어 들어가는 위험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제 구조된다는 보장조차 없는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감이야 말로 사람을 절망시킬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사람도 희생됨이 없이 모든 최악의 조건을 극복하고 마침내 28명 전원이 구조됩니다. 어떻게 해서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까? 새클턴 대장의 믿음의 리더십과 대원들의 절대적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최선의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의 증거는 희랍어로 ‘엘렉코스’ 로서 ‘확신’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내적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홍수 심판이 내려서 진노가 임할 것을 예언하셨을 때 노아는 아무런 징조도 볼 수 없었습니다. 노아의 눈에 비가 올 징조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방주를 짓기 시작합니다. 그는 믿음의 눈을 통해서 비가 철철 내리고 온 땅이 물에 잠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미지의 땅을 향해 떠날 때도 사실은 그가 믿음의 눈으로 보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는 순종함으로 영광스러운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신의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공식은 다릅니다. 성경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하지 않고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으면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환상은 안 보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노아가 청명한 날씨만 보았다면 방주를 지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도 가도 끝없는 벌판을 보았다면 가나안까지 갈 수 있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의 벽만 보았다면 행진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보이는 것은 우리를 좌절시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의 계획을 볼 때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을 비로소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힘입니다.  

셋째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합니다 

1492년 8월 4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는 88명의 선원을 모집하여 3척의 작은 배로 신천지를 발견하겠다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항해하는 70일 동안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반란과 생명의 위협과 돌아가자는 선원들의 주장 때문에 온갖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때 콜럼버스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세계를 보여주실 것이다.” 마침내 10월 12일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신념과 신앙은 다릅니다. 신념은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분명한 믿음의 대상이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며 위대한 업적을 성취하게 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리라”. 여기의 증거는 희랍어로 ‘말튜레오’인데, ‘법적인 증거’라는 뜻입니다. 법적인 증거로 체택된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심증이 아니라 물증입니다. 선진들이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확실하고 분명한 결과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움직일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를 가져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이 증거라는 단어가 계속 등장합니다. 11장의 결론부인 39절은 11장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이 증거를 받은 사람들은 12장 1절에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이라고 가르칩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더니 하나님이 제사를 받아 주셨습니다. 그것이 증거입니다.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더니 홍수 심판 속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떠났더니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증거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여 마침내 백성들을 해방시켰습니다. 증거를 받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돌았습니다. 그리하여 성이 무너지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받은 증거는 분명합니다. 믿음은 놀라운 증거를 가져옵니다. 믿음이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장군에게 부하가 달려와 급히 보고합니다. “장군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말합니다. “무슨 소리! 상황은 내가 만든다! 상황은 내가 만든다!” 이것이 바로 그의 승리 비결이었습니다. 상황이나 환경을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황은 비전에 의해 극복되며 비전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 믿음은 우리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건강이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믿음입니다. 부디 믿음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시기 바랍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믿음의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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